논어 통석 위정편 2

논어 위정편 제2

나무와 까치 2018. 10. 12. 21:03

[爲政 제2편]

‘위정’편은 대체로 정치와 관련한 인성과 그 자질에 대한 내용이 많다. 힘써 배우고 몸으로 익힌 도와 덕의 밝음을 바탕으로 참되게 인을 행함으로써 백성이 안정되고 삶이 즐거운, 덕의 치세를 구현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제2-1장>

子曰 為政以譬如北辰 居其所而眾星共之

공자가 말했다. 덕으로 정치함을 북극성에 비유하면 (스스로 진중하게 자기의) 위치에 있으되 뭇별들이 그를 향하여 (한가지로) 모이는 것과 같다.

[注] 為政以德: 덕으로 정치를 하다. 본래 ‘덕’이란 ‘도’의 밝음을 사람이 그대로 좇아 행하는 것이다. 『논어』에서 공자는 德에 대하여 특별히 설명하지는 않으나 대체로 ‘천지자연의 참된 밝음을 인간이 그대로 좇아 이행함’을 뜻한다.]

 

 

<제2-2장>

子曰 詩三百一言以蔽之 曰 思無邪

공자가 말했다. 시 삼백 편을 한마디 말로써 개괄한다면 ‘생각함에 있어서 사악함이 없도록 한다.’라고 말한다.

[注] 詩三百: 『시경』은 모두 305편의 시를 수록하고 있기 때문에 흔히 ‘시 삼백’이라 한다.]

 

 

<제2-3장>

子曰 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之以齊之以禮 有恥且格

공자가 말했다. 정치(적 행위)로써 도를 행하며, 형벌로써 (천하의 질서를) 가지런히 한다면 백성은 형벌만을 면코자하므로 수치심이 없다. (그러나) 덕으로써 도를 행하고 예로써 (천하질서를) 가지런히 한다면 (백성은) 부끄러움을 가지며, 또한 품격을 갖추게 된다.

[注] 道之以德: 『논어』에서 공자가 말하는 ‘道’는 궁극적으로 우주 대자연이 운행하는 섭리로서의 길(道)이며, 구체적으로는 주역에서 말하는 천도운행의 법도法道를 일컫는다. 그러한 천지자연의 섭리를 자연의 일부인 사람이 그대로 본받음으로써 인간사회가 굴러가는 법도가 되며, 이것이 곧 인간 개개인에 있어는 인간으로서 의당 가야할 길(The Way men have to go)로서 도리이고 사회의 윤리이며, 곧 ‘올바른 길’인 것이다.

德’은 도의 밝음을 사람이 그대로 좇아 이행하는 것이다. 『논어』에서 ‘도’와 ‘덕’은 대체로 ‘마땅히 해야 할 인간의 도리’ 정도의 개념으로 통용된다.

이 장에서 도ㆍ덕의 개념은 『노자』에서의 도ㆍ덕의 개념과 그 중 아주 가깝다. 아마도 공자 역시 노자의 도와 덕을 그대로 이해하며 공감하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부분이다.

≪참고: 『노자』에서 ‘道’는 천연한 우주의 섭리를 물아일체의 입장에서 관찰한 개념으로서 ‘우주대자연의 섭리와 같은, 상자연한 도’를 일컫는다. 그러한 도의 실체와 작용이치(섭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몸으로 체득하는 것을 ‘도의 밝음’이라 일컫는다.

마음의 빔을 지극하게 하고 성정을 고요히 함으로써 노자는 스스로 참된 본성을 닦아 사물의 근본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였고, 그러한 물아일체의 바탕에서 한 치도 어김이 없는 무한한 섭리로 도도히 운행하는 우주대자연의 어떤 유기적 실체를 통찰하였던바, 이것이 곧 ‘도道(의 존재)’이다. 『노자』에서는 이를 ‘天之道’ 또는 大道’라고도 하였다.

덕德’이란 ‘道’의 밝음을 인간이 그대로 좇아 참되게 이행하는 것을 말하며, ‘인仁’은 그러한 덕을 한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지극히 행함을 의미한다.

