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도덕경 제32장
제32장. 지지知止
도상무명 박수소 천하막능신야 후왕약능수지 만물장자빈
道常無名 樸雖小 天下莫能臣也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賓
도는 늘 이름이 없어 (보기에) 질박하고 비록 작으나 천하에 어느 것도 그보다 더 (유능한) 신하일 수가 없다. 후왕이 (도를) 지킬 수 있으면 만물이 장차 스스로 귀하게 모시게 된다.
- 樸雖小: (도는) 질박하고 비록 작다. ‘樸’은 통나무둥치이며, ‘본바탕의 질박함’을 일컫는다. 도는 화려하거나 거룩한 모양이 아니라 그 작용이나 속성이 소박하며 사소하게 느껴짐을 일컫는다.(제34장 常無欲 可名於小 및 제37장 無名之樸 참고)(樸: 제15,19,28,37장)
- 天下莫能臣也: ‘천하에 어느 것도 그보다 더 유능한 신하일 수가 없다. 혹자는 이 구절을 ‘(도는 고귀한 존재이므로) 천하에 어느 누구도 감히 신하로 삼을 수 없다.’는 의미로 풀이하며 그 근거로 「하상공장구」의 주석을 들고 있으나 하상공의 주석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즉, 「하상공장구」는 ‘道樸雖小微妙無形 天下不敢有臣使道者<도는 질박하고 비록 작으나 미묘하고 형체가 없어 천하에 어느 것도 감연히 신하로 삼아 도를 부리지 못한다.>’라고 주석하며 원문을 ‘천하에 어느 것도 (도를) 감연히 신하로 삼을 수 없다.’는 내용으로 해석하는데, 이는 곧, ‘도를 신하로서 부릴 능력을 갖춘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를 오해하여 ‘(도는 고귀한 존재이므로) 천하에 어느 누구도 감히 신하로 삼을 수 없다.’는 의미로 풀이하고 있다.(본장 ‘章注’ 참고)
-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賓: 후왕이 만약 (도를) 지킬 수 있으면 만물이 장차 스스로 (후왕을) 귀하게 대접하게 된다. 이 부분은 제37장의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와 유사한 구조이다.
- 萬物: ‘萬物’은 본래 천하의 만물초목을 일컫는다. 『노자』에서 ‘萬物’이라 하면 대체로 ‘세상사람’ 또는 ‘세상’, ‘세상물정’ 등을 말한다.
이처럼 ‘만물’로써 ‘세상사람’을 일컫는 것은 도를 좇아 천하 만물을 운영하는 ‘천지자연’과 인간의 삶을 책임지는 ‘왕’을 같은 위상으로 대접하는 의미이며, 동시에 천지자연 같은 그러한 덕이 왕의 본분임을 다시 강조하는 의미도 있다.(萬物: 제1,2,4,5,8,16,32,34,37,39,40,42,51,62,64장)(萬物草木: 제76장)(物: 제14,16,21,24,25,27,29,30,31,42,51,55,57,65장)
천지상갑이강감로 민막지령이자균 시제유명 명역기유 부역장지지 지지가이
天地相合以降甘露 民莫之令而自均 始制有名 名亦旣有 夫亦將知止 知止可以
불태
不殆
(즉, 도를 지킬 수 있으면) 하늘과 땅이 서로 화합하여 감로를 내리며, 백성은 영(을 내림)이 없이도 스스로 가지런히 (공평하게) 된다. (세상의) 제도가 시작되면서 (그에 대한) 이름이 있었으니 (그) 이름 역시 (제도와 함께) 이미 있어온 것이고, (그렇다면) 역시 장차 (이름에 의한 제도의 시행을) 그칠 줄 알아야 한다. (그처럼 이름에 의한 제도를) 그칠 줄 안다면 (천하는) 위태로움이 없게 된다.
- 始制有名 名亦旣有: (천하의) 제도가 시작되면서 그것을 이르는 이름(名)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역시 (제도와 함께) 이미 있어온 것이다. 여기서 ‘制’는 ‘제도’이며, 인간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근본이념과 습속, 법식 등을 통칭하는 말이다. ‘名’은 여기서 제도가 시작될 당시에 그와 함께 붙여진 ‘제도의 이름’을 일컫는다.
‘名’의 옥편 자의는 ‘이름ㆍ명분ㆍ이르다’ 등이며, ‘사물의 정상을 분별하여 이르다(名하다)’를 뜻한다. 사물은 말로 이름으로써 상대적으로 개념화되고 문자에 의하여 정형화된다. 어떤 객체에 이름을 붙여 이른다는 것은 사물의 정상을 상대적 관점으로 인식하고 이를 개념화하여 규정하는 행위이다.
천지만물은 본래 분별하여 이름(‘이르다’의 명사형)이 없는 ‘無’로 된 하나의 뒤섞인 덩어리였다. 그처럼 하나의 근본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어떤 실체를 (사람이) 상대적 관념으로 인식하고 분별함으로써 차이가 생기게 되고, 그에 따라 이름이 붙여짐으로써 만물의 구분이 생겨나는 것이다.
