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도덕경(41장~50장)

노자 도덕경 제42장

나무와 까치 2014. 1. 20. 08:40

제42장. 물생物生

 

도생일 일생이 이생삼 삼생만물 만물부음이포양 충기이위화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道는 하나 즉 無를 생성하고, 하나(無)는 둘(天ㆍ地)을 생성하고, 둘(天ㆍ地)은 셋(상象ㆍ물物ㆍ정精)을 생성하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을 지고 양을 안아 텅 빈 기운으로 조화한다.

[注]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道는 하나 즉 ‘無’를 생성하고, 無는 둘 즉 ‘하늘과 땅(有)’을 생성하고, 하늘과 땅은 ‘셋(상象ㆍ물物ㆍ정精)’을 생성하고, (이) 셋이 만물을 낳는다.(제14,21장 참고)

여기서 ‘一(하나)’은 ‘無’, 즉 ‘도의 근본바탕’을 일컫는다. ‘二(둘)’는 천과 지이며, 천ㆍ지는 곧 만물을 낳고 먹여 기르는 덕(유有)을 뜻한다. ‘三(셋)’은 象ㆍ物ㆍ精을 말한다.[제21장 및 『주역계사상전(제4장)의 ‘精氣為物 遊魂為變<정기가 만물을 이루고, (죽어서는) 떠도는 혼으로 변한다.>’ 참고]

한편, 도가 무극이고, 무극에서 음양으로 갈라져 태극이 되며, 태극의 음양이 결합하여 또 하나의 개체가 생겨나와 셋이 되며, 이것이 반복되면서 만물이 생긴다는 설도 유력하게 제기된다. 이는 주역에서 말하는 만물의 생성원리를 일컫는데, 그러나 무극과 태극은 표현만 다를 뿐 주역에서도 본래 같은 것으로 인식한다. 결국 이는 문리文理적 사변이나 형이상학적 추론에 의한 상대적 분별에 의한 인식인 것이다.

『주역』에서 ‘道’는 한 번은 음, 한 번은 양으로 하여 가는 것(一陰一陽之謂道, 계사상전 제5장)이라 하는데, 이는 우주대자연의 순행원리를 일컫는 것으로 노자』에서 말하는 대도大道나 천지도天地道와 통한다. 노자는 우주대자연의 천연한 그대로를 (물아일체의 관점에서) 사실적인 시각으로 관찰하고 있는 그대로를 기술하는 방식으로 도와 덕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만물은 음을 바탕으로 양을 지향하며 (천지간에) 텅 빈 기운으로 조화한다. ‘沖氣’는 (넓고 깊어서 텅 빈 것 같은) 천지간에 공활空豁한 기운.(沖: 제4,42,45장)]

 

인지소오 유고과불곡 이왕공이위칭 고물혹손지이익 혹익지이손

人之所惡 唯孤寡不穀 而王公以爲稱 故物或損之而益 或益之而損

사람이 혐오하는 바가 오로지 고ㆍ과ㆍ불곡인데도 왕공이 이로써 (스스로를) 칭한다. 그것은 세상일은 혹은 (사사로움) 덜어서 (덕을) 더하게 되고, 혹은 더하여 (덕을) 감한다.

[注] 人之所惡 唯孤寡不穀 而王公以爲稱: ‘孤ㆍ寡ㆍ不穀’은 모두 덕이 모자라거나 박복함을 뜻하며 왕공이 스스로를 겸칭하는 말이다.(39장 孤ㆍ寡ㆍ不穀). ‘王公’은 왕과 제후.

物: 여기서 ‘物’은 ‘萬物’ 혹은 ‘物情’의 축약으로 사물의 정상이나 세상사 형편을 뜻하며, ‘세상만물’ 혹은 ‘세상사람’으로 새길 수 있다.(物或惡之: 제24,31장)(物: 제14,16,21,24,25,27,29,30,31,42,51,55,57,65장)

物或損之而益 或益之而損: 세상일은 아마도 (사사로움을) 덜어서 (덕을) 더하게 되고, 혹은 (사사로움을) 더하여 (덕을) 감한다.(제48장 爲學日益 爲道日損 참조)]

 

인지소교 아역교지 강량자부득기사 오장이위교부

人之所敎 我亦敎之 强梁者不得其死 吾將以爲敎父

사람들이 가르치는 바에 대하여 나 역시 (다시금) 가르치는데, 즉 강고한 대들보는 (천수에 의한) 죽음을 얻지 못하므로 우리는 장차 이를 (타산지석으로서) 가르침의 아버지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注] 人之所敎 我亦敎之: 사람들이 (부귀권세를 추구하도록) 가르치는 바를 나 역시 (그와 달리 다시) 가르친다. 여기의 ‘人(사람)’은 제후나 귀족 등 지도층인사를 일컫는다.

强梁者不得其死: ‘强梁者’는 ‘강고한 대들보’이며, 앞에 나서서 부귀권세를 추구하는 강경한 남자’를 비유한다. 대들보는 늘 강력하게 무거운 지붕을 떠받치며 쉴 수가 없는바 갑작스런 화난으로 천명에 의한 천수를 누리지 못함을 비유한다.

吾將以爲敎父: 여기의 ‘父(아버지)’는 ‘强梁者’를 가리키며, 이는 ‘어미(모母)’나 ‘암컷(빈牝)’과는 반대의 개념이다. ‘敎父’는 ‘(타산지석으로서) 가르침의 아버지’로 새긴다.

