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도덕경 제16장
제16장. 불태不殆
치허극수정독 만물병작 오이관복 부물운운 각복귀기근
致虛極守靜篤 萬物竝作 吾以觀復 夫物芸芸 各復歸其根
(머리의) 텅 빔을 극에 이르게 하고 (마음의) 고요함을 독실하게 지키어 만물이 다함께 일어났다가는 그로써 (본래대로) 되돌림을 나는 본다. 뭇 만물이 무성하다가 각자 그 근본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 致虛極守靜篤: (머리의) 텅 빔을 극에 이르게 하고 (마음의) 고요함을 두터이 지키다. 머리를 완전히 비우고 마음을 고요히 하여 오직 몸 안의 생명활동에만 의식을 집중하는 것이다. 그로써 본래의 청정淸淨한 정신으로 돌아갈 수가 있으며, 그렇게 맑고 고요한 정신을 바탕으로 갓난아이 같은 천연한 그대로의 순수한 생명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復命).
즉, 제12장에서의 온갖 아름답고 화려한 미색과 감미로운 음악, 갖가지 산해진미, 사냥, 진귀한 보화 그리고 제13장의 총애와 치욕 등 사람의 마음을 얽어매어 판단을 흐리고 떳떳한 행동을 방해하며 스스로를 병들게 하는 그런 것들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다 내려놓고 고요히 심신 본래의 천연함에 집중하는 것이다.
‘致虛極’의 ‘虛’는 ‘텅 빔’이며, ‘(머릿속의 온갖 욕망이나 잡상雜象을) 비우다’이다. 『노자』에서 ‘無’는 실물의 유무로서 ‘없다’이며, ‘텅 빔’을 뜻하는 ‘虛’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음에 유의한다.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으나, 이 부분을 불교식으로 표현한다면 ‘마음을 비우고 선정에 들다’ 정도로 말할 수 있다.
- 萬物竝作 吾以觀復: (머리를 완전히 비우고 마음을 고요히 하여) 온갖 만물이 다함께 일어났다가(萬物竝作)는 그전의 본래 상태로 다시 되돌림을 나는 본다(吾以觀復).
- 夫物芸芸 各復歸其根: 세상의 만물이 다함께 일어나서 무성하게 있다가는 다시 각자 그 (본래 상태인) 근본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復歸: 제14,28,52장)
귀근왈정 시위복명 복명왈상 지상왈명 부지상 망작흉
歸根曰靜 是謂復命 復命曰常 知常曰明 不知常 妄作凶
(그렇게) 근본으로 돌아감을 고요함(靜)이라 하고, 이것을 일컬어 생명(命)을 되돌린다고 한다. 命을 되돌림을 한결같음(常)이라 한다. 常을 아는 것을 밝음(明)이라 한다. 상을 알지 못하면 망령되어 흉함을 짓게 된다.
- 歸根曰靜 是謂復命 復命曰常 知常曰明: (머리의 텅 빔을 지극히 하고 마음의 고요함을 두터이 하여) 근본으로 돌아감을 ‘靜’이라 하며, 이를 일컬어 ‘命(생명)을 되돌린다’고 한다. 命을 되돌림을 ‘常’이라 하며, 常을 아는 것을 ‘明(밝음)’이라 한다.
여기서 ‘命(생명)을 되돌린다’는 것은 몸의 피로물질이나 독소의 정화ㆍ배출작용을 타고난 본래의 상태에서처럼 온전히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내장 각 기관의 자정기능이 극대화되고, 기운의 흐름은 천연한 그대로 자연스러워지며, 몸 안의 모든 세포가 활짝 열려 활성화되면서 심신이 순수한 생명 그 자체의 조화로운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是謂復命)
이 ‘命’은 곧 천지자연의 천연한 생명력이며, 정精의 조화가 지극한 갓난아이 같은 천연한 그대로의 순수한 생명生命(곧, 생명의 본질)을 뜻한다(제55장 ‘赤子’ 참고). 이처럼 심신의 기능과 생명활동이 최적화된다면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생업에 집중하며 단지 평범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 자체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한 삶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고대 갑골문에서 ‘명命’은 ‘령令’과 유사한 모양이며, ‘무릎을 꿇고 하늘에 축원하여 그 뜻을 내려받는 상태’를 형상한 것이다. 이는 상제上帝로부터 내려진 신탁으로서 ‘명령’이며, 또한 하나의 생명生命을 받는 ‘수명受命’이기도 하다.
- 復命曰常 知常曰明: ‘常’은 자의가 ‘늘 한결같음’ 또는 ‘늘 한 결 같이 일정함’이다. ‘常’은 전혀 미동도 없이 가만있는 것이 아니라 늘 한결같은 형태로 어김없이 순환하며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다.
