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도덕경(51장~60장)

노자 도덕경 제58장

나무와 까치 2014. 5. 19. 08:06

제58장. 무정無正

 

기정민민 기민순순 기정찰찰 기민결결

其政悶悶 其民淳淳 其政察察 其民缺缺

정사가 민민하면 백성은 순순하다. 정사가 찰찰하면 백성은 결결하다.

[注] 其政悶悶 其民淳淳: 정사가 신중하고 답답하면 백성은 순박하다. 임금의 참된 덕이란 백성의 마음으로 내 마음을 삼아 백성의 생각을 일일이 함께 헤아리고 더불어 섞이며 동화하는 것이다.

그렇게 백성을 어린아이처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대한다면 그 정치가 답답한 것처럼 여겨지나 백성은 천연한 그대로의 순박함을 잃지 않는다. 그로써 백성들은 각자가 생업에 충실하며 이웃을 배려하고 스스로 자유롭게 살아가면서 천하의 질서는 천지자연의 섭리처럼 조화롭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淳淳’은 ‘(백성의) 천연한 그대로의 순박한 성정’이다.

其政察察 其民缺缺: 정사를 세밀하게 감찰하면 백성은 흠결투성이다. ‘其政察察’은 법령 등으로 옳은 기준을 획일적으로 규정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이를 위배함이 없도록 세밀히 감찰하며 통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저마다 부귀와 영화를 갈망하며 충성을 다투고 패당을 지어 음모와 술수로 서로를 헐뜯고 해침으로써 모두가 거칠어져 흠결이 생기는 것이다. 여기서 ‘缺缺’은 ‘(백성들이 다) 결함이 있음’이다.]

 

화혜복지소의 복혜화지소복 숙지기극 기무정 정복위기 선복위요 인지미 기

禍兮福之所倚 福兮禍之所伏 孰知其極 其無正 正復爲奇 善復爲妖 人之迷 其

일고구

日固久

화는 복이 의거하는 것이고 복은 화가 엎드린 것인데, 누가 그 궁극(의 실)을 아는가? (무릇) 바름이란 없다. 바름은 다시 기이함으로 되고 참됨은 다시 요사妖邪함이 된다. (그렇게) 사람들이 혼미하여 그것이 날로 굳어져 오래되었다.

[注] 禍兮福之所倚 福兮禍之所伏 孰知其極: 화는 복이 의거하는 바탕이고 복은 화가 (잠시) 엎드린 것인데 누가 그 궁극의 실상實相을 아는 것인가?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본질은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며, 살아가되 참되게 살아가는 것’이다(제39장 萬物得一以生 侯王得一以爲天下貞 참고).

福이란 무엇인가? ‘福’이란 한마디로 일상의 삶이 평화롭고 즐거운 것이다. 복福이란 본시 넘쳐나는 재물이나 높은 지위, 권력, 남다른 명예 같은 것이 아니라 천재지변이나 전쟁, 질병 같은 환난이 없이 나와 가족과 이웃이 건강하고 한결같은 질서로 일상을 살아가는 그것이 복의 핵심이다. 참된 삶이란 바로 그 복된 삶을 위해 정성을 다하는 삶이다. 즉, 막강한 권세, 고귀한 신분, 넘치는 재물 등으로 화려하고 풍족하며 거룩하게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소박하게 생업에 충실하며 필요한 만큼의 음식을 맛나게 먹고, 검소하면서도 맵시 있게 옷을 입고, 이웃과 화목하게 풍속을 즐기면서 마음껏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 참된 삶인 것이다.(제80장 ‘甘其食 美其服 安其居 樂其俗’ 참고)

삶이 진정 늘 즐겁고 행복하려면 반드시 건강한 심신과 평화로운 일상이 동반되어야 하는바, 거기에는 화목한 가족, 서로 믿고 의지하는 이웃, 올바른 사회질서, 안정된 국가 등의 생태적 환경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오랜 옛날부터 사람은 맹수나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면서 척박한 환경에 적응하여 먹고 자고 입으며 스스로 건강하게 생명을 유지하여

최선을 다해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존망의 절실함이었고 일상의 대부분이었으며, 이는 곧 삶의 근본이자 복된 삶의 본질인 것이다.<삶의 본질>

거기에서 나아가 이웃과 더불어 서로를 배려하며 자유롭고 평화롭게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면서 최선을 다해 주어진 생명을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복된 삶이다.

그렇다면 삶의 밑바탕에 항상 깔려있는 그 ‘화난禍難’은 복이 의지하는 것임이 분명하며, 복은 화난이 잠시 엎드려있는 것일 뿐이다. 그처럼 화는 복이 의거하는 바탕이고 복은 화가 엎드린 것인데, 누가 그 지극한 근본실질에 대하여 아는가? 안타깝게도 천하에 사람들은 누구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노자는 『노자』 전체를 통하여 그것은 성인의 인품을 갖춘 왕만이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사전에는 ‘의복倚伏’이라 하여 ‘화와 복은 서로 인연이 되어 일어나고 가라앉음’이라고 되어있는데, 비슷한 말이기는 하나 이 구절의 취지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其無正 正復爲奇 善復爲妖: (무릇 세상에) ‘바름’이란 없다. 바름은 다시 기이함으로 되며, 참됨은 다시 요사妖邪함이 된다.