禮: 『논어』에서 ‘禮’는 단순히 윤리나 예절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禮’는 크게는 천지자연의 천연한 질서이며, 작게는 인간이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분수’를 말한다. 그리고 천지자연의 천연한 질서와 인간의 분수를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 예악이다. 결국, 예는 인을 행하는 최선의 수단인 것이다. 따라서 예를 잃는다는 것은 곧 삶의 법도를 거스르는 일이고, ‘길(道)’을 잃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는 정성을 다해 예를 행하되 현실에서의 쓰임에는 그 조화가 필요하다고 하였다.(제1-12장)≫

 

 

<제2-4장>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공자가 말했다. 나는 (나이가) 열다섯이 되어 배움에 뜻을 두었고 30이 되어서는 (스스로 그 위에) 서게 되었으며, 40이 되어서는 (인간사 모든 이치에) 의혹이 들지 않았고 50에는 천명을 알았으며, 60에서는 (모든 것을 용납하고 긍정하므로) 귀가 순해지고 70이 되어서는 마음이 하고자하는 바를 따르더라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았다.

[注] 三十而立: 30이 되어서는 (그 뜻 위에 스스로) 서게 되었다. 여기서 ‘立’은 ‘배움에 뜻을 두고 거기에 스스로 우뚝 섬’이며, ‘입지를 세우다’로 새긴다.

四十而不惑: ‘不惑’은 ‘(인간사 모든 이치에) 의혹이 들지 않음’이다.

五十而知天命: ‘천명’은 ‘하늘의 소명召命’이다. 즉, ‘하늘의 뜻’이며 ‘하늘의 섭리’와도 통한다.

六十而耳順: ‘耳順’은 ‘귀가 순함’이다. 내게 상관되는 세상일들이 근본에 통달하거나 혹은 통달 못하더라도 그 모두를 내가 스스로 용납하고 긍정하고 조화하므로 마음에 거슬림이 없다는 것으로, 즉 귀가 순하다는 것이다.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마음이 욕구하는 바를 그대로 따르더라도 적절함을 넘어서지 않았다는 것은 일상에 있어서 심心ㆍ언言ㆍ행行의 일치를 의미한다. 즉, 참되고 소박한 마음으로 자기 스스로를 냉철히 경계하되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는 정성스럽고 겸손하여 그것이 체질화됨으로써 안팎이 하나로 자연스러운 상태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矩’는 ‘구척矩尺(곱자)’의 뜻이며 표준, 기준, 규범, 법도法度 혹은 적절함 등으로 새길 수 있다.]

 

 

<제2-5장>

孟懿子問孝 子曰 無違 樊遲御 子告之曰 孟孫問孝於我 我對曰 無違 樊遲曰 何謂也 子曰 生事之以禮 死葬之以禮 祭之以

맹의자가 효에 대하여 문의하였던바 공자가 말했다. “(예에) 어긋남이 없어야 합니다.” (맹의자는 공자의 그 말에 다시 더 질문을 하지 않았는바 공자는 그것이 혹여 맹의자가 ‘무위無違’를 ‘생전에 아버지의 명命을 어기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였을까 우려하여) 번지가 (돌아가는 길에 말을 몰아 공자를) 모실 제 공자가 (번지에게) 말했다. “맹손이 나에게 효를 묻기에 내가 대답함에 (다만 그저) ‘어긋남이 없어야한다’고만 말했다.” (그러자) 번지가 말했다. “무슨 말씀입니까?” 공자가 말했다. “살아계실 때 예로써 받들고, 돌아가시면 예로써 장례를 치르며, 제사를 예로써 모신다는 것이다.”

[注] 孟懿子: 맹의자는 노나라 소공昭公 때 대부大夫로서 삼환의 하나이며 성은 중손仲孫 혹은 맹손孟孫, 이름은 하기何忌, 시호諡號는 의懿이다.『좌전左傳』에는 그의 아버지 맹희자孟僖子(중손확仲孫貜)가 임종하면서 아들 맹의자에게 공자를 찾아 예를 배우도록 유언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소공昭公 7년).

無違: (예에) 어긋남이 없도록 한다. 이는 당시 노나라의 삼대부의 집안이 예를 참칭하고 있으므로 그런 방식으로는 부모를 아무리 잘 모시더라도 효가 아님을 말하고 있다.