갓난아이 같은 천연한 그대로의 심신 상태로 온전히 ‘命(생명)’을 되돌림으로써(復命) 청정淸靜한 정신으로 사물의 천연한 그대로를 직시할 수가 있다. 그 상태에서만이 물아일체의 입장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물아일체의 청정한 정신으로 만물이 하나의 근본바탕에서 어우러져 늘 한결같이 함께 하고 있음을 통찰할 수가 있는데, 나고 지고 한없이 반복되며 한결같은 일상으로 이이어지는 그것을 ‘상常’이라 한다(復命曰常). 이 ‘常’은 천연한 그대로 물아일체의 상태이며, ‘늘 한결같이(常) 스스로 그러함(自然)’, 즉 ‘상자연常自然’이라 한다. 그러한 ‘상’을 아는 것을 ‘지상知常’이라 한다.
자기가 스스로 상자연함으로써 역시 그렇게 천연한 기운으로 피아의 구분 없이 어우러져 끊임없이 이어지는 ‘천지만물의 常自然’을 보게 된다. (제55장 知和曰常 참고)
≪참고: ‘常’의 본래 글자는 ‘항恒’이다. ‘긍亘’은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늘 한결같음을 뜻하며(항구恒久). ‘恒’은 그러한 마음이다. 이것이 한나라 5대 태종의 이름이 ‘유항柳恒’이라는 이유로 ‘常’으로 바꾸어 쓰이게 된 것이다.≫
- 知常曰明: (그러한) ‘常’을 (온전히) 아는 것을 ‘지상知常’이라 하며, ‘知常’을 ‘明(도의 밝음)’이라 한다. ‘知常曰明’은 곧 ‘知常容(常을 이는 것이 포용)이다.
지상용 용내공 공내왕 왕내천 천내도 도내구 몰신불태
知常容 容乃公 公乃王 王乃天 天乃道 道乃久 沒身不殆
한결같음(常)을 아는 것이 용납(포용)이다. 용은 곧 공평무사함(公)이다. 공은 곧 천하를 다스림(王)이다. 왕은 곧 하늘(天)이다. 하늘은 곧 道이다. 도는 길고 오래간다. (그러므로 상을 알면) 몸이 다하도록 (천하의 질서가) 위태롭지 않다.
- 知常容 容乃公 公乃王: 피아가 구분 없이 하나로 어우러져 끊임없이 이어지는 ‘한결같은 그러함(常, 常自然)’을 안다면 이는 明(도의 밝은 이치)를 아는 것이다. 그로써 세상의 모든 것을 긍정하게 되고, 모든 것을 긍정하면 용납하게 된다(容). 모든 것을 용납한다는 것은 곧 공평무사함(公)이며, 공평무사함은 왕의 본분(王)이다.
- 王乃天 天乃道: 왕은 곧 (도를 그대로 좇아 만물을 먹여 기르는 덕으로서) 하늘(곧, 천지)이며, 하늘(천지, 덕)은 (도의 상자연한 섭리를 그대로 좇아 따르므로) 곧 道이다.(제25장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참고)
[章注] 제16장은, 상자연한 상태로 끊임없이 무한하게 이어지는 ‘도의 실질’에 이르는 과정을 ‘靜ㆍ命ㆍ常ㆍ明’이라는 일련의 단계로 설명한다.
[靜ㆍ命ㆍ常ㆍ明]
노자는 사물의 천연한 그대로를 (맑고 순수한 정신을 바탕으로) 물아일체의 관점에서 사실적으로 관찰하고 기술하는 자연과학적 방식으로 도와 덕을 파악하였다.
머리의 텅 빔을 지극하게 하고 마음을 고요히 함으로써 노자는 스스로 참된 본성을 닦아 사물의 근본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였고, 그 물아일체의 바탕에서 한 치도 어김이 없는 무한한 섭리로 도도히 운행하는 우주대자연의 어떤 실체를 통찰하였던바, 이것이 곧 ‘도道(의 존재)’이다.
예로부터 노자 주석가 중 어느 누구도 이 부분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뜻을 읽어낸 사람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없었다. 그 원인은 역시 (순수하고 천연한 도의 밝음이 아닌) 문리文理적 사변과 형이상학적 추론에 의한 상대적 분별이나 ‘장자莊子화’한 『노자』로 접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자로부터 약 1100년이 지난 수ㆍ당 시기에 성립한 불교 선종에서 이 부분 정ㆍ명ㆍ상ㆍ명의 과정과 매우 유사한 수련방식이 다시 보인다.
