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팔일편 제3
[八佾 제3편]
본편에서는 주로 예악에 대하여 논하고 있으며, 여기서 ‘八佾’은 예와 악을 대표하는 말이다.
<제3-1장>
孔子謂季氏 八佾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공자가 계씨를 일컬어 말했다. 집안의 뜰에서 팔일무를 추는데 이를 참아 넘긴다면 (그 다음부터는) 참지 못할 게 무엇이겠는가?
[注] 季氏: 이 부분은 당시 계씨 집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예악을 두고 말하는 것이며, 여기의 계씨가 누구인지에 대하여는 이견이 많다. 이 상황이 직접 계씨에게 말하는 것이라면 우선은 공자에게 직접 배운바가 있고 공자에게 자문을 많이 하였으며 앞의 위정편에서도 나왔던 계강자季康子(계손사季孫斯의 아들 계손비季孫肥, 출생? -BC 468년)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공자가 제자 등에게 말하는 상황이라면 여기의 계씨는 계평자季平子(계손여의季孫如意, 출생? -BC 505년)나 그 아들 계환자季桓子(계손사季孫斯, 출생? -BC 492년) 혹은 제자 염구나 자로가 그 가신으로 있는 시기의 계강자가 될 것이다.
당시 계손씨季孫氏는 맹손씨孟孫氏(본래 중손씨仲孫氏)ㆍ숙손씨叔孫氏와 더불어 춘추말기 노나라의 정치를 전횡한 세도 삼가三家의 하나이며, 그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컸다. 이들 삼가는 각각 노나라 환공桓公(재위 BC 712년-BC 694년)의 아들인 중경보仲慶父(훗날의 맹손씨孟孫氏)ㆍ숙아叔牙ㆍ계우季友의 후손이므로 삼환三桓이라고도 한다.
한편, 『좌전』과 『한서』에는 여기의 계씨에 대해 노魯나라 소공昭公 때의 대부인 계평자라 하였고, 그 외에 마융은 계환자, 『한시외전韓詩外傳』에는 계강자라고 하였다.
八佾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집안의 뜰에서 팔일무를 추는데도 당장 이를 묵인한다면 나중에는 그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모두 그대로 참아 넘어가며 방조할 수밖에 없다.
八佾舞: ‘佾’은 춤추는 사람이 벌여선 줄이다. ‘八佾’은 가로세로 각 8줄로 64명이 늘어서서 추는 악무로 천자만이 할 수 있으며, 제후는 6일, 대부는 4일, 사士는 2일을 쓴다. 노나라는 주나라 왕실에 공이 큰 주공周公으로 봉한 나라이기 때문에 제후국이지만 예외적으로 주 성왕에 의해 천자의 예가 허용되었는데, 계씨는 대부의 신분임에도 4일을 쓰지 않고 외람되게 천자의 예악을 참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3-2장>
三家者以雍徹 子曰 相維辟公 天子穆穆 奚取於三家之堂
세 집안이 옹으로써 철(상)을 하는바 공자가 말했다. (『시경』에) ‘벼리(종묘제사)를 돕는 벽공이여, 천자(의 풍모)는 온화하도다!’라고 하였는데 어찌 삼가가 이를 취할 수가 있겠는가?
[注] 三家者以雍徹: 여기서 ‘三家’는 노나라 세도대부인 孟孫氏ㆍ叔孫氏ㆍ季孫氏의 세 집을 말하며, ‘雍’은 『시경(주송周頌)』의 편명이다. ‘옹’은 천자가 종묘에 제사를 지낼 때 제사가 끝나고 철상할 때 쓰는 예악인데 대부 삼가가 이를 참용하므로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辟公: ‘벽공’은 구슬(벽璧)로서 상징되는 公, 즉 제후를 일컫는다.]
<제3-3장>
子曰 人而不仁 如禮何 人而不仁 如樂何
공자가 말했다. 사람이 어질지 못하면 (그에게) 예라는 것이 무엇이며, 사람으로서 어질지 못하면 (그에 있어서) 악이라는 게 무엇이겠는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注] 禮: 『논어』에서 ‘禮’는 단순히 윤리나 예절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禮’는 크게는 천지자연의 천연한 질서이며, 작게는 인간이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분수’를 말한다. 그리고 천지자연의 천연한 질서와 인간의 분수를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 예악이다. 결국, 예는 인을 행하는 최선의 수단인 것이다. 따라서 예를 잃는다는 것은 곧 삶의 법도를 거스르는 일이고, ‘길(道)’을 잃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는 정성을 다해 예를 행하되 현실에서의 쓰임에는 그 조화가 필요하다고 하였다.(제1-12장)
≪참고: ‘禮’는 본래 음식을 풍성히 차려놓고 귀鬼와 신神에 제사지내는 의미를 나타낸 글자이다. 귀와 신, 곧 귀신이 천상과 지상의 모든 세계를 지배하던 당시의 현실은 살아있는 사람을 제물로 바쳐 귀신의 환심을 얻으려할 정도로 귀신이 사람보다 더 높고 실질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한 대상에게 경배하며 제사를 올린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지극히 신성한 행위이며 삶을 살아가는 현실의 가치기준이 된다. 그것은 자신과 그 종족이 자연적 재난과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안위와 생존을 지킬 수 있는 궁극적 수단이기도 하다. 그러한 바탕에서 사회적 법도와 윤리의 기본 틀이 규정되는 것이다.≫
<제3-4장>
林放問禮之本 子曰 大哉問 禮與其奢也 寧儉 喪與其易也 寧戚
임방이 예의 근본에 대하여 여쭈었더니 공자가 말했다. 그 질문(의 뜻)이 크도다. 예란 그것으로 사치스럽다면 차라리 (있는 그대로) 검소할 것이며, 상사는 (의례만으로써) 편이하게 한다면 차라리 친척겨레로서 (애통한 그대로) 할 것이로다.
