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도덕경(51장~60장)

노자 도덕경 제55장

나무와 까치 2014. 4. 28. 07:57

제55장. 적자赤子

 

 

 

함덕지후 비어적자 봉채훼사불석 맹수불거 확조불박

含德之厚 比於赤子 蜂蠆虺蛇不螫 猛獸不據 攫鳥不搏

덕을 머금어 두텁고 넉넉함은 적자(갓난아이)에 비유한다. (갓난아이는) 벌ㆍ독사가 쏘지 않고 맹수가 덤비지 않으며 맹금이 잡아채지 않는다.

 

- 含德之厚 比於赤子: (성인이) 덕을 두텁게 품어 넉넉한 모습은 갓난아이의 천연함에 비유한다. 여기서 ‘赤子’는 ‘갓 태어난 영아’이며, ‘갓난아이’로 새길 수 있다.

갓난아이는 심신의 조화가 지극히 순수純粹하여 상대방을 대함에 천연한 그대로 적의가 없으므로 벌ㆍ독사가 쏘지 않고, 맹수가 (적대하여) 덤비지 않으며, 맹금이 (공격하여) 잡아채지 않는다.(厚: 제44,50,55,75장)

 

 

골약근유이악고 미지빈모지합이전작 정지지야 종일호이불애 화지지야

骨弱筋柔而握固 未知牝牡之合而全作 精之至也 終日號而不嗄 和之至也

(갓난아이는) 뼈가 약하고 힘줄은 부드러우나 (손의 힘은) 굳게 쥔다. 암수의 교합을 알지 못하나 (성기의 모양을) 온전히 짓는데, (이는) 精(생명의 기운)이 지극한 것이다.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데, (그것은 기운의) 조화가 지극한 것이다.

 

- 천지자연의 속성 같은 천연한 그대로의 생명력과 지극히 조화로운 생명의 기운을 갓난아이의 생리적 현상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지화왈상 지상왈명 익생왈상 심사기왈강 물장즉노 위지부도 부도조이

知和曰常 知常曰明 益生曰祥 心使氣曰强 物壯則老 謂之不道 不道早已

(도에 있어서 그처럼 천연한) 조화를 아는 것을 상(늘 한결같음)이라 하고, 상을 아는 것을 명(밝음)이라 한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삶(의 수명)을 더함을 상서롭다 하고 마음으로 기를 부림을 강하다고 한다. 만물은 장성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곧 노쇠하게 된다. 이는 말하자면 도가 아니다. 도가 아니라면 조속히 그만둘 것이다.

    

- 知和曰常 知常曰明: (갓난아이 같은 천연한) 조화로움을 아는 것을 ‘常’이라 하고, ‘常’을 아는 것을 ‘明(밝음)’이라 한다. 여기의 ‘知和曰常’은 제16장의 ‘復命曰常’과 같은 의미로 비교된다. 즉, ‘知和曰常=復命曰常’이며, 이는 곧 ‘知和=復命’이다. 결국 여기의 知和’와 제16장의 ‘復命’은 동의어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갓난아이(赤子)와 같은 천연한 그대로의 순수한 생명으로 돌아감으로써 조화로움의 실질을 체득하여 알게 되며(復命), 그로써 천지자연의 섭리 같이 천연한 ‘덕의 조화로움’을 알게 되는 것이다(知和). 그러한 ‘조화로움’을 아는 것을 ‘상’이라 하며(知和曰常), ‘상’을 아는 것을 ‘명(도의 밝음)’이라 한다(知常曰明).

결국, 여기의 ‘知和曰常 知常曰明’은 도의 밝음의 실질을 밝히고 있는 것으로, 이는 바로 이어지는 ‘益生曰祥 心使氣曰强’이 도의 실질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비교, 설명하고자 ‘知和曰常’과 ‘益生曰祥’을 음운에 맞추어 논리적으로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참고: (마음의 비움을 지극히 하고 성정의 고요함을 두터이 하여 사물의 천연한 그대로를 직시함으로써) 근본으로 돌아감을 ‘靜’이라 하며, 이를 일컬어 ‘命(생명)’에로 되돌아간다고 한다. 이 ‘命’은 천지자연의 천연한 생명력이며, 정精의 조화가 지극한 갓난아이 같은 천연한 그대로의 순수한 생명生命을 일컫는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몸의 모든 세포가 활짝 열려 활성화되면서 내장 각 기관의 자정기능은 극대화된다. 몸의 기운은 지극히 자연스러워져 심신이 순수한 생명 그 자체의 조화로운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是謂復命: 이를 생명에로 다시 돌아간다고 한다.)