①. 靜: 정靜이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두고, 마음을 맑고 고요하게 하여 본래의 천연한 심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제12장에서의 사치와 향락, 기이한 취미, 진귀한 보화 그리고 제13장의 부귀권세의 야망 등) 사람의 마음을 얽어매어 판단을 흐리고 떳떳한 행동을 방해하며 스스로를 병들게 하는 그런 것들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다 내려놓고 고요히 내 몸 본래의 천연함에 집중하는 단계이다.
- (검소하고 겸손한 일상으로)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한 점 나태함도 없이 자신을 철저히 경계함으로써 청정淸靜한 본래의 정신 상태로 되돌아간다.(歸根曰靜: 근본으로 돌아감을 靜이라 한다.)
②. 命: 여기서 ‘命’은 천지간에 존재하는 천연한 생명력이며, 정精의 조화가 지극한 갓난아이 같은 천연한 그대로의 생명이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내장 각 기관의 자정기능이 극대화되고, 기운의 흐름은 천연한 그대로 자연스러워지며, 몸 안의 모든 세포가 활짝 열려 활성화되면서 심신이 순수한 생명 그 자체의 조화로운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是謂復命)
- (靜의 상태에서) 고요히 자연스럽게 몸 안 깊숙이 숨을 쉬면 (의식에는) 생명 그 하나만 남는다. 몸은 지극히 평온해지며 몸의 밑바닥에서 한없이 솟아나는 샘물처럼 뿌듯한 생명의 기운을 끊임없이 느끼게 된다. 입안에는 단 침이 고이고 신체 각 기관의 자정기능이 극대화되며 갓난아이 같이 정精의 조화가 지극히 조화로운 몸이 되는 것이다. 그처럼 지순한 자연그대로의 생명을 ‘명命’이라 한다.
≪참고 1: 고대 갑골문에서 ‘명命’은 ‘령令’과 유사한 모양이며, ‘무릎을 꿇고 하늘에 축원하여 그 뜻을 내려받는 상태’를 형상한 것이다. 이는 상제上帝로부터 내려진 신탁으로서 ‘명령’이며, 또한 하나의 생명生命을 받는 ‘수명受命’이기도 하다.
참고 2: (갓난아이는) 뼈가 약하고 힘줄은 연하나 (손을) 굳게 쥔다. 암수의 교합을 알지 못하나 온전히 (성기의 모양을) 짓는데, (이는) 정精(생명의 기운)이 (참되어) 지극한 것이다.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데, (이는 기운의) 조화가 지극한 것이다. (갓난아이 같은 천연한) 조화를 아는 것을 상(늘 한결같음)이라 하고, 상을 아는 것을 명(도의 밝음)이라 한다.(제55장 骨弱筋柔而握固 未知牝牡之合而全作 精之至也 終日號而不嗄 和之至也 知和曰常 知常曰明)
참고 3: 여기 ‘靜ㆍ命’의 뜻은 불교의 선종이나 인도의 명상 수련 등에서 쓰는 ‘깨어있다’는 표현과도 통한다. 즉, ‘깨어있다’는 의미는 여기서처럼 ‘심신이 온전히 정ㆍ명의 상태로 있다’는 말로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③. 常: ‘常’은 ‘늘 한 결 같이 일정함’이다. 전혀 미동도 없이 가만있는 것이 아니라 늘 한결같은 형태로 어김없이 순환하며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다.
갓난아이 같은 천연한 심신의 상태로 온전히 命(생명)을 회복하여 한결같은 일상이 늘 이어지는 것을 ‘상常’이라 한다(曰常). 이 ‘常’은 ‘늘 한결같이(常) 스스로 그러함(自然)’ 즉 상자연常自然이며, 천연한 그대로 물아일체의 상태이다.(復命曰常)
- (자연그대로의 순수한 생명으로 일상을 살아감에) 온 몸을 활짝 열어젖히고 마음껏 기꺼이 숨을 쉰다. 스스로에 비정하리만큼 자신을 철저히 경계하며 정신을 바짝 차리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 몸으로 대자연의 기운(정기)을 호흡한다. 개운한 몸 깊은 곳에서 건강한 삶의 즐거움이 한없이 솟아난다.