樊遲: 번수樊須. 노魯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수須 자는 자지子遲이다(BC 515년-?). 공자의 제자로 특별한 재주는 없었으나 순박하고 성실한 성격으로 일찍이 계씨季氏 집안에서 벼슬을 하며 이득을 가까이 하였다고 알려진다. 혹자는 번지가 제齊나라 사람이라고도 한다.]

 

 

<제2-6장>

孟武伯問孝 子曰 父母唯疾之憂

맹무백이 효에 대하여 여쭙자 공자가 말했다. 부모는 오직 당신들이 병들까봐 그것을 걱정하시느니라.

[注] 孟武伯: ‘맹무백’은 맹의자의 아들로 성은 중손仲孫 이름은 체彘이며, 시호諡號는 ‘武’이고 ‘伯’은 항렬이다.

父母唯其疾之憂: 여기서 ‘其’는 부모 자신을 가리킨다. 맹무백에게는 연로한 부모를 잘 모시라는 매세지로 해석된다.]

 

 

<제2-7장>

子游問孝 子曰 今之孝者 是謂能養 至於犬馬 皆能有養 不敬 何以別乎

자유가 효에 대하여 여쭈니 공자가 말했다. 지금에 효라는 것은 다만 (부모를) 식양食養할 수 있음을 일컫는다. 개나 말에 있어서도 대개 식양은 있을 수 있다. (부모를 먹여 기르면서) 공경하지 않는다면 (견마와) 무엇이 다른가?

[注] 子游: 공문십철의 한 사람으로 성은 언言이고 이름은 언偃이며, 자는 자유子游이다(BC 506- ?). 『사기』에는 오吳나라 사람으로 공자보다 45세 아래로 되어있고, 『공자가어』에는 노나라 사람으로 35세 아래인 것으로 나온다. 20여세부터 관직생활을 하였고, 무성武城의 읍재로 있으면서 예악禮樂으로 정치를 펼쳤다고 한다. 자하子夏와 함께 문학으로 알려지는데 자하가 형식적인 예를 소중히 여긴데 반해 자유는 보다 근본적인 것을 소중히 여겼으며, 안연顔淵ㆍ자하子夏와 함께 공자가 많이 아낀 제자로 되어있다.]

 

 

<제2-8장>

子夏問孝 子曰 色難 有事弟子服其勞 有酒食先生饌 曾是以為孝乎

자하가 효에 대하여 여쭈니 공자는 말했다. (그) 안색이 어렵다. 일을 받듦에 있어 젊은이는 부모의 애써하는 바를 좇아 따르고, 술과 음식이 있으면 (부형父兄 등) 연장자부터 (먼저) 차려드리는바, (그대는) 일찍이 이런 것을 효로 하였던가?

[注] 子夏: 卜商. 위衛나라 사람으로 성은 복卜 이름은 상商이며 자는 子夏이다(BC 507-?). 공문십철의 한 사람으로 내면의 마음을 중시하는 증자曾子 등과 달리 자하는 예의 형식을 중시하였으며, 자유子游와 더불어 문학에 능하였다.

色難: (부모나 자식 모두의) 안색이 어렵다. 부모는 부모된 입장 때문에 혹은 자식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마음을 내색하지 않는바 이를 올바로 보살피는 것이 어려우며, 자식은 부모를 편안하게 모시고자 스스로 밝은 안색과 즐거운 행동을 가져야 하나 그것이 사실은 어려운 것이다.

예의 형식을 중시하는 자하에게 예의 형식보다 내면에서 우러나는 참된 마음과 정성으로 온화한 안색과 유순한 행동을 보여드리는 것이 효의 본질임을 말하며, 지금 너에게 절실한 것이 그것이라고 한다.

본편의 앞장에서 이미 맹의자, 맹무백, 자유 등이 공자에게 효에 대하여 질문하였던바 공자는 그 때마다 대답을 달리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질문하는 사람의 특성과 수준, 입장을 고려한 공자 나름의 ‘맞춤교육’이라 여겨진다.

有事弟子服其勞: ‘服’은 옥편에 옷, 옷을 입다, 좇다, 따르다, 복종하다 등으로 나온다. ‘복을 입는다’는 것은 ‘복식服式을 따른다’는 것이고, 이는 곧 상대의 풍습과 법식을 따르는 것이며 ‘복종服從’과 통한다. 여기서 ‘服’은 ‘부모의 애써하는 바를 따르다’로 새긴다.

