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도덕경 제14장
제14장. 도기道紀
시지불견명왈이 청지불문명왈희 박지부득명왈미 차삼자불가치힐 고혼이위
視之不見名曰夷 聽之不聞名曰希 搏之不得名曰微 此三者不可致詰 故混而爲
일
一
보고 있으되 보지 못하는 그것을 이름 하여 이(평탄함)라 이른다. 듣고 있으되 듣지 못하는 그것을 일러 희(희미함)라 한다. 쥐고 있으되 갖지 못하는 그것을 일러 미(미세함)라 한다. 이 셋은 어떻게 (말로서) 따져 물을 수 있는 그런 게 아닌 것이, 한데 섞여 하나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 視之不見名曰夷: 누구나 보고 있으되 (道로 인식하여) 보지 못하는 그것을 ‘夷’, 즉 ‘평탄平坦함’이라 한다.
(道는) 너무나 평탄하고 심원深遠하여 사람들은 누구나 (그것을) 보고 있으되 도로서 의식하지 못한다. 이는 도가 너무도 평하고 흔하며 우리의 일상에서 가깝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는 청정한 정신으로 물아일체의 입장에서만 관찰할 수가 있으며, 오히려 일반의 통념이나 문리文理적 사변, 형이상학적 추론 등 상대적 분별의 관점에서는 절대로 인식할 수가 없는 것이다.(제35장 視之不足見 참조)
마음의 빔을 지극하게 하고 성정을 고요히 함으로써 노자는 스스로 참된 본성을 닦아 사물의 근본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였고, 그 물아일체의 바탕에서 한 치도 어김이 없는 무한한 섭리로 도도히 운행하는 우주대자연의 어떤 실체를 통찰하였던바, 이것이 곧 ‘도道(의 존재)’인 것이다.(제16장 靜ㆍ命ㆍ常ㆍ明 및 제25장 道法自然ㆍ獨立不改 참고)
노자는 사물의 천연한 그대로를 (맑고 순수한 정신을 바탕으로) 물아일체의 관점에서 사실적으로 관찰하고, 관찰한 그대로를 가감 없이 펼쳐 보이는 자연과학적 입장에서 도와 덕을 기술한다.
- 聽之不聞名曰希: 듣되 듣지 못하는 그것을 희(희미함)라 한다. 道의 천연한 소리는 누구나 다 듣고 있으되 (사람들은) 그것을 도의 소리로 인식하지 못한다. 이를 ‘희미함(희)’이라 하며, 굳이 표현하여 ‘자연 그대로의 소리’로 새길 수가 있다.(希: 제23장)(제35장 聽之不足聞, 제41장 大音希聲 참조)
- 搏之不得名曰微: 쥐고 있으되 갖지 못하는 그것을 미(미세함)라 이른다. 도는 우리의 모든 일상에서 누구나 잡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으로서 해와 달의 운행부터 극히 미미한 자연현상까지 도의 작용이 아닌 것이 없으나 그것을 가져서 소유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 此三者不可致詰: 이 셋은 말로 묻고 설명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의 ‘此三者’는 ‘이夷ㆍ희希ㆍ미微’를 말하는데, 이 셋은 눈으로 보고 있어도 보지 못하고, 듣고 있어도 듣지 못하며, 누구나 잡고서 살아가되 가져 소유할 수도 없는, 그러면서 한데 섞여 하나로 되어있는 심원한 어떤 것이다.
그것은 일반의 통념이나 문리적 사변, 형이상학적 추론 같은 상대적 분별의 관점을 벗어나 물아일체의 상자연常自然한 시각에서만 통찰할 수 있는 것이다.
- 故混而爲一: 한데 섞여 하나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一(일)’은 결국 도의 근본으로서 ‘無’이며, 궁극적으로는 ‘도’와 다르지 않다.
- 名: 옥편의 자의는 ‘이름ㆍ명분ㆍ이르다.’ 등이며, 이는 ‘사물의 정상을 (상대적 통념으로) 분별하여 이르다.’로 새길 수 있다.(名: 제1,14,21,25,32, 34,37,41,44,47장)
기상불교 기하불매 승승불가명 복귀어무물 시위무상지상 무물지상 시위홀
其上不皦 其下不昧 繩繩不可名 復歸於無物 是謂無狀之狀 無物之象 是謂惚
황
恍
그것은 위가 밝지 않고 아래가 어둡지 않으며, 끊임없이 연이어져 이름을 이를 수 없다. (그것은) ‘무물(물질이 없음)’로 다시 돌아간다. 이를 상狀(정상情狀) 없는 상狀이며 물物(물질物質) 없는 상象(형상形象)이라 하고 이를 홀황하다 한다.
