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통석(소요유)

장자 소요유

나무와 까치 2019. 2. 10. 14:46

【장자莊子 내편內篇】

 

[제1편 소요유逍遙遊]

<(속세로부터) 아주 먼 곳을 거닐며 즐기다.>

 

<제1-1절>

北冥有魚 其名爲鯤 鯤之大不知其幾千里也 化而爲鳥 其名爲鵬 鵬之背 不知其幾千里也 怒而飛其翼若垂天之雲 鳥也海運則徙於南冥 南冥天池也 齊諧志怪也 諧之言曰 ‘鵬之徙於南冥也 水擊三千里 扶搖而上九萬里 去以六月息也’

북명(이라는 바다)에 물고기가 있는데 그 이름이 ‘곤’이다. 곤은 커서 그것이 몇 천리나 되는지 알지 못한다. (곤은) 변하여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은 ‘붕’이다. 붕의 등짝은 (커서)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대차게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다. 이 새는 (여름에) 바다(의 기운)가 움직이면 이윽고 남명으로 옮겨간다. 남명이란 천지(하늘 못)이다.

(이야기꾼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는 그 뜻이 괴이한 것이다. (그) 이야기의 하는 말인즉, “붕이 남명으로 옮겨갈 땐 물을 박차며 물결을 일으키길 삼천리, 둥글게 회오리바람을 지으며 오르는 것이 구만리, 그렇게 하여 ‘6월의 숨(곧, 태풍)’을 타고 간다.”는 것이다.

 

[注] 본 절에서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밖에 우리가 다 모르는 광활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전설적인 어떤 이야기를 들어 비유하고 있으며, 그 속에는 장주 자신의 식견과 의식의 경지가 그만큼 혹은 그보다 더 넓고 크고 깊다는 의미도 있다.

北冥: 직역은 ‘북쪽의 어두움’이다. 여기서 ‘冥’은 ‘溟’과 같이 ‘北溟(북녘의 아득하여 끝이 없는 바다)’으로 새긴다.(『莊子疏(成玄英)』 참고)

鯤: ‘곤’은 ‘어자魚子’ 혹은 ‘물고기 뱃속의 알(어란魚卵)’을 뜻하는데 장자는 이것을 가지고 거대한 물고기의 이름으로 하고 있다. 이 같이 소어의 이름으로 대어를 지칭하는 것은 미소한 것으로 지대한 것을 말하는 장자 특유의 표현방식이다.(‘제물론’편 제1-18절 ‘天下莫大於秋之末’ 및 『莊子集釋(郭慶藩)』 참고)

里: ‘里’는 거리단위로서 현재의 ‘리’와는 차이가 있다. 10리가 현재 단위로 약 400미터 정도라고 하는 등 분명치 않다.

鵬: ‘붕鵬’은 ‘봉鳳’의 古字이다. 고대 갑골문에 ‘鳳’은 새의 모양으로서 상제上帝(천제天帝)의 사자신使者神이다. 이후 오늘날까지도 ‘상상의 길조’로 알려지는데, ‘소요유’ 편에서는 ‘멀고 큰 시야’를 의미한다.

南冥者天池也: ‘南冥’은 ‘남녘의 아득하여 끝이 없는 바다’이며, ‘天池’는 ‘하늘의 못’으로서 ‘끝없는 망망대해’로 새긴다(『장자소莊子疏(成玄英)』 참고).

齊諧者: ‘齊諧者’는 사람이름이라고도 하고 혹은 책이름이라고도 하며 예로부터 다양한 견해가 있는데, 여기서는 ‘齊’는 ‘한결같은 생각 혹은 의견’으로, ‘해諧’는 ‘해학적 이야기꾼’을 뜻하는 동시에 그 해학꾼의 ‘이야기’로 풀이하여 ‘(이야기꾼 혹은 책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라는 것’으로 새긴다.

‘齊諧者’를 고대의 설화집인 『제해지齊諧誌』로 해석하여도 의미는 다르지 않다.

摶扶搖: 둥글게 회오리바람을 짓다. ‘단摶’은 ‘환圜’이라고도 하는데(사마표司馬彪), ‘무엇을 둥글게 하다’로 풀이된다. ‘扶搖’는 ‘표飇(회오리바람)’를 두음절로 발음한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摶’은 ‘박搏’의 잘못이며 ‘박拍’의 뜻으로서 ‘날개치다’로 해석하는 설도 있다(『莊子校釋』).

去以六月息者也: ‘六月息’은 바로 뒤에 오는 ‘者’에 유의해 본다면 ‘6월의 숨, 곧 태풍’으로 풀이할 수 있다.(‘제물론’편 제1-2절 ‘夫大塊噫氣 其名爲風’ 참고)

者: ‘者’는 옥편에 ‘어조사 자, 놈 자, 것 자, 이 자’ 등으로 나와 있으며, 주로 ‘~은(는)’, ‘~면’, ‘~것’ 등의 의미로 쓰인다. ‘者’는 만물 중의 하나를 뜻하는 ‘어떤 것’ 정도의 의미이거나 혹은 불가피할 경우에 그런 정도로 사람을 비하하여 지칭하는 의미로 쓰인다. 이러한 ‘者’의 용례는 『노자』에서도 그대로 보이고 있다.

‘者’는 본래 ‘가리어 숨기다.’ 혹은 ‘덮는다.’는 의미의 글자로서 사람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者’는 고대 금문金文에서 ‘왈曰(신에게 축원하는 말인 축고祝告의 문서를 넣어둔 용기)’ 위에 ‘(무엇을 가리어 숨기는) 무성한 수풀’의 모양을 더한 글자이다.

고대에는 이족의 신이나 악귀 등에 대하여 저주詛呪나 주술呪術을 행하는 일들이 상당히 보편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者’는 그렇게 주술을 행한 축문을 나무로 무성하게 울타리를 둘러 숨긴다는 의미의 글자인데, 어떤 대상을 저주한 축고의 문서인 ‘가리어 숨겨둔 어떤 것’이 ‘者’의 본뜻인 것이다.(『한자의 세계(시라카와 시즈카)』 참고)

저주나 주술의 대상은 이족(적)의 장수나 우두머리가 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사람을 지칭하는 의미로도 쓰이게 되나, 그런 경우 ‘사악한 적’ 또는 ‘이족 포로’, ‘노예’ 정도의 뜻이 된다. 그 옛날에 ‘민民(백성)’은 정벌하여 복속시킨 ‘이족의 사람’을 의미했다.]