갓난아이 같은 천연한 그대로의 심신 상태로서 온전히 ‘命(생명)’에로 돌아옴으로써(復命) 청정淸靜한 정신으로 사물의 천연한 그대로를 직시할 수가 있다. 그 상태에서만이 물아일체의 입장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復命曰常: 命에 되돌아감을 常이라 한다).

갓난아이 같은 천연한 심신의 상태로서 온전히 ‘命(생명)’에로 돌아와 늘 한결같이 (무한한) 일상으로 이어지는 것을 ‘상常’이라 한다(曰常). 이 ‘常’은 ‘늘 한결같이(常) 스스로 그러함(自然)’ 즉 상자연常自然이며, 천연한 그대로 물아일체의 상태이다.(復命曰常: 命에 되돌아감을 常이라 한다.)

(그러한) ‘常’을 (온전히) 아는 것을 ‘지상知常’이라 하며, ‘知常’을 ‘明(도의 밝음)’이라 한다.(제16장 歸根曰靜 是謂復命 復命曰常 知常曰明 참고)≫

 

- 益生曰祥 心使氣曰强: (세상에서는) 삶(의 수명)을 더함을 상서롭다 하고 마음으로 기를 부리는 것을 강하다고 한다.

세상에서는 호흡을 통하여 기운을 축적하고 운용하여 얻은 양생술 같은 것으로 삶의 수명을 더하는 것(益生)을 상서롭다고 하고(曰祥), (그러한) 기운을 마음으로 부리는 것(心使氣)을 강하다고 한다(曰强). 결국 이는 ‘益生’이나 ‘心使氣’ 같은 것을 ‘상서롭고 강한 것’이라고 당당하게 내세우며 가르치는 ‘기존의 도’를 일컫고 있는 것이다.

노자는 이러한 것들을 (당시에 이미 만연하고 있는) ‘자잘한 도’라고 하였는바, 이는 ‘大道’가 아니기 때문이다(제1장 道可道 非常道 및 제67장 若肖久矣 其細也夫 참고).

그처럼 심신을 단련하여 기운을 축적하고 운용하여 양생술이나 방중술 같은 술법을 익힘으로써 상당부분 능력을 얻는 것은 가능한 일이나 그것과 도의 밝음과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참고, 선도仙道 개요: 선도란 도통하여 내가 태어난 본자리인 ‘도계道界의 원신元神’으로 돌아가서 영생한다는 것이 그 근본원리이다. ‘元神’이란 하늘에 있는 道界에서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것을 경영하는 ‘道 그 자체의 존재’를 말한다. 말하자면 우주의 모든 神 중에서 으뜸신이며, 나의 영혼靈魂이 분리되어 나온 ‘본자리’인 것이다.

‘도통’이란 호흡을 통하여 기운을 축적하고, 축적된 기운을 운용하여 심신을 강화하고 능력을 키우며, 그렇게 성명쌍수性命雙修하며 양신陽神을 이루어 스스로 도체道體(도계道界를 출입할 수 있는 자기의 분신)가 됨으로써 도계의 원신으로 돌아가 도에 통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불멸의 생명을 얻고 영생한다는 것이 그 본질이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하늘로 돌아가는데 그 영혼들은 생시에 수련한 정도에 따라 여러 단계의 天界에서 각각 대기하였다가 최고차원의 도계에 있는 원신에 의하여 원기元氣(태화太和의 정기)를 받음으로써 다시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仙道의 세계관이다.≫

  

- 物壯則老 謂之不道 不道早已: (세상에서는 삶에 수명을 더하는 ‘益生’을 상서롭다고 하고, 마음으로 기운을 부리는 ‘心使氣’를 강하다 하며 그것을 도라고 하나 결국) 만물은 장성壯盛하다가 오래지 않아 곧 노쇠하게 되는바 이는 말하자면 도가 아니다. 도가 아니라면 조속히 그만둘 것이다.(제30장 物壯則老 是謂不道 不道早已 참고)

『노자』에서 말하는 섭생은 심신의 건강과 삶의 질의 향상 그리고 상자연한 도의 밝음을 통찰하기 위한 것으로서 결국 스스로 참된 일상을 살아가기 위한 자기수련이다. 따라서 이는 선도仙道나 도교 등에서 행하는 양생술이나 방중술, 양신陽神 같은 방식으로 도통을 추구하는 수련과는 그 취지나 목적이 근본적으로 같지 않다.(제50장 攝生 참고)

노자의 도덕사상은 그 이후 장자, 황로학, 현학, 신선사상, 도교 등으로 변전되어 간다. 이들은 소위 ‘도가’라 하여 명분은 노자를 표방하나 그 실질에 있어서는 노자의 원의와 전혀 관계없이 각 학파의 필요에 따라 내용이 가감되고 개작되며 전해졌던 것이다. 물론 노자의 ‘섭생’ 또한 각 학파의 이념과 필요에 따라 미묘하게 변형함으로써 각각 그 이론적 근거로 삼았던 것이다.