여기서 ‘바름(正)’은 법령 등으로 옳은 기준을 획일적으로 규정하여 상벌을 두고 백성들로 하여금 위배함이 없도록 세밀히 감찰하고 통제한다는 의미로서의 바름이다.

그러한 ‘바름’은 결국 권력자의 필요나 가치에 따라 규정된 상대적 기준이므로 권력자의 인식이나 욕심에 따라 언제라도 ‘기이한 것’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참됨’ 역시 애초부터 짐짓 꾸민 것이므로 결국은 권력자의 사사로운 목적에 따라 백성을 속여서 부추기며 사지로 내모는 ‘요사함’으로 바뀌게 된다.

한편, 여기서 의도하는 ‘진정한 바름’이란 ‘임금의 참된 덕’을 말한다. 즉, 임금이 백성의 마음으로 내 마음을 삼아 백성을 어린아이처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대하며 그 생각을 일일이 찾아 헤아리고 함께 섞이며 더불어 동화하는 것이다.

人之迷 其日固久: (그렇게) 사람들이 미혹되고 그것이 날로 굳어져 오래되었다. 여기서 ‘人’은 제후諸侯나 귀족 등 지도층 인사를 가리킨다.(제57장 ‘人多伎巧 奇物滋起’에 대한 「하상공장구」 ‘人 謂人君百里諸侯也’ 참고)]

 

시이성인방이불할 염이불귀 직이불사 광이불요

是以聖人方而不割 廉而不劌 直而不肆 光而不燿

그 때문에 성인은 사방을 아울러서 (차별하며) 가름이 없고, (스스로) 청렴하여 (백성을) 상처 냄이 없으며, (그 행실이) 올곧아서 방자하지 않고, (임금의 존엄한 품위는) 빛나되 (그 빛남을 스스로 드러내어 찬란하게) 빛나지 않는다.

[注] 方而不割: (성인은) 사방을 아울러서 (모든 백성을) 차별함이 없다. 성인은 천하의 사방에 있는 백성을 모두 하나같이 품어 안음으로써 모두를 공평하게 대할 뿐 귀천을 갈라 차별하지 않는다.

고대 갑골문에 ‘方’은 사람의 시체를 횡목에 걸쳐놓은 모양이다. 당시에는 이족을 정벌하면 포로로 잡은 적의 우두머리를 죽여 변방의 횡목에 걸쳐두고 이족의 신이나 사악한 영을 물리쳤었는데, 그러한 의례를 ‘方’이라 하였다. 또한 피정복자인 이족의 나라를 ‘方(변방)’이라 불렀으며, 그로부터 방위, 사방, 방정方正 등의 뜻을 가진다.(『한자의 세계(시라카와 시즈카)』 참고)

廉而不劌: (성인은) 소박하고 청렴하므로 많은 재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바 무리한 수탈로 백성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

直而不肆: (성인은) 늘 청정한 정신으로 스스로를 경계하고 절제하며 천연한 그대로 진솔하므로 (그 행실이) 올곧아서 방자하지 않다.

光而不燿: (지도자로서 임금의 존엄한 품위는) 빛나되 (그 빛남을 스스로 드러내어 찬란하게) 빛나지는 않는다.

여기서 ‘光’과 ‘燿’는 모두 ‘빛남’이되 ‘光’은 자체의 존재가치로서 빛남이며, ‘燿’는 스스로 찬란하게 뛰어나는 빛남이다.

 

[章注] 천지자연 같은 천연한 그대로의 참된 덕을 강조하는 제57장의 취지가 본장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원문 其民淳淳은 「하상공장구」에 ‘其民醇醇’으로 되어 있으며, ‘政敎弘大 故民醇醇富厚 相親睦也<정치가 매우 크기 때문에 백성은 순박하고 넉넉하며 서로 친밀하고 화목하다.>’라고 주석한다.

한편, 왕필은 원문 光而不燿에서 ‘以光鑑其所以迷 不以光照求其隱匿也 所謂明道若昧也 此皆崇本以息末 不攻而使復之也<거울로 빛을 쪼여 그 미혹된 까닭을 비추되 감춰둔 것까지 찾아 비추지는 않으니 이른바 ‘밝은 도는 어두운 것 같다’는 것이다. 이는 모두 근본을 귀중히 함으로써 말단을 종식시켜 다그치지 않고 (근본으로) 되돌아가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주석하며 崇本以息末의 논리로 풀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