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도덕경(31장~40장)

노자 도덕경 제40장

나무와 까치 2014. 1. 6. 08:37

제40장. 반약反弱

 

 

 

반자도지동 약자도지용 천하만물생어유 유생어무

反者道之動 弱者道之用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되돌림(반)은 도의 움직임이고, 미약함(약)은 도의 작용이다. 천하 만물은 有(천ㆍ지)에서 생겨나고 유는 無(도의 근본바탕)에서 생겨났다.

 

- 反者道之動: ‘되돌림’은 도의 스스로 움직임, 즉 도의 독립적이며 유기적인 순환작용을 일컫는다. 해와 달, 낮과 밤, 사계절, 천문의 운행 등 우주대자연과 같은 도의 운행은 움직여 멀리 가면 다시 되돌아오는바 그 진행과 순환하는 이치를 말한다.(反: 제25,65,78장)

≪참고: 뒤섞여 이루어진 (어떠한) 물질이 천지보다 먼저 있었는데, 고요하고 그윽하게 독립적으로 있으며 다시 고침이 없고, 두루 행하나 위태롭지 않으니 이는 천지의 어미라 할 수 있고 천하 만물초목이 존재하는 근본이 되는 ‘道’이다.(제25장 有物混成 先天地生 寂兮寥兮 獨立不改 周行而不殆 可以爲天下母)

도는 크고 광원하여 멀리 (운행하여) 가고 가면 되돌아오며 늘 한결같은 작용으로 스스로 그러하게 있는 ‘常自然한 존재’이다.(제25장 吾不知其名 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 大曰逝 逝曰遠 遠曰反 故道大.. 및 道法自然)≫

 

- 弱者道之用: ‘미약함’은 만물에 대한 도의 작용을 일컫는다. ‘道에서 나온 만물은 이미 도에서 벗어난 것이므로 도가 아닌 덕의 범주에 속하며 덕의 운영을 따른다. 그래서 이미 생성된 만물에 대한 도의 작용은 미약하다고 한다.

≪도는 (세상의) 깊숙이에 있으면서 (늘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으나 (사람들은 그것이) 가득차지 않은 것으로 의심한다(제4장 道沖而用之或不盈). 도의 작용은 미약한 듯하다.(제40장 弱者道之用) 도는 (분별하는) 이름이 없이 숨어 있다(제41장 道隱無名).

크게 가득 찬 도는 (너무도) 깊이 있는듯하나 그 작용은 (언제까지고) 다함이 없다(제45장 大盈若沖 其用不窮). 도의 작용은 심오하고 느긋하여 천하를 운용함에 있어서 바쁘지 않고 차근차근 순리에 따라 때가 되어야 이룬다(제41장 大器晩成). 도는 만사를 느긋하게 진행하여 길게 늘어진 듯하나 한 치도 어김없이 참되게 도모한다. 하늘의 그물은 넓고 성글지만 아무리 은밀한 일도 놓치지 않는다(제73장 繟然而善謀 天網恢恢 疎而不失).

도는 이 세상 어떤 일이든 하지 못함이 없고 또 (도가) 하지 않음이 없다(제37장 道常無爲而無不爲). (상대적 관념으로 분별하는) 이름(명)이 없는 박(樸, 소박한 근본바탕)이야말로 도에 이르는 유일한 방편이다(제1,37장 ‘名’ 및 제16장 참고).

도의 작용은 부지런하지 않다. 도는 담담하여 아무 맛이 없으며, 보고 있으되 완전하게 볼 수 없고 충분히 들을 수도 가질 수도 없다. 도의 작용은 흡족하지도 않다. 도는 인간이 사사로이 도구나 기술처럼 명리를 위해 소유하거나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道는 무한한 섭리에 의하여 스스로 독립적으로 지극히 크고 심원하게 작용하는 것이다.(제6장 用之不勤, 제35장 道之出口 淡乎其無味 視之不足見 聽之不足聞 用之不足旣, 제25장 獨立不改 周行而不殆)≫

 

-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無(아무것도 없음, 곧 도의 근본바탕)에서 有(드러난 실체, 곧 天ㆍ地)가 생겨나오고, 천하 만물은 有(천지)에서 생겨난다.

참고: 보고 있으되 보지 못하고 듣고 있으되 들을 수 없으며 쥐고 있으되 가질 수 없는 어떤 것이 (함께) 섞이어 하나로 되어있는데, 하늘과 땅이 있기 이전이다.

그것은 한없이 크고 심원하여 밝고 어두운 형체로 드러나는 어떤 것이 아니며, 끊임없이 이어져 (어떻게 구별하여) 이름을 이를 수가 없다. 결국, (그것은) 다시 ‘無物(물질이 없음)’로 돌아간다. 이를 정상情狀 없는 정상이며 물질이 없는 형상形象이라 하는데, 있는 듯 없는 듯 홀연하고 경이롭다.