 

 

<제1-2절>

野馬也塵埃也 生物之以息相吹也 天之蒼蒼 其正色邪 其遠而無所至極邪 其視下也亦若是則已矣 且夫水之積也不厚 則負大舟也無力 覆杯水於坳堂之上 則芥爲之舟 置杯焉則膠 水淺而舟大也 風之積也不厚 則其負大翼也無力 故九萬里則風斯在下矣 而後乃今培風背負青天 而莫之夭閼者 而後乃今將圖南

땅의 열기니 먼지니 그런 것들은 살아가는 (세상의) 만물이 (갈등으로) 숨을 식식대며 서로 (언사를) 불어대는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하늘은 창창히 푸르니 그것이 (하늘 본래의) 올바른 색인가, 멀어서 끝닿는 곳이 없어서인가? 붕이 (그처럼 멀고 높은 하늘에서 큰 시야로 세상을) 내려다본다면 역시 이와 꼭 같을 것이다.

그런데, 물이 고여 깊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힘(부력)이 없다. 잔에 담긴 물을 대청의 오목한 위에 부으면 팃검불은 배가되나 (거기에) 잔을 놓으면 바닥에 붙는다. 물은 얕은데 배가 큰 것이다.

(그처럼) 바람이 쌓여 두텁지 않으면 그것이 큰 날개를 떠받치기에는 힘이 없으니 그래서 구만 리를 올라야 그만한 바람이 아래에 (쌓여) 있는 것이다. 그런 후에 이제 바람을 휘저으며 푸른 하늘을 등에 지고, 가로막혀 방해되는 것 없이 바야흐로 남쪽을 향해 나아간다.

 

[注] 野馬也塵埃也: 여기서 ‘野馬’는 ‘분마奔馬(벌판을 달리는 말)’ 혹은 ‘유기遊氣(돌아다니는 기운,『莊子疏』) 등으로 다양한 해석이 있는데, 여기서는 ‘땅위의 열기’로 새긴다.

生物之以息相吹也: 살아가는 (세상의) 만물이 (갈등으로) 숨을 식식대며 서로 (언사를) 불어댄다. 즉, 사람들은 날마다 점잖은 모습으로 서로 만나면서 거짓을 꾸미고 마음을 다투며 살아간다는 현실을 말한다.(‘제물론’편 제1-4절 ‘其覺也形開 與接爲構 日以心鬭’ 참고)

天之蒼蒼 其正色邪: 하늘이 푸르고 푸르니 그것이 (하늘 본래의) 올바른 색인가? ‘蒼蒼’은 푸르고 푸르러 아득하게 멀고 깊어 보이는 모양이다.

其視下也亦若是則已矣: 붕이 (그처럼 멀고 높은 하늘에서 큰 시야로 세상을) 내려다본다면 역시 이와 꼭 같을 것이다. 즉, 아주 멀고 높은 곳에 올라 (그러한 시야로) 내려다보며 천하만물을 직시함을 말하는데, 이는 본 편 1-5절 ‘若夫乘天地之正’ 및 ‘인간세’ 편 제2-5절 ‘乘物以遊心’ 구절의 乘’과도 통하는 의미이다.

且夫水之積也不厚 則負大舟也無力: 의 ‘其視下也亦若是則已矣’ 구절에 이은 이 부분의 의미는, 아주 높고 먼 곳에서 (내려다보며) 큰 시야로 천하만물을 직시하기 위해서는 결국 이다음에 거론하게 될 ‘맑게 응집된 정신’이 중요성을 미리 암시하는 것이다.

乃今將: 이제 곧장, 바야흐로.]

 

 

<제1-3절>

蜩與學鳩笑之曰 ‘決起而飛 槍榆枋 時則不至而控於地而已矣 奚以之九萬里而南爲’ 適莽蒼三湌而反 腹 適百里宿舂糧 適千里三月聚糧 之二蟲又何知 小知不及大知 小年不及大年 奚以知其然也 朝菌不知晦朔 蟪蛄不知春秋 此小年也 楚之南有冥靈 以五百歲爲春 五百歲爲秋 上古有大椿 以八千歲爲春 八千歲爲秋 而彭祖乃今以久特聞 眾人匹之 不亦悲乎

(그 말을 듣던) 매미와 비둘기가 웃으며 “나는 결단코 몸을 일으켜 날면 느릅나무나 다목나무에 다다르고 때로는 거기에도 이르지 못해 땅에 나동그라진다. (그런데) 어찌해서 구만리나 올라가 남쪽으로 간다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교외의) 푸른 들판으로 놀러 나가면 세 끼 음식으로도 돌아와서 여전히 그대로 (배가) 든든하나 백리 길을 간다면 밤새 양식을 찧고, 천리를 가면 석 달 동안 양식을 모은다는 것을 그 두 미물이 어찌 또 알겠는가? 작은 앎은 큰 앎에 미치지 못하고 작은 연륜의 사람은 큰 연륜의 어른에 미치지 못하니 어찌 그러함을 알겠는가?

조균(아침에 자라나 저녁에 스러지는 버섯)은 그믐과 초하루를 모르고 여치는 봄가을을 모르는데 이는 연륜이 작은 것이다. 초나라 남쪽에 명령이라는 나무가 있어 오백 해는 봄이고 또 오백 해는 가을이다. 아주 오랜 옛날에 대춘이란 나무가 있어서 팔천 해는 봄이고 팔천 해는 가을이었다. 그런데 (8백년을 산) 팽조는 지금 오래 살아 특별한 것으로 소문이 나있다. 뭇 사람들이 (이 둘을 상대로) 견주니 또한 슬픈 일이 아닌가.

 

[注] 蜩與學鳩笑之曰: ‘蜩’는 매미, ‘學鳩’는 비둘기로 새긴다. 여기의 매미와 비둘기 그리고 다음 절의 메추라기는 시야가 좁고 생각이 얕은 소인을 대신한 이름이다.

槍榆枋: ‘槍’은 닿다, 모이다. ‘榆’는 느릅나무. ‘枋’은 콩과의 작은 상록교목인 다목나무를 말한다.