여러 사람에 의해 다양한 관점에서 인식되는 ‘이름’은 각자 주관적 관점에서 상대적으로 객체를 받아들임으로써 피아를 구분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이름(이르다)으로써 규정된 대상은 그 사물의 한결같은 본래의 모습 그대로일 수가 없다.(名: 제1,14,21,25,32,34,37,41,44,47장)
- 夫亦將知止 知止可以不殆: (후왕이 도를 지킬 수 있으면 하늘과 땅이 서로 화합하여 감로를 내리며, 백성은 영을 내림이 없이도 스스로 공평하게 되는바) 이름에 의한 (기존의) 제도의 시행을 그칠 줄 알아야 한다. 그리한다면 (천하의 질서는) 위태로움이 없게 된다.
여기서 ‘이름에 의한 제도’란 (예로부터) 지금껏 있어온 이념이나 법식을 명분과 형식으로 답습하는 것이며, 그로인하여 지나치게 화려하고 불합리한 제도를 일컫는다.(제62장 故立天子 置三公 雖有拱璧以先駟馬 不如坐進此道 참고)(知止不殆: 제32,44장)
한편, ‘이름에 따른 (기존의 혼란한) 제도’를 그침으로써 (천하가) 위태로움이 없게 된다는 그 새로운 대안은 곧 ‘대도’를 말하며, ‘대도’는 우주대자연의 섭리처럼 광원한 ‘도’와 그 도를 그대로 좇아 따르는 ‘덕’을 함께 일컫는다.
≪참고: 주나라가 개국할 당시는 귀와 신(당시 귀신은 곧, 천제나 천신과 동의어)이 우주를 지배하는 세계였던바 천하를 지배하는 지도자는 그러한 신과 직접 교통하는 왕王이나 그 이하 제후들이었다. 이후 서주시대에서 동주시대로 변전되면서 하늘의 아들인 왕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지고, 신성한 권위가 무색해진 기존의 그 자리는 신선神仙이나 잡귀신 등이 대신하며 현실에서 실력을 발휘하게 된다.
노자가 활동하던 춘추시대 말기는 가히 말세라 할 정도로 천제(천신)와 천자(왕)를 중심으로 한 기존의 귀족정치가 붕괴되면서 바야흐로 혹세무민의 제자학파나 미신이 급속히 횡행하던 시기였다. 어지러워진 기존의 질서를 정연整然하게 이끌어갈 근본적이고 실질적인 무언가(즉, 합리적인 세계관과 그에 따른 정치이념)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인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노자가 제시한 것이 ‘도덕사상’이다. 『노자』는 사물의 천연한 그대로를 물아일체의 관점에서 사실적으로 관찰하고, 관찰한 그대로를 가감 없이 펼쳐 보이는 자연과학적 방식으로 도와 덕을 기술한다.
마음의 빔을 지극하게 하고 성정을 고요히 함으로써 노자는 스스로 참된 본성을 닦아 사물의 근본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였고, 그 물아일체의 바탕에서 한 치도 어김이 없는 무한한 섭리로 도도히 운행하는 우주대자연의 어떤 실체를 통찰하였던바, 이것이 곧 ‘도道(의 존재)’이다.(제14장 및 제16장 靜ㆍ命ㆍ常ㆍ明, 제25장 道法自然ㆍ獨立不改 참고)
덕德이란 그러한 도의 밝음을 그대로 좇아 참되게 이행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이 직접 도를 행할 수는 없는바 도의 밝음을 사람이 그대로 좇아 행하는 것을 사람의 도, 곧 참된 덕(上德)이라 한다. 상덕이야말로 천하를 아우르는 성군의 본분이다. 만물이 나서 늙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모두 德의 운행을 따른다. 성군은 그러한 섭리를 참되게 따를 뿐이며, 그것을 일러 현덕이라 한다.(제10,51장 是謂玄德)
천하를 다스리는 왕이 개인의 사사로움을 온전히 내려놓음으로써 천연한 본성으로 스스로를 경계할 수가 있고, 그러한 물아일체의 입장에서 ‘도의 밝음’에 다가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로써 왕은 모든 것을 긍정하여 만물을 포용하며 말없이 모범을 보이어 천하를 (자연의 섭리처럼) 무위로 아우르게 되는바, 바야흐로 세상은 조화롭게 안정된다는 것이다.
이로써 왕은 백성과 동화同和하여 마음껏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으며, 백성은 부귀권세를 모른 채 소박한 이웃과 더불어 생업에 전력함으로써 마음껏 자유롭게 참된 일상을 즐기면 그만인 것이다. 소박하나마 맛나게 먹고 맵시 있게 입으며 즐겁게 천수를 누리다가 다시 道로 돌아가는 그것이 ‘도덕사상’의 요지이다.
‘道’라는 말은 노자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있었던 것이다. 고대 금문金文에서 ‘道’는 ‘도導’의 형태이다. ‘道’는 큰 도로에서 부정한 것을 깨끗이 하여 나아가는 계행啓行이나 선도先導의 의례가 그 본래의미이다. 그로부터 ‘도’는 앞장서서 길을 열어가는 일 또는 사람이 가는 의당하고 올바른 길의 뜻을 지니며, ‘도로써 나아가다.’라는 정도의 용례로 쓰이게 된다.