앞에서 맞아 그 머리를 보지 못하고, 좇아도 그 후미를 보지 못하는바 그 실체를 온전히 인식할 수는 없으나 실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반의 지각으로는 확인할 수 없으므로 이를 ‘無(없음)’라고 한다.

결국, ‘한데 섞이어 하나로 이루어진 그것’이 ‘無’이며, 그 ‘無’의 존재가 바로 ‘도의 근본바탕(도기道紀)’인 것이다.

‘無(도의 근본바탕)’에서 ‘有(天ㆍ地)’가 생겨나오고, 만물은 ‘有(天ㆍ地)’에서 생겨난다. ‘有(天ㆍ地)’에서 상象ㆍ물物ㆍ정精이 생겨나 그 셋은 만물을 구성하는 것이다. 여기서 ‘有’는 곧 天ㆍ地를 뜻하며, ‘천ㆍ지’는 도를 그대로 좇아 만물을 낳아 먹여 기르는 ‘德’을 의미한다.

도는 덕으로 하여금 만물을 이루게 하고, 덕은 도를 그대로 좇아 생명의 생성에 직접 관여한다. 도에서 비롯한 덕이 만물을 생기게 하며, 도를 그대로 따르는 덕만이 만물을 낳아 먹이고 기르고 오로지 도를 온전히 이행할 수 있다(上德). 만물이 나서 늙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모두 德의 운행에 의한다.

도에서 나와 ‘有(천지만물)’가 되면 이는 이미 도가 아니므로 도에서 나온 만물은 즉시 덕의 범주에 귀속된다. ‘도를 잃은 후에는 덕’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과정들을 말하는 것이다.

(제1장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제4장 象帝之先, 제10장 生之畜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제21장 孔德之容 唯道是從, 제38장 失道而後德, 제40장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제41장 道隱無名 夫唯道 善貸且成, 제42장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제51장 道生之 德畜之 物形之 勢成之ㆍ是謂玄德 참고)(『장자』 ‘달생’편 제1장 ‘天地者 萬物之父母也’ 참고)

도는 만물이 태어난 속이며, 의지하여 돌아가는 근본이다(제62장 道者萬物之奧). 덕의 운행에 따르던 만물은 죽으면 다시 도로 돌아간다(제34장 萬物歸焉而不爲主, 제40장 反者道之動, 제50장 出生入死).≫

 

 

[章注] 원문 反者道之動에서 ‘하상공’은 ‘反者反本也 本者 道之所以動生萬物 背之則亡<‘되돌아간다는 것’은 ‘근본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근본이란 도가 움직여 만물을 생성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만물이 근본을) 등지면 곧 죽는다.>‘이라고 주석한다.

한편, 왕필은 이 부분을 ‘高以下爲基 貴以賤爲本 有以無爲用 此其反也 動皆知其所無 則物通矣 故曰反者 道之動也<높음은 낮음을 토대로 삼고 귀함은 천함을 근본으로 한다. 유가 무로써 씀을 삼는 이것이 (근본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무로 되는 바를 모두 알고 움직이면 만물은 통한다. 그러므로 되돌림은 도의 움직임이라고 한다.>’라고 주석하여 ‘以無爲用(무의 씀)’을 강조하며 현학의 논리로 풀이한다. 이 부분에서의 왕필 주석은 하상공의 주석을 참고한 흔적으로 보이는바 즉, 말하자면 ‘오답’이 너무 비슷하다는 것이다.

원문 弱者道之用에서 ‘하상공’은 ‘柔弱者道之所常用也 故能長久也<유약은 도가 늘 운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가) 길고 멀리 갈 수 있다.>’라고 주석하며 선도의 관점으로 풀이한다.

왕필은 이 부분을 ‘柔弱同通 不可窮極<유약한 것은 다함께 통하므로 끝이 다할 수가 없다.>’이라 주석하는데, 비록 표현을 달리하고 있으나 여기서도 하상공의 주석을 참고한 흔적이 보인다.

원문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에서 ‘하상공’은 ‘天地 神明 蜎 飛 蠕動 皆從道生 道無形象 故言生於無也 此言本勝於華 弱勝於强 謙虛勝於盈滿<천지․신명․벌레․날짐승․길짐승은 모두 도를 좇아 생겨나며, 도는 형상이 없으므로 無에서 생겨난다고 한다. 이는 근본이 화려함을 이기고 약함이 강함을 이기며 겸허함이 영만함을 이긴다는 말이다.>’이라 주석하며 ‘道는 형상이 없으므로 만물이 無에서 생겨난다.’고 한다.

왕필은 이 부분에서 ‘天下之物 皆以有爲生 有之所始 以無爲本 將欲全有 必反於無也<천하의 만물은 모두 유로써 생겨나고, 유는 무를 근본으로 하여 시작되는 것이므로 장차 유를 온전히 하고자한다면 반드시 무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하여 ‘以無爲本’을 논리로 풀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