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도덕경(61장~70장)

노자 도덕경 제62장

나무와 까치 2014. 6. 16. 09:12

제62장. 좌진坐進

 

 

 

도자만물지오 선인지보 불선인지소보

道者萬物之奧 善人之寶 不善人之所保

도는 만물의 깊은 바탕이다. (도는) 선인의 보배요, 불선인이 (얻어서) 보유하는 것이다.

 

- 道者萬物之奧: 도는 만물이 바탕을 둔 심오한 것이다. 도는 만물이 태어난 깊은 속이며, 만물이 다시 의지하여 돌아가는 근본바탕이다.

 

- 善人之寶 不善人之所保: (도는) 선인의 보배요, ‘불선인’이 (얻어서) 보유하는 것이다. 도를 아는 선인에게 도는 가질 수 없으나 친하고, 이롭고, 귀중한 ‘보배’이다. 그러나 참된 도를 알지 못하는 ‘불선인’에게 도는 내가 스스로 가져서 보전하는 것이며, 그로써 자신은 뛰어난 능력의 성스러운 존재인 것이다.

 

- 善人: 『노자』에서 쓰이는 ‘善’은 현대적 의미의 착함 혹은 능숙함, 능통함과는 차이가 있다. ‘善’은 ‘참됨’ 혹은 ‘꾸밈없이 자연스러움’으로 새겨야하며, 이는 천지자연의 천연한 속성으로 어린아이의 천진天眞함에 가깝다. 고대 문자인 금문金文에서 ‘善’은 양을 제물로 하여 하늘에 맹세하며 참되게 진실을 고한다는 의미로서 ‘(하늘에) 참되게 아뢰다.’라는 뜻을 가진다.

‘善人’은 ‘(천연한 그대로의) 참된 사람’이며, 참된 임금 또는 참된 지도자, 참된 인사, 聖人 등으로 새길 수 있다. ‘不善人’은 욕망과 집착으로 참된 본성이 가리어진 ‘참되지 않은 사람’이며, ‘참되지 않은 인사人士’로 새길 수 있다. 여기서는 ‘善人’의 상대어가 ‘惡人’이 아니고 ‘不善人’이라는 점에 유의한다.(善: 제2,8,15,20,27,30,41,49,50,54,58,62,65,66,68,73,79,81장)(제27장 善人ㆍ不善人 및 제15장 善爲士, 제20장 善ㆍ惡 참조)

 

 

미언가이시 존행가이가인 인지불선 하기지유 고입천자 치삼공 수유공벽

美言可以市 尊行可以加人 人之不善 何棄之有 故立天子 置三公 雖有拱璧

이선사마 불여좌진차도

以先駟馬 不如坐進此道

아름다운 말은 (상거래의) 흥정에 가당하고, 존엄한 행동은 (뜻을 같이하는) 사람을 더할만하나 사람이 참되지 못하면 (기존에) 가진 것을 어찌 버리겠는가?

그러므로 천자로 존립하여 삼공을 두며 비록 사마수레에 공벽을 앞세운다 해도 앉아서 이 도를 닦아 나아감만 못하다.

 

- 美言可以市 尊行可以加人: 유려하여 듣기 좋은 말은 (상거래를 위한) 흥정에 적당하고, 존엄한 행동은 그로인한 믿음과 존경으로 뜻을 함께하는 사람을 더할만하다.

 

- 人之不善 何棄之有: 사람의 인성이 참되지 못하면 기존에 이미 가지고 있던 부귀권세의 욕망이나 명예에의 집착, 교만한 성품 같은 것들을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 여기의 ‘人’은 제후나 귀족의 사람을 말한다.

 

- 立天子 置三公 雖有拱璧以先四馬 不如坐進此道: (아름답게 말을 하고 존엄한 행동을 하더라도 기존에 가지고 있던 욕심이나 집착, 교만 같은 것들은 어찌할 수가 없는바) 천자로 존립하여 삼공을 두며 비록 사마수레에 공벽을 앞세운다 해도 (조용히) 앉아서 이 도를 닦아 나아감만 못하다. ‘此道’는 첫머리에서 언급한 ‘萬物之奧 善人之寶의 도’이다.

여기서 삼공은 태사ㆍ태부ㆍ태보의 삼정승을 일컫는다. 삼공을 두고 사마수레에 공벽을 앞세운다는 것은 의식과 제도를 장엄하고 화려하게 함으로써 임금의 존엄과 성스러움을 천하에 과시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옥과 조개껍질은 부정한 기운을 물리친다고 믿어서 먼 길을 떠날 때는 옥구슬을 앞세워 사기를 물리치며 위엄을 드높였다. 여기의 ‘공벽拱璧’은 의례에서 네 마리 말이 이끄는 수레 앞에 임금의 상징으로 앞세우는 옥구슬장식으로 해석된다.