曾是以為孝乎: (그대는) 일찍이 이런 것을 효로 하였던가? 즉, 그런 것들은 효라고 말하기 이전에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인바 그보다는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근본적인 것에 정성을 쏟아야 할 것이다.]

 

 

<제2-9장>

子曰 吾與回言終日 不違如愚 退而省其私 亦足以發 回也不愚

공자가 말했다. 내가 회와 더불어 종일토록 말을 했는데 (내내 뜻에) 어긋남이 없었는바 우둔한 것 같았다. (그러나) 물러나 자기 사적인 것을 성찰함에 발생한 (말과 행동 등의) 일들이 (내 마음에) 흡족하였다. 회는 우둔한 것이 아니었다.

[注] 回: 노魯나라 곡부曲阜 사람으로 성은 안顔이고 이름은 회回, 자는 자연子淵이다. 안회顔回는 공문십철의 한 사람으로 누구보다 공자의 뜻을 잘 이해하고 따랐던 공자의 애제자이며, 후대에서는 안자顔子 혹은 극기복례의 復자를 써서 복성複聖, 아성亞聖 등으로 존칭한다(BC 521년-BC 481년?). 『사기』와 『공자가어』에는 모두 안연이 공자보다 30세 아래이며 29세에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고 나와 있다. 『공자가어』에는 안회가 32세에 죽은 것으로 나오며, 『사기』에는 일찍 죽었다고만 되어있다. 『논어』에서는 안연이 공자의 아들 백어보다 뒤에 죽은 것으로 나오는데, 이에 따르면 백어가 공자 70세에 죽었으므로 안연은 나이 41세~42세에 죽은 것이 된다.

선진편 제11-8장에는 안연이 젊은 나이에 먼저 죽자 공자는 ‘(내가 회를 잃은 것은) 하늘이 나를 잃은 것이다.’라며 목을 놓아 울었다는 일화가 나온다.]

 

 

<제2-10장>

子曰 視其所以 觀其所由 察其所安 人焉廋哉 人焉廋哉

공자가 말했다. 그 (사람의 행하는) 까닭을 보고, 그 연유하는 바와 (궁극에) 그 안정하는 바를 관찰한다면 사람이 어찌 (그 본성을) 숨길 것인가, 사람이 어찌 (그 성품을) 숨길 것인가?

 

 

<제2-11장>

子曰 溫故而知新 可以為師矣

공자가 말했다. 옛일을 따뜻하게 품어 (그 교훈을 소중히 여기면서 지금의) 새것을 안다면 가히 스승이 될 만하다.

 

 

<제2-12장>

子曰 君子不器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그릇(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注] 君子不器: ‘器’는 어떤 하나의 도구나 기물을 말하며, 여기서는 특정하게 쓰이는 재주나 기술을 가진 인재를 의미한다. 군자는 어떤 재주를 갖춘 재목이 아니라 밝은 앎과 참된 덕을 바탕으로 두루 어짊을 실천하는 사람인 것이다.

≪참고: 『논어』에서 ‘君子’는 밝은 앎과 참된 덕을 바탕으로 두루 어짊을 실천하는 사람을 말한다. 본래 ‘君’은 밝은 앎과 참된 덕을 갖춘 (옛날의) 참된 지도자 혹은 참된 임금을 뜻하며, ‘君子’는 ‘君’의 자제나 공적이 있는 귀족으로 봉한 제후 혹은 지방의 지도자를 일컫는 호칭이다. 또한 ‘君子’는 주나라 때 한 지방의 지도자로서 중앙정치에 진출한 고위관료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이후 ‘군자’는 학식과 덕행이 높은 사람, 벼슬이 높은 사람 등으로 의미가 확장되면서 ‘士(선비)’와도 의미가 통하여 ‘참된 선비’ 또는 ‘大人’ 등의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주희는 『사서집주(‘태백’편)』에서 ‘君子謂在上之人也(군자는 사람들의 위에 있는 사람, 즉 임금이나 지도자를 일컫는다.)’라고 하였으며, ‘선진’편에서는 어진사대부라고 주석하였다(君子謂賢士大夫也).≫]

 

 

<제2-13장>

子貢問君子 子曰 先行其言而後從之

자공이 군자에 대하여 여쭈니 공자가 말했다. 먼저 자기의 말을 이행한 이후에 그에 따르는 것이다.