노자가 활동할 당시에도 ‘도’라는 것이 이미 성행하고 있었다. 다만 그 도라는 것은 여전히 그러한 귀신이나 천제, 천신, 신선 등이 주재하는 전통적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한 채 혼융되어 그 연장선상에 있거나 그로부터 파생한 것으로서 다분히 신비롭고 주관적인 모습의 소위 ‘신선도神仙道’였으며, ‘각자 저마다의 도’였던 것이다.≫
비도지재천하 유천곡지어강해
譬道之在天下 猶川谷之於江海
도가 천하에 있음을 비유하자면 마치 내와 계곡이 흘러 강과 바다에 이르는 것과 같다.
- 譬道之在天下 猶川谷之於江海: 도가 천하에 있음을 비유하자면 마치 내와 계곡이 (천하의 모든 곳을 스스로 낮게 흐르면서 큰) 강과 바다에 이르는 것과 같다. 내와 계곡이 끊임없이 낮은 곳으로 흐르며 인체의 실핏줄처럼 온 세상에 작용하는 현상을 이 세상 모든 곳에 작용하면서도 있는 듯 없는 듯 겸손한 도의 속성과 비유하였다.
[章注] 제32장-제37장은 「도경」의 결론부분으로 상자연한 도의 속성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하면서 마무리한다. 무한히 광원하고 심오한 도는 이 세상 아주 깊숙한 곳에서 언제 어디에서나 끊임없이 작용하면서도 스스로 드러나지 않으며, 미약한듯하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 없다. 본장에서는 천하에 그 어느 것도 이러한 도보다 유능한 신하가 없다고 한다.
원문 天下莫能臣也는 「하상공장구」에 天下不敢臣으로 되어있고, ‘道樸雖小微妙無形 天下不敢有臣使道者<도는 질박하고 비록 작으나 미묘하고 형체가 없어 천하에 어느 것도 감연히 신하로 삼아 도를 부리지 못한다.>’로 주석하여 원문을 ‘천하에 어느 것도 (도를) 감연히 신하로 삼을 수 없다.’라고 해석한다.
이는 곧, ‘도를 신하로서 부릴 능력이 있는 사람이 없다.’는 의미가 되는데,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를 오해하여 ‘(도는 고귀한 존재이므로) 천하에 어느 누구도 감히 신하로 삼을 수 없다.’는 의미로 풀이한다. 도를 온전히 지킬 수만 있다면 도는 어떤 신하보다도 요긴하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 본래의 해석이다.
원문 始制有名에서 ‘하상공’은 ‘始 道也 有名 萬物也 道 無名能制於有名 無形能制於有形<‘시작’은 ‘도’이다. ‘이름이 있음’은 ‘만물’이다. 도는 이름이 없이 이름이 있음을 제어할 수 있고, 형체가 없이 형체가 있음을 제어할 수 있다.>’라고 풀이한다.
<원문 해석: 도는 이름이 있음(만물)을 제어한다.>
원문 名亦旣有는 ‘旣 盡也 有名之物 盡有情欲 叛道離德 故身毁辱<‘기’는 ‘모두 다’이다. 이름이 있는 만물초목은 모두 다 성정性情의 욕구欲求가 있어 (결국) 도를 배반하고 덕을 떠난다. 그래서 몸이 훼손되고 욕된다.>’으로 주석하여 양생의 개념으로 풀이한다.
<원문 해석: 이름 있는 만물은 역시 이미 모두 다 있다.>
원문 夫亦將知止는 「하상공장구」에 天亦將知之로 되어 있고, ‘人能法道行德 天亦將自知之(사람이 도를 본받아 덕을 실천할 수 있으면 하늘 또한 장차 (그것을) 스스로 알게 된다.>’라고 주석하여 천인 상응의 선도적 개념을 보인다.
<원문 해석: (하늘) 또한 장차 (이름이 있는 만물은 이미 있어 도가 아님을) 안다. 여기서는 ‘止’를 ‘之’로 해석하였다.>
또, 원문 知止可以不殆는 「하상공장구」에 ‘知之所以不殆로 되어 있고, 天知之 則神明祐助 不復危殆<하늘이 (그것을) 알므로 신명이 도와 다시는 위태롭지 않게 된다.>’라고 주석하여 선도의 관점에서 ‘도를 따르면 신명이 도와 위태로움이 없다.’고 풀이한다.
<원문 해석: (하늘이) 알기 때문에 (신명이 도와) 위태롭지 않을 수 있다.>
원문 譬道之在天下 猶川谷之於江海에서 ‘하상공’은 ‘譬道在天下 與人相應和 如川谷與江海之相流通<도가 천하에 있어 사람과 서로 화응하는 것을 비유하자면 마치 川谷(시내와 계곡)과 江海(강과 바다)가 서로 흘러 통하는 것과 같다.>’라고 주석한다.
‘하상공’은 본장 전체에서 도와 인간이 상감 화응한다는 선도의 논리를 유감없이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