我ㆍ吾: 이 장에서는 ‘我’와 ‘吾’가 함께 쓰였다. ‘’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자아自我의 정체’로서 ‘나’이다. ‘吾’는 자기를 낮추면서 상대방을 대접하여 ‘나’를 칭하는 것이 본래의 쓰임인데, 가족이나 특정 집단 등 몇 명의 무리를 대표하여 대외적으로 ‘나’를 칭할 때는 ‘우리’가 된다.

또, 동질감과 친근감을 표시하며 나와 대화상대자를 함께 ‘우리(吾)’라 칭하여 ‘나(자기 스스로에 대한 지칭)’를 대신하거나 그런 방식으로 대화상대자를 높여 ‘그대(You)’의 뜻을 대신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대화상대인 왕에 대하여 나를 삼가 칭하는 말이 된다.

『장자』 ‘천운’편에 노자와 공자의 대화를 소개하는 내용 중에서 노자가 공자와 대화하면서 공자를 ‘오자吾子’라 부르는 부분이 있다. 여기서 ‘吾子’는 ‘우리 선생님’ 혹은 ‘거기 선생님’의 뜻으로서 한 학문學門의 스승인 상대방을 높여 예우하며 ‘그대’의 뜻으로 사용하는 어투이다.(我: 제17,20,42, 53,57,67,70장)(吾: 제4,13,16,21,25,29,37,42,43,49,54,57,69,70,74장)]

 

[章注] 원문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에서 ‘하상공’은 ‘道始所生者一也 一生陰與陽 陰陽生和淸濁三氣 分爲天地人也<도가 낳는 처음의 것이 하나이다. 하나는 음과 양을 낳는다. 음과 양은 和ㆍ淸ㆍ濁 3기를 낳는다. (이것이) 분화하여 천ㆍ지ㆍ인이 된다.>’라고 주석하며 선도의 관점으로 풀이하는데, 여기서 ‘一(하나)’은 ‘元氣’를 말한다.

한편, 왕필은 이 부분을 ‘萬物萬形 其歸一也 何由致一 由於無也 由無乃一 一可謂無 已謂之一 豈得無言乎 有言有一 非二如何 有一有二 遂生乎三 從無之有 數盡乎斯 過此以往 非道之流<만물의 만 가지 형태는 일(一)로 돌아간다. 무엇으로 인하여 일(一)에 이르는가? 무로 말미암는다. 무로 말미암아 일에 이르니 ‘일’은 ‘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미 일이라고 했으니 어찌 말(言)이 없겠는가? 말이 있고 일이 있으니 이(二)와 같지 아니한가? 일이 있고 이가 있으니 그로 인하여 삼이 생긴다. 무를 좇아 나와 있는 유는 이로서 헤아림을 다한다(헤아릴 수가 없다). 이를 간과하여 (처신하여)간다면 도의 흐름(원류)이 아니다.>’라고 주석하여 현학적 사변을 보인다.

이 부분 왕필의 주석은 『장자』 ‘제물론’편(제1-18절)에 나오는 “天地與我竝生 而萬物與我爲一 既已爲一矣 且得有言乎 既已謂之一矣 且得無言乎 一與言爲二 二與一爲三 自此以往 巧歷不能得 而況其凡乎 故自無適有 以至於三 而況自有適有乎 無適焉因是已<천지와 더불어 나는 함께 태어났고, (수없이 많은) 세상만물과 더불어 나는 하나가 된다. 이미 (그렇게 道로서) 하나가 되었는데 또 (더 필요한) 말이 있겠는가?

(그러나 세상에서는) 이미 하나(일一)라고 일컬었으니 ( ‘有’로 됨으로써) (왜) 또 말이 없겠는가? 하나(일一)와 더불어 (하나라고 한 그) 말은 둘(이二)이 된다. 둘과 더불어 하나는 셋(삼三)이 된다. 이로부터 헤아려 가면 역산曆算의 명수名手로서도 (그 끝을) 셀 수 없는데 하물며 범인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그렇게 무에서 시작하여 (물아일체로서 ‘하나’를 말로 표현함으로써) 유를 맞아 셋에 이르는데 하물며 유에서 시작하여 유를 맞는 것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만물과 더불어 내가 물아일체로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대상을 맞음이 없이 이것(용庸, 꾸밈없는 본래 그대로의 한결같음)에서 비롯할 뿐이다.>”와 그 내용과 형식이 매우 닮아있다.

원문 沖氣以爲和에서 ‘하상공’은 ‘萬物之中 皆有元氣 得以和柔 若胸中有臟 骨中有髓 草木中有空虛 和氣潛通 故得長生也<만물의 (깊은) 속에는 모두 원기가 있어 이를 가짐으로써 온유하게 조화한다. 이는 마치 가슴속에 장기가 있고 뼈 속에 골수가 있으며 초목 속에 텅 빈곳이 있어, 화기가 깊이 통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장생한다.>’라고 주석하는데, 이는 의학적으로도 충분히 현실성이 있는 내용이긴 하나 전체적으로는 선도의 관점이다.(『장자』 ‘인간세’ 편 제1-10절 ‘夫徇耳目內通而外於心知’ 참고)

원문 人之所敎 我亦敎之에서 왕필은 ‘我之敎人 非强使從之也 而用夫自然 擧其至理 順之必吉 違之必凶 故人相敎 違之必自取其凶也 亦如我之敎人 勿違之也<내가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강제로 따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행하도록 운용함이다. 그 지극한 이치를 거론하여 따르면 반드시 길하고 어기면 반드시 흉할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이 서로 (강직함을) 가르쳐 (자연스럽게 행함을) 위배하면 반드시 스스로 흉함을 취하게 되는바, 나 역시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행함을) 어기지 말라고 가르친다.>’라고 주석하여 현학적 논리로 풀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