[注] 林放: 임방은 『사서집주(주희)』에 노나라 사람이라고만 알려지며, 혹은 공자의 제자라는 설도 있다. 모두들 예의 실질이나 본질을 외면한 채 형식적인 절차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때에 임방만이 그 근본에 대하여 질문하므로 공자가 이를 반긴 것이다.
禮與其奢也 寧儉: ‘與其A 寧B’는 ‘A하기 보다는 차라리 B하는 것이 낫다’는 정도의 관용어로 이해할 수 있다.]
<제3-5장>
子曰 夷狄之有君 不如諸夏之亡也
공자가 말했다. (오랑캐인) 이적이 임금을 두고 있는바, (이는 중원의) 제하가 (임금이) 없는 것과 같지 않도다. (차라리 임금이 있는 오랑캐가 낫다.)
[注] 夷狄之有君: 당시의 중원을 ‘화하華夏’라 하여 미개한 변방인 이족의 ‘오랑캐’와 구분하였다. ‘夷狄’은 ‘夏’로 지칭되는 중원의 문명과 구분하여 동이東夷, 북적北狄, 서융西戎, 남만南蠻 등 미개한 변방의 이족 오랑캐를 일컫는 말인데, 당시로서는 특히 동북의 오랑캐인 ‘夷狄’이 강하고 위협적이었다.
諸夏: ‘夏’는 중국 최초의 세습왕조인 하나라를 일컫는다. 중원의 문명국인 주나라는 지금 여러 제후들이 천자를 무시하고 각자 나라를 쪼개어 자기의 것으로 하고 있으며, 그 제후들 또한 임금으로서의 실권이 신하들에 의해 농락되고 있는바 (참된) 예가 실종된 중원에는 사실상 임금이 없는 것이나 한가지이다.
그러한 지금의 주나라 상태를 직접 ‘諸國’이라 언급하지 않고 과거형으로 에둘러 ‘諸夏’라 하며 ‘(과거) 하夏왕조의 연맹국가들’ 정도로 표현한 것이다.
亡: ‘亡’는 ‘무’로 읽으며 ‘無’와 같이 ‘없다’로 새길 수 있으나 ‘본래 있던 것이 없어졌다’는 정도의 어감차이가 있다.]
<제3-6장>
季氏旅於泰山 子謂冉有曰 女弗能救與 對曰 不能 子曰 嗚呼 曾謂泰山不如林放乎
계씨가 태산에서 여를 지내자 공자가 염유에게 일러 말했다. 너는 (그를 간하여) 구제하질 못하느냐? (염유가) 대답하길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공자가 말했다. 오호! (내가) 일찍이 태산(의 신령)이 임방만 못하다 일컬었던 것인가?
[注] 季氏旅於泰山: 여기서 계씨는 계강자를 말한다. ‘旅’는 명산대천名山大川에 지내는 여제旅祭로 노나라 땅에 있는 명산인 태산에서 여를 지내는 것은 천자와 노나라 임금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冉有: 염구冉求. 노魯나라 도陶(현재 산동성 하택시菏澤市 정도定陶) 사람으로 성은 염冉 이름은 구求이며 자는 자유子有이다(BC 522년-BC 489년). 공문십철의 한 사람으로 공자보다 29세 아래이며, 염유冉有, 염자冉子 등으로도 불린다.
정치와 군사, 외교 등에 밝아 일찍이 계씨季氏의 가신家臣이 되었는데 계씨가 부유함에도 그를 위해 백성들로부터 재물을 모아 재산을 불려주었다 하여 공자는 제자들에게 그를 성토케 한바있다.(선진편 제11-16장 참고)
주문왕周文王의 열 번째 아들 염계재冉季載의 후예로 맏형이 염경冉耕(백우伯牛)이고 둘째형이 염옹冉雍(이우씨犁牛氏)이며 모두 공문십철에 들어있다.
女弗能救與: 여기서 ‘救’는 구제救濟로 쓰였다. 즉, 그러한 무례하고 못된 행위를 말림으로써 계씨를 참절僭竊의 죄에서 구제할 수 없는가 묻는 것이다.
弗: ‘弗’은 ‘不’과 엄연한 차이가 있는 것이, ‘弗’에는 의지와 노력이 작용하는 한편, ‘不’은 의지나 노력과 관계없이 사물의 상태나 일의 형편을 나타낸다.
『설문해자 주(단옥재)』에서 “‘弗’은 발음에 있어서 어기語氣가 무겁고, ‘不’은 가볍다.”라고 설명하며, 『예기禮記』 ‘학기學記’편에 ‘雖有嘉肴弗食不知其旨也 雖有至道弗學不知其善也(비록 좋은 안주가 있더라도 먹어보기 않으면 그 맛을 알지 못하고, 비록 지극한 도가 있다 해도 그것을 배우지 않으면 그 참됨을 알지 못한다.)’라는 용례를 들고 있다.