[注] 先行其言而後從之: 자기의 말을 먼저 이행한 이후에 사태의 추이를 따른다. 이 부분은 상거래에 능한 자공의 대인관계를 경계하는 의미가 있다.]

 

 

<제2-14장>

子曰 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인재를) 두루 쓰되 비교하(여 차별하)지 않으며, 소인은 (사람을) 비교하되 두루 쓰지 않는다.

[注] 군자는 공과 사를 분명히 함으로써 사사로움이 없이 인재를 두루 기용하나 소인은 사리사욕을 앞세워 패당을 가르고 사람을 자기와의 친소관계로 비교하여 판단한다.]

 

 

<제2-15장>

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공자가 말했다. 배우되 생각하지 않으면 (체계적으로 소화하지 못하여) 엉성하고, 생각하되 배우지 않으면 (편협하여) 위태롭다.

 

 

<제2-16장>

子曰 攻乎異端 斯害也已

공자가 말했다.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 이단(의 논리)을 다그치면 이야말로 해로울 뿐이다.

[注] 異端: 여기서 ‘이단’이라 함은 ‘다른 끝단’으로서 도의 참된 의미를 벗어나는 법가, 묵가, 비정통 도가(양주楊朱) 등의 극단적인 논리를 말한다.]

 

 

<제2-17장>

子曰 由 誨女知之乎 知之為知之 不知為不知 是知也

공자가 말했다. 유야, 너에게 안다는 것에 대하여 가르쳐주겠노라. 아는 것은 아는 것이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는 것, 이것이 (참된) 앎이다.

[注] 이 장은 성질이 급하고 고지식하게 우기는바가 있는 중유에게 참된 앎이란 모르는 것은 그대로 모른다고 하는 것이라며 일깨우는 의미가 있다.

由: 중유仲由. 노나라 변卞(지금의 산동성山東省)지방 출신으로 성은 중仲 이름은 유由이며, 자는 자로子路(또는 계로季路, 자유子由)이다. ‘季路’는 50세가 되면 백伯ㆍ중仲ㆍ숙叔ㆍ계季의 항렬과 자字를 사용하는 당시의 예법에 따른 호칭이다. 공자보다 9세 아래로서 제자 중에서는 최고 연장자이고 중심적인 인물이었다.(BC 542년-BC 480년)

자로는 성미가 급하고 저돌적이며 용맹과 의협심이 강하고 솔직담백한 기질로 본디 거칠고 무술을 좋아하는 무뢰한이었으나 공자의 훈계를 받아 공문孔門에 입문한 인물이다. 자로는 공자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면 곧바로 실천에 옮기며 헌신적으로 공자를 섬겼던바 공자도 그를 매우 아꼈던 것으로 『논어』에도 잘 나타난다.

자로는 공자 만년에 위衛나라에서 벼슬하던 중 장공과 그 아들 출공이 부자간에 임금의 자리를 놓고 다투던 중에 의미도 없는 명분을 고집하다가 죽음을 당했다. 공자는 이미 그 내란의 소식을 들었을 때 자로의 죽음을 예언했다고 한다.]

 

 

<제2-18장>

子張學干祿 子曰 多聞闕疑 慎言其餘 則寡尤 多見闕殆 慎行其餘 則寡悔 言寡尤 行寡悔 祿在其中矣

자장이 (벼슬로서) 봉록을 구함에 대하여 배우려하는바 공자가 말했다. 많이 들어서 의문 나는 것은 그대로 비워두고 그 나머지를 삼가 말하면 허물이 (아주) 적을 것이다. 많이 보아서 위태로운 것은 제외하고 그 나머지를 삼가 행하면 후회가 거의 없을 것이다. 말에 허물이 적고 행동에 후회가 거의 없으면 녹은 그 가운데에 있느니라.

[注] 子張: 진陳나라 사람으로 성은 전손顓孫 이름은 사師이며, 자는 자장子張이다(BC 503년-?). 공자보다 48세 아래의 제자로서 자유子游, 자하子夏 등과 함께 예禮를 중시하였다.

자장은 얼굴이 남달리 잘 생겼으며, 배움에 열의가 있고 매사에 의욕적이라 위급한 것을 보면 생명을 내걸 정도로 의협심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자는 이와 관련하여 자장에게 말과 행동에 신중을 기하도록 이르고 있는 것이다.