適莽蒼者: ‘莽蒼’은 '(교외의) 푸른 들판'으로 새긴다.(『경전석문經典釋文』 참고)

果然: 배는 여전히 봉긋하다. ‘’의 사전적 의미는 오히려ㆍ다만ㆍ가히ㆍ원숭이ㆍ태연泰然한 모양ㆍ평연平然 등이며, 여기서는 ‘여전히’, ‘다만’, ‘그대로’ 등으로 새긴다.

朝菌不知晦朔: ‘朝菌’은 아침에 자라나 저녁에 스러지는 버섯을 말하며, ‘晦朔’은 ‘그믐과 초하루의 어두움’으로 새긴다.

楚之南有冥靈者: ‘楚’는 회수淮水의 남쪽에서 양자강 중류에 걸쳐있었던 춘추 전국시기의 나라이름. ‘冥靈’이나 ‘大椿’은 임의로 설정한 나무의 이름으로 이해된다.

彭祖: ‘팽조’는 전욱의 현손으로서 팽성에 봉해졌으므로 팽조라 하며, 요임금 때부터 상(은)나라 때까지 7~8백 년 동안 살았다고 하는 전설상의 인물이다.]

 

 

<제1-4절>

湯之問棘也已 ‘窮髮之北 有冥海者 天池也 有魚焉 其廣數千里 未有知其脩 其名爲鯤 有鳥焉 其名爲鵬 背若泰山 翼若垂天之雲 扶搖羊角而上九萬里 絕雲氣 負青天 然後圖南 適南冥也’ 斥鴳笑之曰 ‘彼且奚適也 騰躍而上 不過數仞而下 翱翔蓬蒿之間 亦飛之至也 而彼且奚適也’ 小大之也 故夫知效一官 行比一鄉 德合一君而徵一國自視也亦若

(상나라 창업주인) 탕(왕)이 (신하) 하극에게 물은 것이 바로 이러한 것이다. (즉,) “불모의 지역인 북쪽에 ‘명’이라는 바다가 있는데, 곧 천지이다. (거기에) 고기가 있어 그 넓이가 수 천리이고 길이는 알지 못하는데 이름은 ‘곤’이다. (또 거기에) 새가 있어 그 이름은 ‘붕’이라 한다. 그 등은 태산과 같고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다. (붕은) 양의 뿔처럼 둥글게 회오리바람을 만들며 솟구쳐 오르는 것이 구만리이며, (그리고는) 구름을 뚫고 푸른 하늘을 등에 진 다음 남쪽으로 향해서 남명 바다에 이른다.”

(이에 대해) 메추라기가 웃으며 “그것이 그리고는 또 어디로 간다는 것인가. 나는 힘껏 뛰어 날아 올라가도 불과 몇 길이면 (다시) 내려와 쑥 덤불 사이를 이리저리 날아다니는바, 이것 역시 지극히 높이 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또 어디로 간다는 건가”라고 하는데, 이것이 소인과 대인의 변론辯論이다.

그러므로 그 앎이 하나의 관직에 주효하거나, 품행이 한 고을의 수령에 비견되거나, 덕이 한 나라의 군주에 합당하여 한 나라를 거두어 아우르거나 하는 그런 것들은 자기의 시야(의 정도)라는 것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注] 湯之問棘也: ‘湯’은 상商(은)나라 창업주로서 예로부터 참된 지도자를 지칭하는 대명사로 알려져 왔으며, ‘棘’은 탕왕의 현신賢臣인 ‘하극夏棘’을 말한다. 『列子』 ‘湯問’편에 이와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泰山: ‘太山’이라고도 쓴다. 중국의 신성한 산으로 오악五岳 중 동악東岳이며 예로부터 해마다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 참고로 오악은 동쪽의 태산泰山(산동성), 서쪽의 화산華山(섬서성), 남쪽의 형산衡山(호남성), 북쪽의 항산恒山(하북성), 중부의 숭산嵩山(하남성)을 말한다.

摶扶搖羊角而上者: ‘羊角’은 바람이 양의 뿔처럼 둥글게 말리는 모양을 나타낸다.(『經典釋文』 참고)

脩ㆍ仞: ‘脩’는 ‘길이’로 새긴다. ‘仞’은 길이의 단위로 1인은 1길을 뜻하며 1길은 7~8자 정도라 하나 분명치 않다.

且ㆍ亦: ‘且’는 또ㆍ그리고ㆍ그런 다음ㆍ장차ㆍ아마도ㆍ그런데 등으로, ‘亦’은 또한ㆍ역시 등으로 새긴다.

此小大之辯也: 이것이 소인과 대인의 변론辯論이다. 이는 본편 1-3절 및 1-5절에서 말한 시야의 차이, 곧 소인과 대인의 식견과 의식수준에 따른 변론을 말한다. 여기서 ‘’은 ‘변론’으로 새긴다.

본래 ‘변辯’과 ‘변辨’은 구분 없이 쓰이다가 나중에 각각 ‘변론’ 및 ‘분변’의 뜻으로 사용되었다.(『설문해자』 참고)

故夫知效一官 行比一鄉 德合一君而徵一國者: 여기서 ‘德合一君’은 어떤 한 사람의 덕이 한 나라의 군주의 자질에 합당함을 말한다.

其自視也: 그것은 자기 시야이다. 즉, 소인과 대인의 식견과 안목의 정도차이를 말한다.(앞의 1-3절 내용 참고)]

 

<제1-5절>

而宋榮子猶然笑之 舉世而譽之而不加勸 舉世而非之而不加沮 定乎內外之分 辯乎榮辱之竟斯已矣 其於世 未數數然也 有未樹也 夫列子御風而行 然善也 旬有五日而後反 於致福 未數數然也 此雖免乎行 有所待也 若夫乘天地之正 而六氣之 以遊者 彼且惡乎待哉 故曰 至人無己 神人無功 聖人無名

그런데, 송나라의 (현인인) 영자는 (세상의 그러함을 보고) 다만 그저 웃는다. 또 세상이 들고일어나 (그를) 칭예하더라도 (그로인하여) 부지런히 힘씀을 더하지 않으며, 온 세상이 비난하더라도 그것을 저지하고자 (노력을) 더하지 않는다. (다만 그저) 내외의 분별을 안정되게 하고 영욕의 경계를 변론하는 그것뿐, 세상에 있어서 (부귀영화에 대한) 그의 그러한 태도는 재바르지 않다. 비록 그렇다하나 (거기에는) 여전히 (이룩하여) 세우지 못함이 있다.