曾謂泰山不如林放乎: (내가) 일찍이 태산(의 신령)이 임방만 못하다 일컬었던가? 즉, 태산의 신령이 그처럼 외람된 제사를 받고서 좋아할 만큼 임방보다 예를 모르지는 않는다.]
<제3-7장>
子曰 君子無所爭 必也射乎 揖讓而升 下而飲 其爭也君子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다투는 바가 없다. (다툼을) 반드시 하여야 할 것이라면 (그것은) 사례일 것이리라. 읍양하며 (사대에 서로 양보하여) 올라서고 (경기가 끝나) 내려와서는 (벌주罰酒로) 음을 한다. 그러한 다툼인 것이야 군자(의 행동)이다.
[注] 必也射乎: ‘射’는 활쏘기를 통하여 서로 교유하며 예를 실행하는 의식인 ‘사례射禮’를 말한다. 『의례儀禮』에는 대사大射ㆍ빈사賓射ㆍ연사燕射ㆍ향사鄕射 등이 실려 있다.
揖讓而升 下而飲: 읍양하며 (서로 양보하여) 올라서고 (경기가 끝나면) 내려와서 (함께) 음을 한다. 활을 쏘기 위해 사대에 오를 때는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나아가 서로 먼저 오르도록 읍을 하여 양보하며, 경기가 끝난 뒤에는 이긴 사람은 앞에서 예를 갖추고 진 사람이 벌주를 마신다는 경기내용을 말하고 있다.]
<제3-8장>
子夏問曰 巧笑倩兮 美目盼兮 素以為絢兮 何謂也 子曰 繪事後素 曰 禮後乎 子曰 起予者商也 始可與言詩已矣
자하가 물어 여쭈었다. (『시경』에서) ‘교묘한 웃음 그 귀여움이여! 아름다운 눈 그 또렷함이여! 하얀 바탕에다 문채를 놓았도다!’라고 함은 무엇을 일컫는지요? 공자가 말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바탕(이 갖추어진) 이후(의 일)이다. (자하가 다시) 말했다. (인성보다) 예가 후인지요? 공자가 말했다. 나(의 뜻과 생각)를 일깨우는 것이 상이로구나! 비로소 (상과) 더불어 시를 말할만하도다.
[注] 巧笑倩兮 美目盼兮: 이 구절은 『시경(위풍衛風, 석인碩人편)』의 구절이다. ‘倩’은 보조개가 예쁜 모습이며, ‘盼’은 눈동자와 눈자위가 또렷하여 아름다운 모습이다.
素以為絢兮: ‘絢’은 채색하여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이 구절은 일시逸詩로 현전하는 『시경』에는 없다.
繪事後素: 그림을 그리는 일은 바탕보다 이후이다. 즉, 예란 먼저 그 바탕인 인성(충효성신忠孝誠信)이 참되게 갖추어진 이후의 것이다. 여기서 ‘繪事’는 ‘예’를 비유한 것이며, ‘後素’는 ‘後於素’의 생략이다.
商: 卜商. 商은 자하子夏의 이름이다.]
<제3-9장>
子曰 夏禮吾能言之 杞不足徵也 殷禮吾能言之 宋不足徵也 文獻不足故也 足則吾能徵之矣
공자가 말했다. 하나라의 예는 내가 말할 수 있으되 (하의 예법을 계승한) 기나라(의 예)는 (유실변전 등으로 자료의) 취징聚徵이 족하지 못하다. 은나라의 예는 내가 말할 수 있으되 (은의 예법을 계승한) 송나라(의 예)는 (자료의) 취징이 족하지 못하다. (이는 고찰할) 문헌이 부족한 때문이다. (그 사료가) 충분하다면 내가 (지금이라도 기와 송의 예법을) 취징(하여 확인)할 수가 있을 터인데.. (아쉽도다.)
[注] 夏ㆍ殷: 요堯임금은 신하인 순舜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순舜임금은 신하인 우禹에게 선양禪讓하였다. 우禹임금 역시 요와 순의 선양방식을 좇아 왕위를 동이족 백익伯益에게 물려주었으나 후에 우의 아들 계啓가 이를 탈취하였다.
이로부터 왕위계승에 선양의 전통이 사라지고 혈연에 의한 세습으로 이어지게 되었던바, 우는 하夏왕조의 시조가 되었다. 하나라는 기원전 2070년 우가 개국한 이래 농업과 목축을 주로 하면서 마지막 17대 걸桀왕에 이르기까지 471여 년간 존속하였다.(『고본죽서기년古本竹書紀年』)
殷: 은殷나라는 탕湯 임금이 하夏나라를 멸하고 세운 왕조로 본래의 국명은 상商이다. 기원전 1600년경 하夏나라의 마지막 왕 걸桀이 포악무도하여 민심이 이반하므로 하의 신하였던 탕湯이 현신 이윤伊尹의 도움을 받아 걸을 정벌하고 하왕조를 멸하여 상商을 창업하였다.