 

 

고지소이귀차도자 하불왈이구득 유죄이면야 고위천하귀

古之所以貴此道者 何不曰以求得 有罪以免耶 故爲天下貴

옛날부터 이 도를 귀중하게 여긴 까닭이, 그로써 (조화로운 천하의 질서를) 구하여 얻으며, (스스로) 허물을 드러냄으로써 (그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때문에 (도가) 천하에 귀중한 것이다.

 

- 何不曰以求得 有罪以免耶: 그로써 (참된 치세를) 구하여 얻으며, (자기스스로의) 문제점을 드러내어 반성함으로써 그로부터 벗어난다고 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여기서 ‘有罪’는 앞 구절의 ‘人之不善’을 가리킨다. 즉, 자신도 몰랐던 자기내면의 깊숙한 곳에 있는 욕심과 집착, 교만 같은 참되지 못한 인성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자기가 지금까지 알지 못하고 지내왔던 不善人으로서의 성품을 도의 밝음으로 통찰하여 바로잡음으로써 그에서 벗어나 善人의 성품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章注] 본장에서는 결국 不善의 지도자가 의당 도와 덕의 상자연함을 본받아야 하는 그 당위성을 말하고 있다.

 

원문 道者萬物之奧에서 ‘하상공’은 ‘奧 藏也 道以萬物之藏 無所不容也<‘오’는 ‘내장內藏’이다. 도는 그렇게 만물의 소장체所藏體이니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주석하며,

원문 不善人之所保에서는 ‘道者 不善人之所保倚也 遭患逢急 猶能知自悔卑柔也<도는 불선인이 가져서 의지하는 것이다. 우환을 만나고 다급함에 봉착하면 스스로 뉘우치며 낮고 유순할 것을 알 수 있는 것과 같다.>’라고 주석하며 선도의 입장으로 풀이한다.

한편, 왕필은 이 부분을 ‘保以全也<지켜가짐으로써 온전하게 된다.>’라고 주석하여 대체로 하상공과 유사하게 풀이하고 있다.

원문 尊行可以加人에서 ‘하상공’은 ‘加 別也 人有尊貴之行 可以別異於凡人 未足以尊道<‘가’는 ‘남다름’이다. 사람(임금)이 존귀한 행동을 하면 보통사람들과 특별히 (품위가) 다를 수 있으나 (그것으로) 도를 받들기엔 부족하다.>’라고 주석하며,

원문 人之不善 何棄之有에서는 ‘人雖不善 當以道化之 蓋三皇之前 無有棄民 德化淳也<사람(임금)이 비록 참되지 못하더라도 마땅히 도로써 변화하는 것이다. 대개 삼황이전에는 버려지는 백성이 없어 덕으로 변화하여 순박하게 되었다.>’라고 주석하여 원문을 ‘임금이 참되지 못하다하여 어찌 가진 것, 즉 백성을 버리겠는가?’라고 주석하는데, 이는 황로학적 입장이다.

여기의 삼황은 상고시대 세 명의 참된 임금을 말하며, 구체적인 인물에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그 중 널리 거론되는 것은 복희ㆍ신농ㆍ황제라는 설(漢族의 입장)이나 그 한편으로는 수인ㆍ복희ㆍ신농의 설도 유력하다.

원문 古之所以貴此道者 何不曰以求得은 「하상공장구」에 古之所以貴此道者 何不日以求得으로 ‘曰’이 ‘日’로 되어 있고, ‘古之所以貴此道者 不日日遠行求索 近得之於身<옛날에 이 도를 귀중하게 여긴 까닭은 날마다 멀리 다니며 찾아 구한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자신에서 얻었음이다.>이라고 주석한다.

한편, 이 부분 「하상공장구」에서 원문 何不日以求得의 ‘日’을 ‘曰’로 하여도 원문과 주석과의 관계나 문맥의 흐름에도 전혀 문제가 없는데 굳이 ‘曰’을 ‘日’로 바꾸어 쓴 것은 그것이 오류이거나 아니면 특히 ‘수신修身’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주석의 내용에 맞추어 원문의 글자를 의도적으로 변형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원문 有罪以免耶 故爲天下貴에서 ‘하상공’은 ‘有罪者 謂遭亂世闇君妄行刑誅 修道則可以解死厄 免於衆邪 道德洞遠 無不覆濟 全身治國 恬然無爲 故可以爲天下貴也<‘유죄’라는 것은 ‘난세의 어두운 군주가 망령되게 행하는 형벌로 죽임을 당함’을 말한다. 도를 닦으면 죽음의 재앙에서 풀려날 수 있고, 뭇 사악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도와 덕은 깊고 멀어서 덮지 못하고 구제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몸을 온전히 하고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평온히 무위하므로 천하의 귀한 것이 될 수 있다.>’라고 하며 유감없이 황로학의 입장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