(신선이라 알려진) 열자는 바람과 함께하여 다니면 (그 형색이) 차분하고 참되다. (그렇게 유행遊行하면서) 십오일이 지난 후에 돌아오는데도 그는 (부富와 귀貴의) 복에 이르러 있는데 (그럼에도 그에 대한 처신은 역시) 재바르지 않다. 그러나 비록 이러하더라도 (걸어서) 다님은 면하는 것이니 여전히 기대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 천지의 올바름을 (딛고) 올라서서 (천지를 내려다보면서) 자연조화의 조짐을 함께하고 그로써 무궁한 지경을 노닌다면 그는 또 어떠한 기대를 하겠는가? 그러므로 지인은 자기(를 의식함)가 없고 신인은 공(을 이룸)이 없으며 성인은 명예(를 추구함)가 없다고 하였다.

 

[注] 宋榮子猶然笑之: 송나라의 (현인인) 영자는 (세상의 그러한 것들을 보고) 다만 그저 웃는다. ‘宋榮子’는 장자나 맹자보다 약간 앞선 세대의 인물로 宋나라 사람이며, 성이 ‘榮’이고 ‘子’는 경칭으로 알려지는 현인賢人으로 추측된다. 일설에는 ‘천하’편 제7절에 나오는 ‘송견宋鈃’과 같은 사람으로 ‘宋’이 성이고 ‘榮子’가 이름이라 하는데 역시 분명치는 않다.

여기서 ‘猶然’은 ‘다만 그저’로 새긴다.

定乎內外之分 辯乎榮辱之竟斯已矣: (스스로) 내외의 분별을 일정히 하여 영욕의 경계를 변론하는 것뿐이다. 즉, 자기의 내면세계와 외부문제의 분별을 일정히 하여 영욕의 경계란 동전의 앞뒤처럼 하나의 근본이라는 것을 분명히 할 뿐이다.

數數然: ‘삭삭’은 재바르게 움직이는 모양으로, 명리名利를 좇아 영민하게 행동함을 뜻한다.

列子: 열어구列禦寇. 그는 춘추시대 정鄭나라 사람으로 ‘노자의 사상’에 달통하여 신선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노자』가 『장자』에로 이르는 과정에서 장자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인물로 알려진다.

그는 특히 ‘허虛’를 중시하였는데 오늘날 전해지는 『열자』 8편은 위작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통설이며, 그의 사적이나 행적은 분명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자는 노자와 장자의 연결고리로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며 지금도 지대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夫列子御風而行 泠然善也 ~ 猶有所待者也: 이 구절은 바람과 함께 다니는 열자의 신선다운 생활도 지극한 경지에 이르기는 부족한 점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장자는 지금 열자의 신선다운 생활방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장자가 뜻하는 완전한 경지, 곧 바로 이어지는 ‘若夫乘天地之正 而御六氣之辯 以遊窮者 彼且惡乎待哉’ 구절이 뜻하는 경지에는 충분하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辯乎榮辱之竟: 영욕의 경계를 변론하다. 즉, 복은 화가 엎드린 것이며 화는 복이 의탁한 것이라는 화복의 경계를 논변하다.(『노자』 제13장 및 제58장 참고)

泠然善也: 차분하고 참되다. ‘泠然’은 물결의 잔잔 모습으로 ‘차분하다’로 새긴다.

旬有五日而後反: 여기서 ‘旬’은 ‘10일’, ‘有’는 ‘그리고’로 새길 수 있다.

若夫乘天地之正 而御六氣之辯 以遊無窮者 彼且惡乎待哉: 이 부분은 ‘만약 천지의 올바름에 올라서서(즉, 천지의 천연한 본래 모습 위에서) 자연조화의 조짐을 함께하며 그로써 무궁한 지경을 노닌다면 그는 또 어떠한 기대를 하겠는가?’라고 말하면서 ‘소요유’의 의미를 한마디로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乘’은 붕이 아주 높고 먼 곳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듯이 세상을 초연하게 관조함을 나타내는 역동적 표현이다. 乘天地之正’는 직역으로 ‘하늘과 땅의 올바름에 올라섬’이다. 즉, 하늘과 땅의 천연한 그대로의 참된 모습을 (저 높은 곳에서 텅 비운 무無의 마음으로 보듯) 초연하게 직시하며 무한긍정하는 호연지기를 의미한다.(‘소요유’ 편 제1-2절 ‘其視下也亦若是則已矣’ 및 ‘인간세’ 편 제2-5절 ‘乘物以遊心’ 참고)

六氣之辯: ‘六氣’는 천지간의 여섯 가지 기운氣運인 ‘음양풍우회명陰ㆍ陽ㆍ風ㆍ雨ㆍ晦ㆍ明’을 말하는바, ‘六氣之辯’은 ‘육기의 변설辯舌’이며 곧 ‘자연조화의 조짐 혹은 그 현상’을 의미한다.

至人ㆍ神人ㆍ聖人ㆍ眞人: ‘至人’은 ‘(앎 그리고 정신의 맑고 천연함이) 지극한 사람’이다. 지극한 앎이란 ‘모른다’이다. 즉, (도에 대하여) 모르는 그 상태에서 앎을 그치되 모든 것을 무의 경지에 의탁하는 것이 앎의 지극함이다(‘제물론’편 제1-20절 ‘知止其所不知 至矣’ 및 제2-3절 ‘至人神矣’ 참고). 궁극의 지극한 앎은 나 자신조차도 의식함이 없다. 모든 것을 무의 경지에 의탁하여 세상의 밖에서 노닐 뿐 스스로의 존재를 의식함이 없으므로 ‘자기가 없다(無己)’는 것이다.