- 其上不皦 其下不昧: 위가 밝지 않고 아래가 어둡지 않다. 즉, 섞여져 하나로 된 그것은 무한정 크고 심원하여 그 실체를 알 수가 없는바 밝고 어두운 형체로 드러나는 어떤 것이 아니다.
- 繩繩不可名: 끊임없이 이어져 (어떻게 구별하여) 이를 수가 없다. 즉, 그것은 (하나로 섞여 있으며) 끊임없이 이어지는바 (그것을) 어떻게 이름으로 구분 짓거나 말로 이를 수가 없다. 이는 일반의 통념이나 문리적 사변, 형이상학적 추론 같은 상대적 분별의 관점을 벗어나 물아일체의 상자연常自然한 입장에서만 통찰할 수 있는 상태이다.
- 復歸於無物: 다시 무물로 돌아간다. 여기서 ‘無物’은 ‘물질이 없음’, 즉 ‘물질의 실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이다. ‘復歸於無物’은 실물체가 육안의 지각에서 사라져 없어지며 ‘無’로 된다는 것으로, 결국 ‘無物’은 ‘(아무 것도 없는) 無’이다. 이러한 ‘無(없음)’가 바로 ‘道의 근본바탕(道紀)’이며, 곧 ‘도의 실체’인 것이다.
도의 근본인 ‘無’의 실체는 시각이나 청각, 촉각 등으로 인식할 수는 없으나 실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반의 지각으로는 확인할 수 없으므로 이를 ‘無(없음)’라고 한 것이다.
도의 근본바탕인 ‘無’는 오늘날의 개념으로는 ‘우주대자연 그 자체’ 정도로 이해할 수가 있다. 물론 오늘날의 해와 달, 별, 은하, 천체의 구조 등과 같은 구체적인 우주의 개념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것이나 어쨌든 2500년 전에 이러한 존재를 통찰했다는 것은 실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참고: ‘無(도의 근본바탕)’에서 ‘有(天ㆍ地)’가 생겨나오고, 만물은 ‘有(天ㆍ地)’에서 생겨난다. ‘有(天ㆍ地)’에서 상象ㆍ물物ㆍ정精이 생겨나 그 셋은 만물을 구성하는 것이다. 여기서 ‘有’는 곧 天ㆍ地를 뜻하며, ‘천ㆍ지’는 도를 그대로 좇아 만물을 낳아 먹여 기르는 ‘德’을 의미한다.
도는 덕으로 하여금 만물을 이루게 하고, 덕은 도를 그대로 좇아 생명의 생성에 직접 관여한다. 도에서 비롯한 덕이 만물을 생기게 하며, 도를 그대로 따르는 덕만이 만물을 낳아 먹이고 기르고 오로지 도를 온전히 이행할 수 있다(上德). 만물이 나서 늙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모두 德의 운행에 의한다.
도에서 나와 ‘有(천지만물)’가 되면 이는 이미 도가 아니므로 도에서 나온 만물은 즉시 덕의 범주에 귀속된다. ‘도를 잃은 후에는 덕’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과정들을 말하는 것이다.
(제1장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제4장 象帝之先, 제10장 生之畜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제21장 孔德之容 唯道是從, 제38장 失道而後德, 제40장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제41장 道隱無名 夫唯道 善貸且成, 제42장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제51장 道生之 德畜之 物形之 勢成之ㆍ是謂玄德 참고)
ㆍ 함께 섞인 채 하나로 이루어진 어떤 것이 천지보다 먼저 있었는데, 고요하고 그윽하게 독립적으로 있으며 다시 고침이 없고, 두루 행하나 위태롭지 않으니 이는 천지의 어미이고 천하 만물초목이 존재하는 근본이 되는 ‘道’이다.(제25장 有物混成 先天地生 寂兮寥兮 獨立不改 周行而不殆 可以爲天下母)
도는 크고 광원하여 멀리 (운행하여) 가고 가면 되돌아오며 늘 한결같은 작용으로 스스로 그러하게 있는 ‘常自然한 존재’이다.(제25장 吾不知其名 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 大曰逝 逝曰遠 遠曰反 故道大.. 및 道法自然)
ㆍ 도는 (세상의) 깊숙이에 있으면서 (늘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으나 (사람들은 그것이) 가득차지 않은 것으로 의심한다(제4장 道沖而用之或不盈). 도의 작용은 미약한 듯하다.(제40장 弱者道之用) 도는 (분별하는) 이름이 없이 숨어 있다(제41장 道隱無名).