干祿: 녹을 구하다. 곧, 벼슬아치로서 봉록에 나아가다.]

 

 

<제2-19장>

哀公問曰 何為則民服 孔子對曰 舉直錯諸枉 則民服 舉枉錯諸直 則民不服

애공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백성들이 (참되게) 복종하여 따르겠습니까? 공자가 (그에) 대답했다. 곧은 것을 들어(서 천거해)주고 그 외의 구부러진 것을 (그대로) 놓아두면 백성을 곧 따를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구부러진 것을 들고 곧은 것을 내버려두면 백성은 따르지 않습니다.

[注] 哀公: 노魯나라 제28대 임금으로 성은 희姬 이름은 장蔣, 소공昭公의 손자이며 정공定公의 아들이다.(재위 BC495년-BC468년).

孔子: 여기서 공자를 ‘子’로 하지 않고 ‘孔子’라 표시한 것은 공자가 지존인 군주와 대화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제2-20장>

季康子問 使民敬忠以勸 如之何 子曰 臨之以莊則敬 孝慈則忠 舉善而教不能則勸

계강자가 물었다. 백성들로 하여금 공경하며 충성스럽도록 하고 권면토록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백성에 대하여) 장중함으로 임하면 곧 공경하게 되며, (자기가 스스로 부모에) 효도하고 (사람들을) 자애로 대하면 (백성은) 충성하게 됩니다. 참됨을 들어서 (그렇지) 못함을 가르치면 곧 힘써 부지런하게 되는 것입니다.

[注] 季康子: 춘추 말기 노魯나라의 세도대부인 계환자季桓子(계손사季孫斯)의 아들로 이름은 비肥, 시호는 강康이다(출생?-사망 BC468년). 염유冉有를 가재家宰로 삼아 제齊나라의 공격을 여러 차례 물리쳐 공을 세웠으며, 나중에는 공자를 위衛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오게 했으나 등용하지는 못했다.

勸: 권면勸勉. 힘써 부지런하다.

莊: ‘莊’은 장중莊重 혹은 엄정嚴正의 뜻으로 새긴다.]

 

 

<제2-21장>

或謂孔子曰 子奚不為政 子曰 書云 孝乎 惟孝友于兄弟 施於有政 是亦為政 奚其為為政

어떤 이가 공자에게 일러 말했다. 선생은 어찌 정치를 하지 않으십니까? (이에) 공자가 말했다. 『서』에 이르기를 ‘효란 (어버이에 대한) 효와 형제간의 우애를 생각하는 것으로, (이는) 정치가 있어 시행되는 것이로다.’ 하였다. 이 역시 정치인데 어찌 (조정에서) 정치를 하는 것만이 (정치가) 될 것인가?

[注] 書云: 『書』는 『尙書』 즉, 『書經』이다. 인용구절은 「周書」 ‘군진君陳’편에서 종주宗周(호경, 수도)에 있던 주공周公이 죽으면서 군진을 동교東郊 성주成周(낙읍)에 보내면서 명한 말이다.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를 존중하는 그 마음을 널리 써서 한 집안의 다스림으로 삼는다는 것은 정치 그 이전에 중요한 정치라는 의미가 된다.

정공定公(재위 BC 509년-BC 495년) 초기에 공자는 벼슬을 하지 않았는데 누군가 그것을 의아하게 여겨 공자에게 물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자는 이 부분을 인용하며 굳이 조정의 부름을 받아야 정치를 한다고 하겠는가 하고 말하였으나 내심은 때를 기다리고 있던 당시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제2-22장>

子曰 人而無信 不知其可也 大車無輗 小車無軏 其何以行之哉

공자가 말했다. 사람으로서 믿음이 없다면 (함께 상대하는 것이) 그 가당한지 알지 못한다. 큰 수레에 끌채 끝의 쐐기가 없고, 작은 수레에 끌채 끝의 고리가 없다면 그것이 어찌 운행하여갈 것인가?

[注] 輗ㆍ軏: ‘예輗’는 대거(소가 끄는 큰 짐수레)의 끌채 끝에 붙어 있는 쐐기이며, ‘월軏’은 소거(말이 끄는 작은 승용의 수레)의 끌채 끝에 나무를 고정하는 쐐기이다.]