神人’은 스스로를 삼가 경계함으로써 ‘정신이 청정淸靜한 상태로 응집된 사람’이다. ‘신인’은 천연한 상태의 정신으로 만물과 차등이 없이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손끝에서부터의 완숙된 기술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엄격한 절제와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말미암은 청정한 정신은 당연히 신묘한 능력과 재주가 함께 하나 조금도 세속에 구애됨이 없는바 비록 재주가 있다하여도 그것을 속사俗事에 쓰지 않으므로 세속의 가치로서는 ‘공功(을 이룸)이 없다’는 것이다.(‘제물론’편 제1-15절 ‘物與無成也’ 참고)(본편 3-1절 및 ‘인간세’편 제5-1절 ‘神人’, ‘양생주’편 제2-3절 ‘得養生焉’ 및 ‘덕충부’편 제1-3절 비교참고)

聖人’은 ‘참된 지도자’이다. 고대 금문에 ‘聖’은 神의 소리를 듣는 사람을 뜻하는 글자로서 곧 ‘그 집단의 참된 지도자’ 의미한다. 성인은 모든 백성이 평화로운 질서 속에서 맛있게 먹고 따뜻하게 입으며 이웃과 더불어 즐겁게 살아가도록 무위로 위하며 차별함이 없이 함께 동화할 뿐, 거룩함이나 존귀함 같은 것에는 애당초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성인’의 본래 의미는 ‘백성을 다스리는 지도자 및 그 자질’이나 『장자』에서 ‘성인’은 성인격의 자질과 인성을 갖춘 여러 개인 중의 하나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眞人’은 광대하고 심원한 도와 하나로 통달한 ‘참된 사람’이다. 지인이나 신인의 과정과 조건, 성인의 자질을 두루 갖추어 도와 일통한 사람을 진인이라 한다.(‘대종사’편 제1절 ‘眞人’ 참고)]

 

 

<제2절>

堯讓天下於許由曰 ‘日月出矣 而爝火不息 其於光也 不難乎 時雨降矣 而浸灌 其於澤也 不勞乎 夫子立而天下治 而我猶尸之 吾自視缺然 請致天下’ 許由曰 ‘治天下 天下既已治也 而我猶代子 吾將爲名乎 名實之賓也 將爲賓乎 鷦鷯巢於深林 不過一枝 偃鼠飲河 不過滿腹 歸休乎君 予無所用天下爲 庖人不治庖 尸祝不越樽俎而代之矣’

(임금)가 천하를 허유에게 사양하고자 말했다. “해와 달이 돋았는데도 횃불을 내려놓지 않는다면 그것은 햇빛에 있어서는 역시 (자기를) 힐난함이 아니겠습니까? 때맞게 비가 내리는데도 다만 여전히 물을 댄다면 그것은 못에 있어서는 역시 (쓸데없이) 힘들임이 아니겠습니까? 선생님께서 (임금의 자리에) 서서 천하를 다스린다면 저는 다만 그저 (천수를 다하며) 시동이 될 것입니다. 제가 스스로의 시야(식견)가 모자라니 부디 천하에 이르러 (이를 맡아)주시길 바랍니다.”

허유가 말했다. “그대가 천하를 다스려서 천하는 이미 (제대로) 다스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그대를 대신한다면 나는 장차 이름(명예)을 위하는 것인가요? 이름이란 실질의 손님인데 나는 장차 (스스로) 손님이 되도록 위하는 것인가요? 뱁새가 무성한 수풀에 둥지를 튼들 (그 터전은) 하나의 가지에 불과하고, 두더지가 황하의 물을 마시되 (그 양은) 배를 채울 정도에 불과합니다. (쓸데없는 일에 애쓰지 말고 그만) 임금으로 돌아가 쉬십시오. 내게 천하를 위한다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소이다. 숙수(제사음식을 장만하는 주방장)가 비록 주방을 다스리지 못하더라도 시축이 술잔과 적대를 넘어가 (주방의 그 일을) 대신하지는 않소이다.”

 

[注] 堯: ‘요’는 순舜과 함께 공자가 흠모하였으며 유가에서 이상으로 삼는 고대의 성군이다. 이름은 방훈放勳으로 처음에 도陶에서 살다가 나중에 당唐으로 옮겨 당唐나라를 일으켰는바 도당씨陶唐氏로도 불린다. 역사에서는 당요唐堯라 하여 평양平陽(지금의 산서성山西省 소재)에 도읍하고 어진 정치를 베풀었으며 순임금(유우有虞)에게 왕위를 선양禪讓한 것으로 유명하다.

許由: 고대 전설 속에 나오는 기산의 은자隱者이며 허요許繇라고도 한다(출생 BC 2323년 추정 ~ 사망 BC 2244년).

요 임금이 만년에 왕위를 허유에게 양보하려 하자 그는 한사코 거절한 다음 기산箕山(현재 하남성 등봉현登封縣 서남쪽에 있는 산) 아래로 도망쳐 몸소 밭을 갈면서 생계를 유지했으며, 후에 요 임금이 다시 불러 구주의 우두머리로 임명하려 하자 허유는 어지러운 소리를 너무 많이 들었다며 영수穎水(하남성 동부 및 안휘성 서북부)에 자신의 귀를 씻었다고 한다.(『사기史記』 참고)

我猶尸之: 나는 (천수를 다하도록) 다만 그저 (제사를 대신 받는) 시동尸童(혹은 시축尸祝)이 될 것이다. 여기서 ‘尸’는 시동尸童 혹은 시축尸祝을 말하는데, 시동은 조상이나 신위를 대신하여 제사를 받는 사람으로 보통은 일가친족의 남자나 사내아이가 된다. 또한, 시축은 축원의 대상으로서 조상의 신위를 의미하기도 한다.

‘猶’는 ‘다만 그저’, ‘여전히’, ‘그렇게’ 등으로 새긴다.

吾自視缺然: 나는 스스로 봄이 모자란다. 여기서 ‘視’는 ‘視野’와 같으며 식견이나 안목을 의미한다.(본편 1-4절 참고)

尸祝不越樽俎而代之矣: 시축이 술잔과 적대를 넘어가 (주방의 일을) 대신하지는 않는다. ‘祝’은 본래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무격巫覡(남녀무당)의 행위를 형상화한 글자이다. 여기서 ‘尸祝’은 직역으로 ‘축을 받는 시신’이며, 곧 축원의 대상으로서 조상의 신위를 말한다. ‘樽俎’는 제사에 쓰는 술잔(樽)과 고기를 담는 적대(俎).]

 

 

<제3-1절>

肩吾問於連叔曰 ‘於接輿 大而當 往而不反 驚怖其 河漢而極也 大有逕庭 不近人情焉’ 連叔曰 ‘其謂何哉’ 曰 ‘藐姑射之山 有神人居焉 肌膚若冰雪 淖約若處子 不食五穀 吸風飲露 雲氣 飛龍 而四海之外 其神凝 使物不疵癘而年穀熟 狂而不信也’

견오가 연숙에게 물으며 말한다. “가 접여에게서 들은 말인데 (그 뜻이) 너무나 크고 (그) 바닥이 없어 (한번) 가서는 되돌아오지 않는다네. 는 그 말에 놀랍고 두려운 것이 다만 그저 황하와 한수가 흘러 끝이 없는 듯하며, (통념이나 상식과는) 차이남이 너무나 커서 (일반) 사람의 정서에는 가깝지 않네.”