그러한 삶이 계속되면서 어느 날, 길가의 풀 한포기ㆍ나무ㆍ벌레ㆍ시냇물ㆍ아침햇살 등 만물이 모두 각자 자기 자리에서 자기 모습으로 또한 나와 다름없이 그렇게 진정한 삶을 이어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건강한 심신의 무한한 뿌듯함’ 그것이야말로 삶의 진수이고 삶의 실질이다. 그렇게 살고 죽고 다시 후세가 이어지고, 해는 아침에 다시 뜨고 계절은 어김없이 돌아오며 모든 것은 늘 그렇게 이어진다.(常: 영원한 속성)
≪참고: 너와 내가 구분 없이 모두 함께 어우러져 같은 근본바탕에서 同和하여 있는 것을 ‘상자연常自然’이라 한다. 천지만물은 각자 자기 위치에서 천연한 그대로 모두가 함께 하나로 존재하는 것이다.(제51장 常自然 참고)
‘상자연常自然’은, 욕심과 집착은 물론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그 사실조차도 인식함이 없는, 나아가 나 자신의 존재조차도 생각함이 없는 천연한 그대로의 의식 상태이다. 곧 내가 만물과 차등 없이 하나로 되는 물아일체의 입장이다. 자기 스스로 상자연함으로써 그 천연함으로 피아의 구분 없이 어우러져 끊임없이 이어지는 ‘천지만물의 常自然’ 또한 보게 되는 것이다.≫
④. 명明: (그러한) ‘常’을 (온전히) 아는 것을 ‘지상知常’이라 하며, ‘知常’을 ‘明’이라 한다. 천연한 기운으로 피아의 구분 없이 어우러져 끊임없이 이어지는 ‘천지만물의 常自然’을 안다면, 그것이 곧 도의 밝음(明)이다(知常曰明). 결국 도의 심원하며 한 치도 어김없이 무한히 이어지는 상자연한 섭리를 아는 것을 ‘明(도의 밝음)’이라 한다.
- 도의 밝음(明)을 앎으로써 세상의 모든 것을 긍정하게 되고, 모든 것을 긍정하게 되면 다 용납하게 된다. 모든 것을 용납함은 천하를 다스리는 왕의 무위한 행위이며, 곧 왕의 본분이다. 왕이 상자연한 밝음(즉, 도의 이치)을 알고 매사 자연다운 본성을 지키어 무위無爲로 근본을 위하므로 몸이 다하도록 (천하의 질서가) 위태롭지 않다.(제16장 知常容 容乃公 公乃王 王乃天 天乃道 道乃久 沒身不殆 참고)]
원문 吾以觀復을 왕필은 以虛靜觀其反復 凡有起於虛 動起於靜 故萬物雖幷動作 卒復歸於虛靜 是物之極篤也<(마음을) 텅 비우고 고요함으로써 만물이 되돌아감을 보는데, 대체로 有(있음)는 빔에서 일어나고 움직임은 고요함에서 일어난다. 고로 만물이 비록 함께 움직여 일어나나 죽어서는 허정으로 되돌아간다. 이것이 만물의 지극한 실질이다.>라고 주석하였는데, 虛에서 有가 일어나며 죽어서 虛靜으로 돌아간다고 하며, ‘虛’를 『노자』의 ‘無’와 같은 개념으로 풀이한다.
원문 歸根曰靜에서 ‘하상공’은 靜謂根也 根安靜柔弱 謙卑處下 故不復死<고요함은 근본을 일컫는다. 근본은 안정유약하고 겸허하며 낮게 아래에 머무른다. 고로 다시 죽지 않는다.>라고 장생술에 대하여 언급하며,
원문 是謂復命은 「하상공장구」에 ‘靜曰復命’으로 되어 言能安靜者是謂復還性命使不死也<능히 안정되고 고요할 수 있다는 것은 다시 性命으로 되돌아가 (스스로) 죽지 않게 한다는 것을 말한다.>라 주석하고,
원문 復命曰常에서 ‘하상공’은 復命使不死 乃道之所常行也<性命에 되돌려 죽지 않게 하는 것은 도가 늘 행하는 바이다.>라고 주석하며 선도의 개념인 ‘죽지 않게 하는 도의 전지전능함’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노자는 “만물은 유한하므로 수련을 통하여 의도적으로 생명을 늘이는 것은 도가 아니며, 도가 아니면 일찍 그만둔다.”고 했다.(제30장 物壯則老 是謂不道 不道早已 및 제55장 益生曰祥 心使氣曰强 物壯則老 謂之不道 不道早已 참조)
또, 원문 知常容에서 ‘하상공’은 能知道之所常行 則除情欲 無所不包容也<도가 늘 행하는 것을 알면 사사로운 정과 욕구를 제거하여 포용하지 못함이 없다.>라고 주석하며 ‘도가 직접 (능통함을) 행한다’는 선도의 개념을 보이고 있다.
원문 沒身不殆에서 왕필은 無之爲物 水火不能害 金石不能殘 用之於心 則虎兕無所投其爪角...<무가 이룬 물건은 물과 불이 해할 수 없고 쇠나 돌로도 쇠잔하게 할 수 없다. (무를) 마음에 쓰면 호랑이와 코뿔소가 그 발톱과 뿔을 들이댈 곳이 없으며, ...>라고 주석한다.
‘하상공’은 본장 전체를 선도의 입장에서 풀이하며, 왕필은 전체를 현학적 논리로 해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