탕湯은 이름이 리履이며, 천을天乙, 태을(大乙 혹은 太乙), 성탕(成湯 혹은 成唐)이라고도 한다. 상나라의 시조는 설契(또는 설卨)이라 하며 건乾이라 쓰기도 한다. 황제黃帝의 증손 제곡帝嚳의 두 번째 부인인 간적簡狄이 현조玄鳥(제비)의 알을 삼키고 낳은 아들이라 하여 현왕玄王이라고도 한다.
설은 우禹의 치수를 도운 공이 있으므로 제순帝舜이 사도司徒라는 벼슬과 함께 상商에 봉하고 자子라는 성姓을 주어 백성을 다스리게 하였다. 그로써 백성은 평화를 되찾았고, 성탕成湯(태을太乙) 시대에 이르러 상은 하夏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했다.
‘은’은 본래 상나라의 마지막 수도인 은허殷墟를 말하는데 상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가 상을 은이라 낮추어 부른데서 유래한 국명이다. 상商은 기원전 1600년경부터 기원전 1046년경에 이르도록 존속하였다가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공격에 상商의 주紂왕이 스스로 분신함으로써 상나라는 멸망하였다.
杞ㆍ宋: ‘기’는 주周나라 무武왕이 하나라 우왕禹王의 후예인 동루공東樓公으로 하여금 하의 제사를 잇도록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기현杞縣일대에 봉한 나라이다. 약소국으로 존속하다 춘추 말기에 멸망하였다.
‘송’은 주 무왕이 은을 멸한 후 탕왕湯王의 후예인 미자微子로 하여금 은의 제사를 잇도록 지금의 하남성 상구현商丘縣 일대에 봉한 나라이다. 미자는 은의 마지막 왕인 주紂왕의 서형이며 공자가 칭송한 충신이었다.
文獻: 사실적史實的 기록.]
<제3-10장>
子曰 禘自既灌而往者 吾不欲觀之矣
공자가 말했다. 체에 처음 관주를 한 이후의 것에 대하여 나는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도다.
[注] 禘: ‘禘’는 본래 상商(은殷의 본명)나라 때 제왕이 왕실의 시조 및 그 선조의 혼령을 모시고 지내는 제사인데 주나라로 바뀐 이후에도 종묘에서 왕이 왕실의 시조와 선조를 모시고 올렸던 큰 제사이다.(『한자의 세계(시라카와 시즈카)』 참고)
그처럼 ‘禘’는 오직 천자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제후국인 노魯나라로서는 체제禘祭를 행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주 성왕成王이 숙부인 주공周公 단旦의 공을 치하하여 단의 아들 백금伯禽을 노나라에 봉하고 특별히 체를 허락하여 주공과 문왕을 기리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공자가 활동하던 때에 이르러서는 그 본뜻과 정성이 많이 변질되어 있었던 것이다.
灌: 관주灌酒. ‘灌’은 제사를 시작함에 있어 검은 기장으로 만든 울창주鬱鬯酒를 땅에 뿌려 귀신이 강림토록 하는 절차를 말하는데, 혹은 시동尸童에게 술을 따라 울창주酒의 냄새를 맡도록 하는 의식이라고도 한다.]
<제3-11장>
或問禘之說 子曰 不知也 知其說者之於天下也 其如示諸斯乎 指其掌
어떤 이가 체에 대한 설명을 물어 여쭈니 공자가 말했다. 알지 못한다. 천하에 나아가 체제에 대한 말을 안다는 것은 (바르지 못한 모든 예禮를) 여기에 드러내 보이는 것과 같다. (그러면서) 자기의 손바닥을 가리켰다.
[注] 指其掌: 천하에 예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손바닥을 보듯 쉽고 명백한 일이 아닌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지금 꼭 말로 드러내 보여야한다는 말인가.]
<제3-12장>
祭如在 祭神如神在 子曰 吾不與祭 如不祭
(죽은 조상인 귀鬼의) 제사에 임해서는 (조상이 그 자리에) 계신 듯이 하고, (그 외의) 神에게 제사지낼 때도 신이 (그 자리에) 있는 듯이 하였다. (그리고는) 공자가 말했다. 내가 제사에 함께 하지 않으며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과 같다.
[注] 祭神如神在: 고대 상商나라(은殷나라의 본명)의 갑골문, 금문 등에서 ‘鬼’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뜻하는데, 이는 원래 상왕조의 선왕이나 왕조가 성립되기 전의 선대 조상을 의미하였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왕해王亥, 왕긍王亘, 상갑미上甲微 등을 ‘제帝’라 하였으며 특히 시조인 설契(또는 설卨, 현왕玄王)은 ‘상제上帝’라 하였다.
상商의 갑골문에 나오는 ‘神’의 초기문자는 번개를 형상화한 ‘신申’인데, 풍백風伯, 우사雨師 등 上帝의 사자신使者神과 하河, 악岳 등의 자연신이 그에 해당한다. ‘상제’는 이러한 신을 포함하여 백신百神을 거느렸다고 하는바 우주의 모든 신神 중에서 최고 으뜸신이다(갑골문ㆍ금문 및 『한자의 세계(시라카와 시즈카)』 참고).