연숙이 “그 말이 일컫는 것이란 무엇인가?”라고 하자. (견오가) 말하길 “막고야 산에 신인이 살고 있는데 피부는 깨끗한 눈 같(이 희) (진흙으로 빚은 듯) 매끈하 날씬한 것이 마치 처녀와 같다. 모든 곡식(오곡)을 먹지 않으며 바람을 들이쉬고 이슬을 마시며 구름의 기운을 타고 비룡을 함께 대동하여 사해(세상)의 밖에서 노닌다. 그 정신을 (청정淸靜하게) 응집하면 만물이 질병에 걸리지 않게 하고 해마다 곡식이 여물도록 한다는데 나는 이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아서 (도저히) 믿지 못하겠네.” 하였다.

 

[注] 肩吾ㆍ連叔: 이들은 함께 도를 닦는 현인으로 나오는데, ‘견오’는 ‘내로라하고 어깨를 으스댐’, ‘연숙’은 ‘일연의 계보 중 막내’ 정도의 어감으로 모두 가공의 인물로 보인다. ‘肩吾’라는 이름은 뒤의 대종사ㆍ응제왕ㆍ전자방 편에도 언급된다.

接輿: ‘接輿’는 춘추 말기 초楚나라 소왕昭王 때 사람 육통陸通의 자字이다. 성은 ‘육陸’ 이름은 ‘통通’인데, 나라에 정치가 무상하므로 머리를 풀고 미친 사람으로 행세하며 벼슬에 나아가지 않아 초광楚狂 혹은 광접여狂接輿라 불리었다.

공자와 동시대의 인물이며, ‘인간세’편 제7절에도 ‘광접여’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猶河漢而極也: 여기서 ‘猶’는 원숭이의 태연한 모양으로서 ‘마치’, ‘다만 그저’, ‘그대로’, ‘가히’등으로 새긴다. 한편, ‘河漢’은 ‘은하수’라고 해석하는 설도 있으나 자의대로 ‘황하와 한수’로 읽는 것이 오히려 문맥의 흐름에 자연스럽다.

淖約若處子: ‘淖約’은 ‘(진흙으로 빚은 듯 몸매가) 부드럽고 날씬함’으로 새긴다. ‘유약柔弱’ 혹은 ‘연약軟弱’이 통설인데 그 뜻에 서로 큰 차이가 없다. ‘處子’는 ‘처녀’.

其神凝: 그가 정신을 (맑고 고요하게 가다듬어) 응집하다.

五穀: ‘오곡’은 서黍(메기장)ㆍ직稷(찰기장)ㆍ마麻(참깨)ㆍ맥麥(보리)ㆍ두豆(콩)를 말한다.]

 

 

<제3-2절>

連叔曰 ‘然 瞽以與乎文章之觀 聾以與乎鍾鼓之聲 豈唯形骸有聾盲哉 夫知亦有之 猶時也 之人也之德也 將旁礡萬物 以爲一世乎亂 孰弊弊焉以天下爲事 之人也 物之傷 大浸稽天而不溺 大旱金石流 土山焦而不熱 其塵垢粃糠 將陶鑄堯舜也 孰肯以物爲事

연숙이 말하길 “그렇군. 소경은 무늬와 휘장을 보기를 (정상인과) 함께하지 못하고 귀머거리는 각종 악기의 소리를 함께하지 못하는바, (그런데) 어찌 신체에만 귀머거리와 장님이 있겠는가. (이는) 앎에도 역시 있는 것인데, 이러한 그의 말은 그대로 지금의 자네를 두고 하는 것일세.

그러한 사람(신인)은 그 덕이 장차 만물에 두루 미치며 그로써 어지러움을 (구제토록) 기원하여 온 세상을 위하는데 (그러한 신인이라면) 누가 옷이 다 해지도록 천하를 위해 일하겠는가?

그런 사람(신인)은 세상이 상해를 입힘이 없다. 큰 홍수로 물이 하늘에 이를 정도라도 빠지지 않고, 크게 한발이 들어 쇠와 돌이 녹아 흘러 땅과 산이 타더라도 뜨겁지 않다. 이렇게 진구비강(티끌ㆍ때ㆍ쭉정이ㆍ겨)으로도 다만 그저 굽고 불려 요순을 빚어낼 수 있는데 누가 기꺼이 세상을 위한 일에 나서겠는가?

 

[注] 文章之觀: 문장을 보는 것. 즉, 무늬와 휘장(의 아름다움)을 보고 즐김을 말하며, ‘文章’은 ‘무늬와 휘장’으로 새긴다.

鍾鼓之聲: 종고의 소리. 즉, 종과 북의 (아름다운 음악) 소리를 듣고 즐김을 말하며, ‘鍾鼓’는 ‘각종 악기’로 새긴다.

形骸: 사람의 몸체와 뼈, 즉 신체 혹은 육체.

之人也 之德也: 여기서 ‘之’는 ‘기其’와 같이 쓰며, ‘之人’은 ‘그러한 사람’ 곧 ‘신인’을 말한다.

以爲一世蘄乎亂: ‘’는 ‘祈’와 통용되며 ‘기원祈願’으로 새긴다.

弊弊焉: 옷이 해져 남루한 모양.]

 

 

<제3-3절>

宋人章甫而適諸越 越人斷髮文身 所用之 堯治天下之民 平海內之政 往見四子藐姑射之山 汾水之陽 窅然喪其天下焉’

송나라 사람이 장보라는 관을 (장사의) 거래물자로 가지고 제월로 갔으나 월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문신을 하므로 (장보를) 쓸데가 없었다.

(또) 요는 천하의 백성들을 다스려 세상의 정치를 평화롭게 하고서는 막고야산으로 가 네 명의 은자를 만났다. (그 후 막고야산에서 세상 밖 신인들의 세계를 보고 돌아온 뒤로는) 분수의 평양平陽(의 궁궐)에서 멍하니 천하(를 다스리는 일)를 잃어 버렸던 것이다.”