ㆍ 크게 가득 찬 도는 (너무도) 깊이 있는듯하나 그 작용은 (언제까지고) 다함이 없다(제45장 大盈若沖 其用不窮). 도의 작용은 심오하고 느긋하여 천하를 운용함에 있어서 바쁘지 않고 차근차근 순리에 따라 때가 되어야 이룬다(제41장 大器晩成). 도는 만사를 느긋하게 진행하여 길게 늘어진 듯하나 한 치도 어김없이 참되게 도모한다. 하늘의 그물은 넓고 성글지만 아무리 은밀한 일도 놓치지 않는다(제73장 繟然而善謀 天網恢恢 疎而不失).
도는 이 세상 어떤 일이든 하지 못함이 없고 또 (도가) 하지 않음이 없다(제37장 道常無爲而無不爲). (상대적 관념으로 분별하는) 이름(명)이 없는 박(樸, 소박한 근본바탕)이야말로 도에 이르는 유일한 방편이다(제1,37장 ‘名’ 및 제16장 참고).
도는 만물이 태어난 속이며, 의지하여 돌아가는 근본이다(제62장 道者萬物之奧). 덕의 운행에 따르던 만물은 죽으면 다시 도로 돌아간다(제34장 萬物歸焉而不爲主, 제40장 反者道之動, 제50장 出生入死).≫
- 是謂無狀之狀 無物之象: 이를 정상情狀이 없이 있는 情狀(사물의 실질상태)이요, 물질物質이 없이 있는 형상形象이라 한다. 이 부분은 천지만물이 道의 근본바탕인 ‘無’ 속에 존재하는 실상에 관한 설명이다.(狀: 제14,21장)(象: 제4,14,21,35,41장)(形: 제41,51장)
- 是謂惚恍: 이를 ‘있는 듯 없는 듯 홀연하고 경이롭다’고 한다.
영지불견기수 수지불견기후 집고지도 이어금지유 능지고시 시위도기
迎之不見其首 隨之不見其後 執古之道 以御今之有 能知古始 是謂道紀
(그 실체는 엄청나게 커서 형체를 알 수가 없으므로) 앞에서 맞아 그 머리를 보지 못하고, 좇아도 그 후미를 보지 못한다. 옛날의 도를 (온전히) 지키어 그로써 지금의 '유有'를 함께한다면 옛날의 시작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함을 일컬어 도의 근본이라 한다.
- 執古之道 以御今之有 能知古始: 옛날의 도를 (그대로 온전히) 지키어 그로써 지금 ‘有’로 (드러나) 존재하는 천지만물 및 제 현상들을 함께하여 대한다면 옛날의 시작을 알 수 있다. 여기서 ‘有’는 天, 地, 만물 그리고 제 현상들을 의미한다.
‘執’의 사전적 의미는 ‘잡다’이다. 갑골문ㆍ금문에 ‘執’은 사람에게 수갑을 채운 모양으로 ‘구속’의 뜻이 있는데, 그로부터 ‘(어떤 상태 그대로) 지키다’는 의미가 된다. ‘御’는 여기서 ‘함께하다’ 혹은 ‘제어하다’로 새긴다.(執: 제14,29,35,64,69,74장)
- 是謂道紀: 이러함을 일컬어 도의 근본이라 한다. 여기서 ‘이러함(是)’은 앞의 ‘視之不見名曰夷 聽之不聞名曰希 搏之不得名曰微 此三者不可致詰 故混而爲一 其上不皦 其下不昧 繩繩不可名 復歸於無物’을 말한다. 최종적으로는 ‘復歸於無物’을 가리키며, 이는 곧 ‘無의 실질’을 설명하는 것이다.
[章注] 제14장은 도의 근본바탕(도기) 및 도의 실체를 규명한다. 도는 ‘무’로써 근본이 이루어져있으며, 상자연한 상태로 끊임없이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유기체이다.
[道紀(도의 근본바탕)]
보고 있으되 보지 못하고 듣고 있으되 들을 수 없으며 쥐고 있으되 가질 수 없는 어떤 것이 (함께) 섞이어 하나로 되어있는데, 하늘과 땅이 있기 이전이다.
그것은 한없이 크고 심원하여 밝고 어두운 형체로 드러나는 어떤 것이 아니며, 끊임없이 이어져 (어떻게 구별하여) 이름을 이를 수가 없다. 결국, (그것은) 다시 ‘無物(물질이 없음)’로 돌아간다. 이를 정상情狀 없는 정상이며 물질이 없는 형상形象이라 하는데, 있는 듯 없는 듯 홀연하고 경이롭다.
앞에서 맞아 그 머리를 보지 못하고, 좇아도 그 후미를 보지 못하는바 그 실체를 온전히 인식할 수는 없으나 실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반의 지각으로는 확인할 수 없으므로 이를 ‘無(없음)’라고 한다.
결국, ‘한데 섞이어 하나로 이루어진 그것’이 ‘無’이며, 그 ‘無’의 존재가 바로 ‘도의 근본바탕(도기道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