이상에서 보듯이 ‘鬼神’은 상왕조의 조상과 선왕을 뜻하는 ‘鬼’와 풍백, 우사, 하, 악 등의 百神을 뜻하는 ‘神’을 포괄하는 의미이다. ‘鬼神’이라 하여 전통적으로 ‘鬼’자가 ‘神’자보다 앞에 위치하여 사용되는 연유도 이러한 어원에서 확인할 수 있다.(‘태백泰伯’편 제8-21장 ‘(禹)而致孝乎鬼神’ 및 ‘선진先進’편 제11-11장 ‘季路問事鬼神’의 ‘鬼神’ 용례 참고)
결국 ‘鬼’와 ‘神’이 합쳐진 ‘귀신’은 상제와 상제가 부리는 우주의 백신을 포괄하는 말로서 한편으로는 상제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다. 상나라가 멸망하고 주周왕조가 들어서면서 ‘上帝’는 ‘天帝’ 또는 ‘天神’의 개념으로 바뀐다. 말하자면 당시의 ‘귀신’과 ‘상제’, ‘천제’, ‘천신’ 등은 동의어였던 것이다.
이후 ‘鬼神’의 본래 의미는 주로 ‘상제’, ‘천제’, ‘천신’으로 남게 되고 ‘귀신’은 사악한 이족異族의 神이나 제 잡신을 망라하는 개념으로 그 의미가 확장된다. 흔히들 말하는 물귀신이나 몽달귀신 달걀귀신 도깨비 같은 것들은 그러한 귀신 본래의 개념에서 토속화하고 미신화한 것들이다.]
<제3-13장>
王孫賈問曰 與其媚於奧 寧媚於竈 何謂也 子曰 不然獲罪於天 無所禱也
왕손가가 물었다. 오에 교태를 보여 함께하는 것보다 차라리 (실속 있는) 조에 잘 보이는 것이 낫다는 것은 무엇을 일컫는지요? 공자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만신을 거느리는) 하늘에 죄를 지으면 (더 이상) 기도하여 빌 데가 없습니다.
[注] 王孫賈: 성이 왕손王孫 이름은 가賈이며, 위衛나라의 대부로 영공靈公의 총신이자 군사적 실력자이다.
奧: ‘奧’는 실내의 서남쪽 구석으로 방의 아랫목이고 집안에서 어른이 거처하는 곳이며 예로부터 ‘奧’에 제사를 지내어 집안의 평안을 기원하였다. 여기서는 오신奧神을 말하며 위나라 영공을 비유하였다.
竈: ‘竈’는 부엌 혹은 부뚜막이며 직접 음식을 만드는 곳으로 ‘竈’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집안에 먹을 것이 풍족하도록 빌었다. 여기서는 조왕신竈王神을 가리키며 실권자인 왕손가 자신을 비유하였다.
與其媚於奧 寧媚於竈: 오가 비록 존귀하나 오는 제사의 주인이 아니며, 조는 비록 비천하되 때에 맞도록 직접 일을 맡아보는 곳임을 말한다. 그로써 공손가는 공자에게 위로 임금에게 잘 보이는 것보다 지체는 낮으나 권신인 자기에게 잘 보여 가까이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이롭지 않겠는가 하며 에둘러 그 마음을 떠보는 것이다.
혹은 공손가가 자신의 상황을 공자에 상의한 것으로 보아 오를 위 영공으로, 조는 권력을 가진 영공의 총희寵姬 남자男子와 영공이 총애하는 미소년 미자하彌子瑕를 비유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참고: 『예기禮記(월령편)』에 오사五祀라 하여 호戶(맹춘), 조竈(맹하), 중유中霤(중앙), 문門(맹추), 행行(맹동)의 제사가 나온다. 그 중 ‘竈’는 매년 맹하(음력 4월)에 부뚜막에 먼저 신주를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며, 그 제사가 끝나면 찬수饌需를 ‘奧’에 다시 진설하고 신주를 옮기어 제사를 지낸다.≫]
<제3-14장>
子曰 周監於二代 郁郁乎文哉 吾從周
공자가 말했다. 주나라(의 예)는 (하나라와 상나라) 2대를 (본보기로 면밀히) 비추어본 것이니 그 문화가 융성하고 빛나도다. 나는 주나라(의 예)를 좇을 것이다.
[注] 周: 상商나라 다음의 왕조이며, 시조는 후직后稷이다. 후직의 14세손인 희발姫發(주 무왕武王)이 선조의 업적을 토대로 상商 왕조를 멸하고 주周 왕조를 창업한 뒤 호경鎬京에 도읍을 정하였다.(서주, BC 1046년-BC 771년)
이후 제13대 평왕平王 때에는 서쪽의 이민족 견융犬戎의 침입으로 수도를 호경에서 동쪽 낙읍洛邑으로 옮기게 된다. 이때부터 동주라고 하는데 왕의 권위와 집권력이 급격히 쇠약해지면서 소위 춘주전국시대가 시작된다.(동주, BC 771년-BC 256년)
주周를 이전의 하夏ㆍ상商(은殷의 본명)과 더불어 하ㆍ은ㆍ주 삼대三代라고 하며, 요堯ㆍ순舜 시대를 이은 이상적 치세治世로 일컫는다. 주나라는 왕실의 일족과 공신들을 지방의 제후로 봉하여 다스렸던 봉건체제의 나라인데 이것이 봉건제도의 기원으로 되었다.
郁郁乎文哉: 여기서 ‘文’은 제도 문물 등을 포괄하는 의미의 ‘문화’로 새긴다.]