 

[注] 이 절은 예로부터 후대의 편집과정에서 착오로 끼어들었다는 등 견해가 분분하나 이 절에 나오는 두 가지 사례는 대인과 소인의 시야차이를 설명하는 예로서 이해하면 지극히 정상적인 문장이다. 이후 본편에 계속되는 예문들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宋人: ‘송인’은 당시에 ‘융통성이 없고 옹졸한 사람’을 비유하여 대신 이르던 말이다. 송나라는 상(은)나라가 멸망하고 주나라가 들어서면서 상의 왕족인 미자微子를 제후로 책봉한 나라인데, 그런 때문에 송나라에는 상나라의 후예들이 모여 예전의 전통과 풍속을 지키고자 하였으며 예관禮冠으로 장보章甫를 사용하는 것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처럼 고졸한 송인이 자신들에게 소중한 장보를 물자로 하여 풍속이 전혀 다르게 짧은 머리와 문신을 하는 월나라에 거래하러갔다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이 또한 시야의 차이라는 것이다.

宋人資章甫而適諸越: ‘章甫’는 상나라 때 머리에 쓰는 ‘예관禮冠’으로서 공자孔子 이후로는 이를 유관儒冠으로 사용하였으므로 유생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越’은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일대에 있었던 나라로서 당시 월나라는 여러 부족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제월’이라 하는데, 후에 ‘百越’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편, ‘諸越’의 ‘諸’를 ‘於’로 보는 견해도 있다.

四子: 사마표司馬彪는 ‘四子’를 네 명의 은자隱者로서 피의被衣ㆍ왕예王倪ㆍ설결齧缺ㆍ허유許由를 들고 있으나 근거는 분명치는 않다.

汾水之陽: 분수汾水는 지금의 산서성山西省에 있는 강이며, 분수의 북쪽 인근에 요堯의 도읍인 평양平陽(지금의 산서성 임분현臨汾縣)이 있었다고 한다. ‘汾水之陽’은 ‘분수의 양지’, 즉 분수라는 강의 북쪽 언덕으로서 곧 요의 도읍인 평양을 말하는데, 여기서 ‘평양’은 곧 ‘평양의 왕궁’을 의미한다.]

 

<제4-1절>

惠子謂莊子曰 “魏王貽大瓠之種 樹之成而實五石 以盛水漿 其堅不能自舉也 剖之以爲瓢 則瓠落所容 非不大也 爲其用而掊之” 莊子曰 “夫子固拙於用大矣 宋人有善爲不龜手之藥 世世以洴澼絖爲事 客聞之 請買其方百金 聚族而謀曰 ‘世世爲洴澼絖 不過數金 今一朝而鬻技百金 請與之’

혜자가 장자에게 일컬어 하는 말이 “위왕이 에게 큰 박 씨를 주었는데, 가 심어 길렀더니 (곡식이) 다섯 석이나 담길 정도로 (큰 박이) 열었소. (그런데) 물이나 음료를 가득 담으니 (무거워) 요지부동이라 내 스스로 들 수가 없고, 갈라서 바가지로 하자니 박의 춤이 아래로 기울어져 담을 곳이 없소. 텅 빈 겉모양이 크지 않은 건 아니나 나는 그것이 쓸모가 없어 부숴버렸소이다.”라 하였다.

(그러자) 장자는 “선생께서는 큰 것을 쓰는데 있어서 완고하고 옹졸하시오. (가령 말하자면) 송나라 사람이 신묘하게 처방된 손 트지 않는 약을 가지고서 (손에 바르며) 대대로 솜을 빨아 표백하는 일을 가업으로 삼아왔소이다.

(어느 날) 한 길손이 그 소문을 듣고 그 (약 만드는) 처방을 백금에 팔기를 청했어요. (송나라 사람은) 친족들을 모아놓고 모의한 뒤 ‘나는 대대로 솜 빠는 일을 해왔으나 (지금까지 그것을 다 합쳐도) 몇 금에 불과하였는데 지금 하루아침에 그 기술을 백금에 팔게 되었으니 (그) 요청에 응하겠소.’라고 하였소.

 

[注] 惠子: 성은 ‘혜惠’ 이름은 ‘시施’이다. 위魏나라 재상宰相을 지낸 사람으로 명가名家(論理學派)에 속하며, 장자의 논적이자 벗이기도 하다. 『장자』에는 ‘제물론’편 등 여러 곳에서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천하’편에는 그의 학설이 비교적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魏王: 여기의 ‘魏王’은 위나라 혜왕惠王을 말하는데, 그가 도읍을 안읍安邑에서 대량大梁으로 옮겨 국호를 ‘梁’이라 하였으므로 위 혜왕 또는 양 혜왕이라고 한다. 뒤의 ‘양생주’편에 나오는 문혜군文惠君도 위 혜왕과 동일인물로 간주된다.

善爲不龜手之藥者: ‘아주 잘 만들어진 손 트지 않는 약. 여기서 ‘善’은 ‘아주 잘’, ‘善爲’는 ‘신묘하게 처방된’으로 새긴다.

고대 금문金文에서 ‘善’은 양을 제물로 하여 하늘에 맹세하며 참되게 고한다는 의미의 글자로서 ‘(하늘에) 참되게 말하다.’라는 뜻을 가진다(『설문해자 주(단옥재)』 및 『한자의 세계(시라카와 시즈카)』 참고).

이후 ‘善’은 인품과 학식을 갖춘 착한 사람을 나타내는 말로 쓰이면서 ‘유능한’, ‘능통한’, ‘~잘’ 등의 의미로 변하게 되고, 최근에는 ‘어리석은 착함’의 이미지가 더해지면서 ‘무능한’ 뉘앙스를 띠기도 한다.

따라서 본래 ‘善’은 ‘참됨’ 혹은 ‘꾸밈없이 자연스러움’으로 새겨야하며, 현대적 의미로는 ‘천진天眞’에 가까운 말이다. ‘참됨’은 만물 본연의 모습이다. 곧, 지극히 진실하고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서 어린아이의 천진함이며, 맹자의 군자다운 호연지기에 가까운 의미이다.

또한, ‘참됨’은 타고난 본성 그대로의 상태에서 모든 현실을 긍정하며 심지어 부정적인 부분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천연함’과도 뜻이 통한다.

石: 용량의 단위로 1石(석, 섬)은 10斗(두, 말)가 된다.

백금: 1금은 금 1근이라 하나 현재의 단위로는 환산이 분명치 않다.]