참고, 『노자』의 도: 노자가 활동할 당시에도 이미 ‘도’라는 것이 성행하고 있었다. 다만 그 도라는 것은 여전히 그러한 귀신이나 천제, 천신, 신선 등이 주재하는 전통적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한 채 혼융되어 그 연장선상에 있거나 그로부터 파생한 것으로서 다분히 신비롭고 주관적인 모습의 소위 ‘신선도神仙道’였으며, ‘각 문파마다의 도’였던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노자가 제시한 것이 ‘도덕사상’이다. ‘도덕사상’은 그저 단순한 자연주의 이념이 아니다. 『노자』는 사물의 천연한 그대로를 물아일체의 관점에서 사실적으로 관찰하고 기술하는 자연과학적 방식으로 도와 덕을 파악하였다.

이는 귀鬼와 신神, 즉 귀신(곧 천제나 천신)이 우주를 지배하는 당시의 세계관에서 우주대자연을 있는 그대로 사실적인 시각으로 관찰하고 관찰한 그대로 가감 없이 받아들이는 자연과학적인 이념의 세계관으로 전환을 시도한, 당시로서는 엄청난 대사건이었다.

마음의 빔을 지극하게 하고 성정을 고요히 함으로써 노자는 스스로 참된 본성을 닦아 사물의 근본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였고, 그 물아일체의 바탕에서 한 치도 어김이 없는 무한한 섭리로 도도히 운행하는 우주대자연의 어떤 실체를 통찰하였던바, 이것이 곧 ‘도道(의 존재)’이다.

덕德이란 그러한 도의 밝음을 인간이 그대로 좇아 참되게 이행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이 직접 도를 행할 수는 없다. 도의 밝음을 사람(왕)이 그대로 좇아 행하는 그것이 사람이 행할 수 있는 도이며, 이는 곧 참된 덕(上德)이다. 상덕이야말로 천하를 아우르는 성군의 본분이다.

그로써 왕은 천지자연의 섭리 같은 조화로운 질서 속에서 모든 것을 긍정하고 포용하며 백성과 더불어 자유롭게 살아가고, 백성은 모두가 부귀권세를 모른 채 그저 생업에 충실하며 소박하나마 맛나게 먹고 맵시 있게 입으며 화목하게 이웃과 더불어 마음껏 자유로운 일상을 즐기면 그만인 것이다. 그렇게 사람은 자유롭게 천수를 누리다가 다시 道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도덕사상’이다.≫

 

 

[章注] 본장에서는 ‘知和曰常 知常曰明 益生曰祥 心使氣曰强’이라 하면서 우주대자연의 섭리 같은 ‘大道’와 기존에 이미 만연한 소위 ‘자잘한 도’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다.

 

원문 比於赤子에서 ‘하상공’은 ‘神明保佑含德之人 若父母之於赤子也<신명이 갓난아이를 대하듯이 덕을 머금은 사람을 보호하고 돕는다.>’라고 주석하는데, 여기서 신명은 선도의 개념이다.

원문 蜂蠆虺蛇不螫은 「하상공장구」에 毒蟲不螫으로 되어있고, ‘蜂蠆蛇虺不螫<벌ㆍ독사가 쏘지 않는다.>’라고 주석하는데, 전체취지는 차이가 없다.

원문 未知牝牡之合而全作은 「하상공장구」에 未知牝牡之合而峻作으로 되어있고, ‘赤子未知男女之合會 而陰作怒者 由精氣多之所致<갓난아이는 아직 남녀간의 교합을 알지 못하나 음경(고추)이 발기하는 것은 정기가 많이 이르는 때문이다.>’라고 주석한다.

한편, 왕필은 이 부분을 ‘作 長也 無物以損其身 故能全長也··<‘작’은 ‘자란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그 몸을 손상하는 물체가 없으므로 온전히 자랄 수 있다.··>’라고 주석하고 있다.

원문 不道早已에서 ‘하상공’은 ‘不得道者 早已死亡<도를 얻지 못하면 일찍 사망한다.>’라고 주석하며, 본장 전체를 선도의 입장으로 해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