<제3-15장>
子入大廟每事問 或曰 孰謂鄹人之子知禮乎 入大廟每事問 子聞之曰 是禮也
공자가 태묘에 들어서는 매사를 물어서 하였다. (이를 보고) 어떤 이가 말하길 “누가 추인의 아들을 일컬어 예를 안다 하였던가? (그가) 태묘에 들어서는 매사를 묻고 있도다.” 공자가 (그 말을 전해) 듣고는 말했다. (그리하는) 그것이 (바로) 예이다.
[注] 大廟: 나라를 창업한 태조의 사당을 일컫는데, 여기서는 노나라의 시조인 주공周公 단旦을 모신 사당을 말한다. ‘태묘’로 읽는다.
鄹人之子: ‘추’는 노나라의 읍 이름이다.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이 과거 추읍의 대부로 지냈으며 공자가 태어난 곳이므로 공자를 추인의 아들이라 하였다.
是禮也: 이것이 (바로) 예이로다. 이 부분은 아마도 공자가 벼슬을 처음 시작할 무렵의 이야기로 보이며, 공자가 (태묘에서 지내는 제사에 대한) 예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나 기존의 관례를 존중하고 공경하며 삼가 정성을 다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제3-16장>
子曰 射不主皮 為力不同科 古之道也
공자가 말했다. 활쏘기가 가죽(의 과녁)을 주로 하지 않음은 (사람마다) 힘을 씀에 그 분과가 같지 않음이니 (이는) 옛날의 (참된) 도이었다.
[注] 射不主皮: 이 구절은 『의례儀禮』 ‘향사례鄕射禮’편의 일부분이다.
射: 사례射禮. ‘射’는 선비가 익혀야 할 여섯 가지 덕목으로 육예六藝의 하나인 활쏘기이다.
皮: ‘皮’는 가죽으로 한가운데를 붙여 만든 과녁이다. 『사서집주』에서 주희는 옛날 무왕武王이 상商을 무찌른 다음 군대를 해산하고 교사례郊射禮를 행하니 정신을 모아 과녁에 명중하는 것을 주로 하는바 이로써 과녁을 뚫는 활쏘기가 종식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주나라가 쇠하여 열국이 서로 다투면서 다시 과녁을 뚫는 경기가 성행하였던 것이니 이는 도가 아닌 것이다. 우리말 ‘과녁’은 이러한 ‘관혁貫革’에서 유래한 것으로 풀이된다.]
<제3-17장>
子貢欲去告朔之餼羊 子曰 賜也 爾愛其羊 我愛其禮
자공이 곡삭에 (바쳐질) 희생으로서의 양을 없애고자 하였더니 공자가 말했다. 사야 너는 양을 아끼지만 나는 예를 아끼느니라.
[注] 告朔: 매해 섣달에 천자가 제후들에게 내년의 책력을 반포하면 제후들은 이를 조묘祖廟에 보관하고 매월 초하루에 양을 잡아 희생으로 올리며 달의 시작을 조묘에 고하는 것을 ‘告朔(‘곡삭’으로 읽는다)’이라한다. 노나라는 문공文公(재위 BC 626년-609년) 때부터 임금이 친히 곡삭을 하지 않고 유사有司가 양을 바치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자공은 이처럼 실질도 없이 형식에 좇아 물자를 낭비하는 것이 아깝다고 하였으나 공자는 그것마저도 없애면 곡삭이라는 예가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 우려하는 것이다.
餼羊: (곡삭에) 희생으로 바쳐지는 양.]
<제3-18장>
子曰 事君盡禮 人以為諂也
공자가 말했다. 임금을 받듦에 예를 극진히 다 함에 사람들은 (그것을) 아첨이라 여긴다.
<제3-19장>
定公問 君使臣 臣事君 如之何 孔子對曰 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
정공이 물었다. 임금이 신하를 부리고 신하는 임금을 받드는데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공자가 (정성으로) 대답하여 말했다. 임금은 신하를 예로써 부리고 신하는 임금을 충으로 받듭니다.
[注] 定公: 노나라 제27대 임금으로 성은 희姬 이름은 송宋이며, 공자와 가까웠다.(재위 BC 510년-495년)]
<제3-20장>
子曰 關雎 樂而不淫 哀而不傷
공자가 말했다. 관저는 즐거우나 음란하지 않고 애절하되 (마음을) 상하지 않는다.
[注] 關雎: 『시경(국풍國風)』 주남周南의 첫 편으로 남녀가 참된 애정으로 만나 가정을 이루고 조상을 받든다는 내용의 노래이다.]
<제3-21장>
哀公問社於宰我 宰我對曰 夏后氏以松 殷人以柏 周人以栗 曰使民戰栗 子聞之曰 成事不說 遂事不諫 既往不咎
애공이 재아에게 사에 대하여 물었더니 재아가 (이에 대하여) 대답했다. 하후씨는 소나무로써 하였고, 은나라 사람은 측백나무로써 하였으며, 주나라 사람은 밤나무로써 (신목을) 하였는데 (이는) 말하자면 백성으로 하여금 전율戰慄토록 한 것입니다.
공자가 이를 (전해)듣고 말했다. 일을 이루면 (그 일에 대해 더 이상) 해설하지 않고, 수행중인 일은 (나와 생각이 다르더라도 더 이상) 간하지 않으며, 이미 지나간 것은 허물하지 않느니라.