 

 

<제4-2절>

客得之 以說吳王 越有難 吳王使之將 冬與越人水戰 大敗越人 裂地而封之 能不龜手一也 或以封 或不免於洴澼絖 則所用之異也 今子有五石之瓠 何不慮以爲大樽而浮乎江湖 而憂其瓠落所容 則夫子有蓬之心也夫”

길손은 (손이 트지 않은 약의 처방을) 손에 넣고서 오왕을 설득하였소. (마침) 월나라에 변란이 있어 오왕은 (그를) 장수로 삼았고, 동절기에 월나라를 상대로 한 수전에서 월나라를 대패시켰소. (그 공으로 오왕은 그에게) 땅을 떼어 나누어주고 그 땅에 (영주로) 봉하였소.

(그처럼) 손이 트지 않게 할 수 있음은 매한가지이나 어떤 이는 (영주로) 봉해졌고, 어떤 이는 (대대로) 솜 빠는 일을 면치 못하였는데, 이는 곧 (시야의 차이로서) 쓰는 바가 다른 것이오.

지금 선생은 다섯 석이나 담기는 큰 박을 가졌으면서 어찌 그것을 큰 술통으로 삼아 강호에 띄울 것을 생각지 않고 박의 춤이 아래로 기울어져 담을 곳이 없다고 걱정하는 것이오? 그러니 선생께서는 여전히 (난잡하게 얽힌) 쑥 덤불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라오.”라고 하였다.

 

[注] 吳ㆍ越: 춘추말기 때의 나라들로서 ‘吳’는 양자강 하류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일대에 있었으며, ‘越’은 그 남쪽에 인접하여 지금의 절강성 일대에 걸쳐 있었던 나라이다. 두 나라는 『손자』 ‘구지九地’편에 ‘오월동주’라는 고사가 나올 정도로 철천지원수였는데, 결국 BC473년에 오나라는 월나라에 의하여 멸망하고 월나라는 BC306년에 초나라에 의해 멸망한다.

 

 

<제5절>

惠子謂莊子曰 ‘有大樹 人謂之樗 其大本擁腫而不中繩墨 其小枝卷曲而不中規矩 立之塗 匠不顧 今子之言 大而用 眾所同去也’ 莊子曰 ‘子獨不見狸狌乎 卑身而伏 以候敖 東西跳梁 不避高下 中於機辟 死於罔罟 今夫斄牛 其大若垂天之雲 能爲大矣 而不能執鼠 今有大樹 患其何不樹之於無何有之鄉之野 彷徨乎爲其側 逍遙乎寢臥其下 不夭斤斧 物 所可用 所困苦哉’

혜자가 장자에게 일컬어 말했다. “내게 큰 나무가 있는데 사람들이 이르길 가죽나무라고 하오. 그 큰 줄기는 울퉁불퉁한 옹종이 있어 승묵(먹줄)을 칠 수도 없고 작은 가지는 돌돌말리고 굽어져 규구(그림쇠와 곱자)를 댈 수 없으니 길가에 서있으되 목장木匠이 돌아보지도 않아요. (그 나무처럼) 지금 선생의 말은 크긴 하나 쓸모가 없으니 뭇사람들이 한 결 같이 돌아서 가버리는 것이오.”

장자가 말하길 “선생은 너구리나 살쾡이를 유독 (집중하여) 보지 못하였구려. 몸을 낮게 엎드려 (쥐나 닭 등) 어슬렁거리는 것들을 노리면서 동서로 날뛰며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다가 덧에 갇히거나 그물에 걸려 죽지요. (그리고) 사실 태우(검은 큰 소)는 크기가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아서 큰일을 할 수 있으나 쥐를 잡을 수는 없소.

지금 선생은 큰 나무를 가지고 그것이 쓸모가 없음을 근심하는데, 어찌 아무것도 없는 가없이 넓은 들판에 그것을 심어 그 곁을 (인위로 위함이 없이) 무위로 오가거나 그 아래에 드러누워 멀리 (세상 밖에) 나가 (자유롭게) 노닐지 못하오? (그런 나무는) 중도에 도끼로 찍혀나가지 않으며 세상이 해롭게 함도 없소. (그러한 나무를) 쓸 수 있는 데가 없음이 어찌 곤고한 것이겠소!”

 

[注] 其小枝卷曲而不中規矩: ‘中規矩’는 ‘(무엇을 측정하고자) ~에 그림쇠와 곱자를 대다’가 되며, 규구준승規矩準繩(그림쇠ㆍ곱자ㆍ수준기ㆍ승묵)은 목수에게 기본이 되는 필수장비이다.

大而無用 眾所同去也: 크긴 하나 (현실적으로) 쓸모가 없으니 뭇사람들이 한 결 같이 (외면하여) 가버리는 것이다.(『노자』 제67장 ‘天下皆謂我道大似不肖’ 참고)

以候敖者: 어슬렁거리는 것들을 살핀다. ‘敖者’는 ‘어슬렁거리는 것’으로서 쥐나 닭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無何有之鄉: 아무 것도 없는 장소 혹은 향토. 같은 말이 ‘응제왕’편 제3절에도 나온다.

이 절에서 ‘혜자’는 현실의 가치이고 ‘장자’는 현실을 초월한 가치이다. 세속의 관념으로 관찰하는 혜자는 광원한 의식으로 무궁한 경지에서 노니는 장자를 이해하지 못한다. 통념적 입장에서는 너무 커서 쓸모없는 것이 사실은 진정 소중한 쓸모임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4-1,2절 및 여기의 5절은 지금까지의 논리전개에 비해 그 내용이 중복되고 진부한 느낌이 있으며 더구나 장주가 자신을 ‘장자’라고 하는 등 상당히 부자연스러운바가 있다. 아마도 이 부분은 후대의 인사가 편집하여 삽입하였음을 공개적으로 밝힌다는 의미는 아닌지 생각해본다.]

 

 

[篇注]

이 세상에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그 바깥에 또 다른 광활한 세계가 있음을 장주는 우화적으로 과장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고 손이 트지 않는 약과 큰 박, 큰 나무를 예로 들면서 대인과 소인의 시야차이와 큰 것을 크게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의 고졸함을 강하게 지적한다.

그러면서 이제부터는 그러한 ‘큰 것’을 진정 크게 쓰는 방법에 대하여 말하고자한다. 즉, 세간에서 인식하기에 너무나 커서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는 ‘쓸모없는 것’을 진정 쓸모 있게 쓰는 방법에 대하여 이제부터 자세하게 접근하고자 예고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