 

 

<제2-23장>

子張問 十世可知也 子曰 殷因於夏 所損益可知也 周因於殷禮 所損益可知也 其或繼周者 雖百世可知也

자장이 여쭈어 물었다. (앞으로의) 십 세를 알 수가 있겠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은나라(의 제도)는 하나라의 예에서 비롯하였으니 (그에서) 덜고 더한 것을 알 수 있다. 주나라는 은나라의 예에서 비롯하였으니 (그에다) 덜고 더한 바를 알 수 있다. 혹 어떤 나라가 주나라를 계승한다면 비록 백 세라도 (예가 삶의 근본 질서로서 이어짐을) 알 수 있는 것이다.

[注] 이 부분은 결국 십 세, 백 세가 지난 먼 훗날에도 인간사회를 지탱하는 근본으로서 ‘예’는 변함이 없으며, 다만 시대의 상황에 따라 거기에 덜고 더함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禮: 『논어』에서 ‘禮’는 단순히 윤리나 예절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禮’는 크게는 천지자연의 천연한 질서이며, 작게는 인간이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분수’를 말한다. 그리고 천지자연의 천연한 질서와 인간의 분수를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 예악이다. 결국, 예는 인을 행하는 최선의 수단인 것이다. 따라서 예를 잃는다는 것은 곧 삶의 법도를 거스르는 일이고, ‘길(道)’을 잃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는 정성을 다해 예를 행하되 현실에서의 쓰임에는 그 조화가 필요하다고 하였다.(제1-12장)

≪참고: ‘禮’는 본래 음식을 풍성히 차려놓고 귀鬼와 신神에 제사지내는 의미를 나타낸 글자이다. 귀와 신, 곧 귀신이 천상과 지상의 모든 세계를 지배하던 당시의 현실은 살아있는 사람을 제물로 바쳐 귀신의 환심을 얻으려할 정도로 귀신이 사람보다 더 높고 실질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한 대상에게 경배하며 제사를 올린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지극히 신성한 행위이며 삶을 살아가는 현실의 가치기준이 된다. 그것은 자신과 그 종족이 자연적 재난과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안위와 생존을 지킬 수 있는 궁극적 수단이기도 하다. 그러한 바탕에서 사회적 법도와 윤리의 기본 틀이 규정되는 것이다.

十世可知也: 여기서 십 세는 왕조가 바뀌는 조대朝代의 수를 의미하고 있다. 혹은 30년 정도의 기간을 1세라고도 하는데 여기의 문맥으로 본다면 ‘世’는 왕조의 조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함이 타당하다.

周因於殷禮 所損益可知也: 주나라는 은나라의 예에서 비롯하였으니 (그) 덜고 더한 바를 앎이 가능하다. 인간 삶의 근본이 되는 예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함없이 그대로 이어질 것이되, 거기에는 그 시대의 상황과 특성에 따른 법식과 제도, 문물의 덜고 더하여짐은 있게 될 것이다.]

 

 

<제2-24장>

子曰 非其而祭之 諂也 見義不為 無勇也

공자가 말했다. (마땅히 제사를 지내야하는 조상의) 그 귀신이 아님에도 제사를 지낸다면 (복을 구하고자) 아첨하는 것이며, 올바름을 보고도 (그것을 좇아) 하지 않으면 용기가 없음이다.

[注] 非其鬼而祭之: 여기서 ‘鬼’는 ‘귀鬼와 신神’의 의미를 함께 가지는 것으로 이해된다.

고대 상商나라(은殷나라의 본명)의 갑골문, 금문 등에서 ‘鬼’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뜻하는데, 이는 원래 상왕조의 선왕이나 왕조가 성립되기 전의 선대 조상을 의미하였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왕해王亥, 왕긍王亘, 상갑미上甲微 등을 ‘제帝’라 하였으며 특히 시조인 설契(또는 설卨, 현왕玄王)은 ‘상제上帝’라 하였다.

상商 대의 갑골문에 나오는 ‘神’의 초기문자는 번개를 형상화한 ‘신申’인데, 풍백風伯, 우사雨師 등 上帝의 사자신使者神과 하河, 악岳 등의 자연신이 그에 해당한다. ‘상제’는 이러한 신을 포함하여 백신百神을 거느렸다고 하는바 우주의 모든 신神 중에서 최고 으뜸신이다(갑골문ㆍ금문 및 『한자의 세계(시라카와 시즈카)』 참고).