[注] 哀公: 노魯나라 제28대 임금으로 성은 희姬 이름은 장蔣이며, 정공定公의 아들로 공자의 만년에 재위한 임금이다.(재위 BC 495년-468년)
社: ‘社’는 토지 신을 모신 사당社堂 혹은 사당의 신목神木을 일컫는데, 여기서는 사당의 신목으로써 신주神主를 만든 일에 대하여 말한다.
宰我: 宰予. 노나라사람으로 공문십철의 한 사람이며, 성은 ‘재宰’ 이름은 ‘여予’이고, 자는 자아子我로서 재아宰我라고 부른다. 공자보다 29세가 적으며 정치에 밝았다고 하나 가계와 사적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공야장편(제5-10장)에서는 공자는 재여가 말에는 능하나 행동이 뒤따르지 못한다고 하였다. 『사기』에는 공자가 열국을 주유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동행하였고 공자는 그를 외교 사절로 여러 번 제나라와 초나라에 파견했다고 한다.
夏后氏以松: 여기서 ‘夏后氏’는 하나라 왕조를 지칭한다. 하나라는 수도가 안읍安邑으로 그 토질에는 소나무(松)가 적합하였으므로 사당의 신목으로 소나무를 심었다.
殷人以柏: 은나라는 수도가 박亳이므로 신목으로서 발음이 같은 측백나무(柏)를 심었다.
周人以栗 曰使民戰栗: 주나라가 밤나무로써 신목을 한 것은 말하자면 백성으로 하여금 전율戰慄토록 한 것이다. 이는 재아가 애공에게 설명한 말인데 나중에 공자가 그것을 전해 듣고 ‘成事不說 遂事不諫 既往不咎’이라 하며 재아의 설명은 자의적인 것으로 사실이 아니나 더 이상 탓하지는 않겠다면서 이후부터는 삼가도록 지적한 것이다.]
<제3-22장>
子曰 管仲之器小哉 或曰 管仲儉乎 曰 管氏有三歸 官事不攝 焉得儉 然則管仲知禮乎 曰 邦君樹塞門 管氏亦樹塞門 邦君為兩君之好 有反坫 管氏亦有反坫 管氏而知禮 孰不知禮
공자가 말했다. 관중의 그릇은 작은지라! (이에 대하여) 어떤 이가 말했다. (그 말은) 관중이 검소하다는 것입니까? (공자가) 말했다. 관씨는 삼귀를 두었고 관청의 일을 (본인이 직접) 관리하지 않았으니 어찌 검소하겠는가? (어떤 이가 다시, 검소하지 않은 그것이 예를 갖추기 위한 때문이라 여기어) 그러면 관중이 예를 알았던 것입니까? 라고 물으니 (공자가) 말했다. 제후가 새문을 세우는데 관씨 역시 새문을 세우고, 제후가 서로 간에 교호를 위해 반점을 두는데 관씨 역시 반점을 두었으니 관씨가 예를 안다면 누가 예를 모르겠는가?
[注] 管仲: 춘추시대 초기 제나라의 대부로 이름은 이오夷吾이다. 재상으로 있으면서 제 환공桓公을 도와 내치를 안정시키고 밖으로는 국력을 떨쳐 패업을 이룩하였으므로 공자는 일찍이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한바 있다. 그럼에도 관중의 그릇이 작다는 것은 관중이 그만한 재주를 가지고 도와 덕으로 임금을 받들었다면 이미 천하가 태평하게 되었을 것이되 그리하지를 못했다는 점을 든 것이다.
管氏有三歸 官事不攝 焉得儉: ‘三歸’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데 주자는 누대樓臺의 이름이라 하였다. 그 외에 가정이 세 곳이라는 설, 채읍采邑의 이름이라는 설, 전폐錢幣의 창고라는 설 등이 있다.
‘攝’은 업무를 관리하여 다스림을 말하는데 관중은 직접 그리하지 않고 관직을 갖지 못하는 가신들로 하여금 관직에 참여토록 함으로써 국고를 낭비토록 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어찌 검약하다는 것인가라고 공자는 말한다.
邦君樹塞門: 나라의 임금이 새문을 세우다. ‘邦君’은 나라의 군주, 즉 제후를 말한다. ‘塞門’은 집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대문 앞에 세워 안과 밖을 구분하는 문이며, ‘새문’으로 읽는다.
邦君為兩君之好 有反坫: ‘反坫’은 제후간의 친선 회동에서 서로 술을 권하여 마신 뒤 빈 술잔을 엎어놓기 위해 흙으로 만든 잔대盞臺를 말하는데, 주인은 동점東坫에 잔을 놓고 객은 서점西坫에 놓았다. 이는 결국 제후의 예인바 관중은 그처럼 스스로 분수를 넘어 예를 참월僭越하였음을 말한다.]
<제3-23장>
子語魯大師樂 曰 樂其可知也 始作翕如也 從之純如也 皦如也 繹如也 以成
공자가 노나라 태사에게 음악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음악은 (그 자체로) 그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 시작할 때는 (음이) 화합하고, 따라 이어짐은 (그 조화가) 순수하고, (그 참된 주제는) 밝고 또렷하며, (마침에 있어 서로를 용납하여) 풀어내니 이로써 (하나의 음악이) 이루어지는 것이라.
[注] 子語魯大師樂: 여기서 ‘大’는 ‘태’라고 읽으며 ‘師’는 악사를 말한다. 당시의 악사는 대부분 장님이었으며, 태사는 악관의 우두머리를 일컫는다. 참고로 공자의 외할아버지는 장님으로서 궁중의 악사였는데 그 영향으로 공자는 당대의 악성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언言ㆍ어語: 『설문해자』에는 “직언直言을 ‘言’이라 하고, 논란論難을 ‘語’라 한다.”라고 하였다. 갑골문ㆍ금문에서 ‘言’은 하늘(天神)에 축고祝告함으로써 자신의 진실을 서약하여 상대방에게 대항한다는 의미의 글자이고, ‘語’는 논설로써 자기의 진실을 지킨다는 의미를 가진다.(『설문해자』 및 『한자의 세계(시라카와 시즈카)』 참고)
현실적으로 ‘言’은 ‘(자기의 의중意中을 참되게) 말하다.’ 정도의 어감이고, ‘語’는 ‘(상대가 자기의 소견을 알아듣도록 이야기하여) 말하다’는 의미로서 ‘이야기하다’ 혹은 ‘말씀’ 정도로 쓰인다. 그런 의미에서 ‘論語’는 ‘논설論說말씀 또는 강론말씀’ 정도로 새길 수 있다.
한편, 주희는 ‘答述曰語 自言曰言(대답하여 서술하는 것을 ‘語’라 하며 자기 스스로 말하는 것을 ‘言’이라 한다.)’이라 하였다.(『사서집주 논어(향당편 제10-8장)』). 또, 『시경(대아ㆍ생민지십)』 ‘공유’편 전傳에는 ‘直言曰言 論難曰語’라고 하였다.]
<제3-24장>
儀封人請見 曰 君子之至於斯也 吾未嘗不得見也 從者見之 出曰 二三子 何患於喪乎 天下之無道也久矣 天將以夫子為木鐸
의儀의 봉인이 (공자를) 뵙고자 청하며 말했다. 군자가 여기에 이르러서 내가 만나보지 못한 적이 없습니다. (그로써) 종자가 (공자를) 뵙도록 하였다. (공자를 만나고 그가) 나가면서 말했다. 여러 제자들은 어찌 (공자가 직위나 직책을) 잃을 것에 걱정하는지요? 천하에 도가 없게 된지 (이미) 오래된지라 하늘이 장차 선생님을 목탁으로 삼을 것이외다.
[注] 儀封人請見: ‘儀’는 위衛나라 변방 읍의 지명이며, 지금의 개봉開封이라는 설이 있으나 정확하지 않다. ‘封人’은 변방의 경계를 맡은 관리인데, 여기서는 아마도 낮은 관직에 종사하며 유유자적하는 은자隱者로 해석된다.
君子: ‘군자’는 본래 옛날의 참된 임금 혹은 지도자, 곧 성인을 말한다. 여기서는 지극히 참된 사람, 즉 성인의 자질을 가진 사람 정도로 쓰였다.
天將以夫子為木鐸: ‘목탁’은 나무에 구멍을 파서 나무채로 두드리도록 만든 방울로 목탁과 금탁金鐸이 있다. 나라에서 새로운 법령을 시행하거나 중대한 일을 알릴 때에 목탁을 울려 사람을 모이게 하였던바, 이로써 목탁에는 사회를 경계하고 교화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불교에서는 독경이나 염불을 욀 때 사용하며 목어木漁라고도 한다.
이 구절에 대하여 대개는 하늘이 공자로 하여금 합당한 직위를 얻어 목탁으로서 뜻을 펴도록 할 것이라고 해석하는데, 혹자는 목탁이 도로를 순행하며 뭇사람을 경계하듯이 어차피 공자는 앞으로 천지사방을 유랑하며 교화를 펼칠 것이라는 의미로 풀이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논어』의 전반全般에 걸쳐 나오는 은자들의 일관된 언행과 취지, 이 구절의 전후문맥 등으로 미루어 후자의 풀이가 더 적절한 것으로 이해한다.]
<제3-25장>
子謂韶 盡美矣 又盡善也 謂武 盡美矣 未盡善也
공자가 소를 일컬어 아름다움이 극진하고 또 (그 의미의) 참됨이 극진하다 하였다. 무를 일컬어서는 아름다움이 극진하되 참됨이 미진하다 하였다.
[注] 韶ㆍ武: ‘소’는 순舜임금 때의 태평성세를 구가한 음악이고, ‘무’는 주나라 무武왕 때 상나라를 무찌르고 주나라를 세운 공적을 찬양한 음악이다. 순 임금의 천하는 태평성세에 그 왕위가 선양으로 이어진 공公 천하로서 그 참됨이 지극하였으나, 주나라 무왕 때의 천하는 상나라를 무찌르고 이룩한 천하로 왕위가 세습되는 가家 천하인바 그 참됨이 지극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제3-26장>
子曰 居上不寬 為禮不敬 臨喪不哀 吾何以觀之哉
공자가 말했다. (주상主上으로서) 위에 있으면서 관대하지 않고, 예를 행하되 경건하지 않으며, 상례에 임하여 애통해하지 않는다면 내가 (더 이상) 무엇 때문에 그를 살펴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