이상에서 보듯이 ‘鬼神’은 상왕조의 조상과 선왕을 뜻하는 ‘鬼’와 풍백, 우사, 하, 악 등의 百神을 뜻하는 ‘神’을 포괄하는 의미이다. ‘鬼神’이라 하여 전통적으로 ‘鬼’자가 ‘神’자보다 앞에 위치하여 사용되는 연유도 이러한 어원에서 확인할 수 있다.(『논어』 ‘태백泰伯’편 제8-21장 ‘(禹)而致孝乎鬼神’ 및 ‘선진先進’편 제11-11장 ‘季路問事鬼神’의 ‘鬼神’ 용례 참고)

결국 ‘鬼’와 ‘神’이 합쳐진 ‘귀신’은 상제와 상제가 부리는 우주의 백신을 포괄하는 말로서 한편으로는 상제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다. 상나라가 멸망하고 주周왕조가 들어서면서 ‘上帝’는 ‘天帝’ 또는 ‘天神’의 개념으로 바뀐다. 말하자면 당시의 ‘귀신’과 ‘상제’, ‘천제’, ‘천신’ 등은 동의어였던 것이다.

이후 ‘鬼神’의 본래 의미는 주로 ‘상제’, ‘천제’, ‘천신’으로 남게 되고 ‘귀신’은 사악한 이족異族의 神이나 제 잡신을 망라하는 개념으로 그 의미가 확장된다. 흔히들 말하는 물귀신이나 몽달귀신 달걀귀신 도깨비 같은 것들은 그러한 귀신 본래의 개념에서 토속화하고 미신화한 것들이다.

왕은 이렇듯 ‘하늘(天帝 또는 천신)의 아들(天子)’로서 천하를 아우르는 존재이며, 천하의 모든 神 가운데 으뜸 神이다. 인간은 그렇게 스스로 신을 창조해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 신에게 모든 것을 온전히 맡기고 지배받으면서 살아간다.

참고 1: 은殷나라는 탕湯 임금이 하夏나라를 멸하고 세운 왕조이며 원래 국명은 상商이다. 상商나라의 시조는 설契(또는 설卨)이라 하며 건乾이라 쓰기도 한다. 황제黃帝의 증손 제곡帝嚳의 두 번째 부인인 간적簡狄이 현조玄鳥(제비)의 알을 삼키고 낳은 아들이라 하여 현왕玄王이라고도 한다.

설은 우禹임금의 치수를 도와준 공이 있으므로 제순帝舜이 사도司徒라는 벼슬과 함께 상商에 봉하고 자子라는 성姓을 주어 백성을 다스리게 하였다. 그로써 백성은 평화를 되찾았고, 성탕成湯(태을太乙) 시대에 이르러 상은 하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했다.

참고2: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오랜 세월 우리의 의식 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내려오는 鬼神이나 영혼의 개념 등 동양의 사상들은 대체로 이러한 고대 상나라의 세계관에 고스란히 영향을 받고 있다.

신선사상이나 도교 등에서 상제는 하늘에서 천지만물을 창조하고 그 생사존망을 주재하여 다스리는 ‘원신元神’이다. 원신은 태화太和의 정기精氣(精)로써 인간을 생성하며, 인간은 원신으로부터 태화의 정기와 함께 각자의 神(精神)을 품부 받는다. 이 ‘神’이 바로 인간의 몸 안에서 육체의 물질적인 요소와 유기적으로 작용하며 신체조직과 기관을 구성하고 에너지(기운)를 생성하며 심신의 균형을 유지하는, 그래서 인간이 하나의 온전한 개체로서 행동케 하는 ‘정신精神’이다. ‘정신’은 마음의 한가운데(곧 심중心中)에 있는 것, 곧 ‘마음 중의 마음’이다(『장자』‘인간세’편 제2-5절 ‘양중養中’ 참고).

사람이 죽으면 몸이 혼魂과 백魄으로 분리되어 혼(혼령魂靈, 넋, 귀鬼)은 하늘로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한다.(『예기』 ‘교특생’편, ‘魂氣歸于天 形魄歸于地-혼은 하늘로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