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도덕경 제81장
제81장. 천지도天之道
신언불미 미언불신 선자불변 변자불선 지자불박 박자부지
信言不美 美言不信 善者不辯 辯者不善 知者不博 博者不知
미더운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미덥지 않다. 참되면 논변하지 않고 논변하면 참되지 않다. (도의 밝음을) 알면 박식하지 않고 박식하면 (도의 밝음을) 알지 못한다.
- 信言不美 美言不信: 미더운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미덥지 못하다. 여기서 아름답다는 것은 결국, 꾸민 아름다움(爲美)을 말한다.
信言不美; 소박하고 겸허하며 진실한 언행은 천지자연의 속성과도 같아서 천연한 그대로 꾸밈이 없고 담담하여 아름답지가 않다. 美言不信; 화려하고 유려한 논리로 아름답게 칭송하는 말은 결국 그 속에 어떤 목적을 둔 사사로운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므로 사악하며 미덥지 못하다.(제78장 正言若反 참고)
- 善者不辯 辯者不善: 상자연한 천지자연처럼 천연한 그대로의 참됨은 굳이 논변하지 않는다. (임금이 말없는 가르침으로 행동하지 않고) 굳이 논변하여 장황하게 설명한다는 것은 이미 거기에 무언가 사사로운 의도를 깔고 있는 것이므로 참되지 않다.
고대 금문金文에서 ‘善’은 양을 제물로 하늘에 맹세하며 참되게 진실을 고한다는 의미의 글자이며, ‘천연한 그대로의 참됨’이라 새길 수 있다.
- 知者不博 博者不知: (도의 밝음을) 알면 박식하지 않고 박식하면 (도의 밝음을) 알지 못한다. 여기서 ‘博’은 ‘박식’이며, 학식이나 문리文理적 사변, 형이상학적 추론 등 상대적 분별의 지식을 일컫는다.
도의 실질이나 도의 밝음은 오직 청정한 정신을 바탕으로 한 물아일체의 입장에서만 통찰할 수 있는 것이며, 학식이나 문리文理적 사변 등 상대적 분별의 지식으로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물을 상대적 관점에서 인식하는 박식함은 자기스스로 물아일체의 청정한 본성으로 돌아가는데 있어서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므로, 만약 박식함을 과시한다면 이는 도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제56장 知者不言 言者不知 참고)
성인부적 기이위인 기유유 기이여인 기유다
聖人不積 旣以爲人 己愈有 旣以與人 己愈多
성인은 (재물이나 공명을) 쌓아두지 않는다. 그로써 이미 (은미하게) 남을 위하므로 자기의 즐거움이 있으며, 그로써 이미 (모든) 사람과 함께 (향유)하는 것이므로 자기의 즐거움이 많다.
- 聖人不積 旣以爲人 己愈有 旣以與人 己愈多: 성인은 재물이나 공명을 쌓아두지 않음으로써 스스로를 경계하면서 이미 (은미하게) 남을 배려하고 있는바 자기의 유쾌愉快함이 있는 것이다. 또한, 그로써 재물이나 공명 등이 백성들에게 골고루 돌아가는바 이는 이미 모두가 함께 향유하는 것이므로 자기의 유쾌함이 많다.
여기서 ‘愈’는 본래 몸의 곪은 부분에서 피고름을 제거한 뒤의 개운함을 뜻하는 글자이다. ‘己’는 외형적으로 타인과 구별되는 존재로서 ‘자기’ 혹은 ‘그’가 된다.
천지도리이불해 성인지도위이부쟁
天之道利而不害 聖人之道爲而不爭
하늘의 도는 이롭되 해롭지 않고, 성인의 도는 위하되 (천하가) 다투지 않는다.
- 天之道ㆍ聖人之道: 여기서 ‘天之道’는 ‘大道’와 마찬가지로 ‘우주대자연의 섭리 같은, 상자연한 도’를 일컫는다. ‘聖人之道’는 하늘의 도를 사람이 그대로 좇아 이행하는 것이며, 곧 上德을 일컫는다.(天之道: 제9,47,73,77,79, 81장)(大道: 제18,34,53장)
- 爲: ‘爲’는 ‘위함’이다. ‘爲’는 남을 위한다는 것이며, 이는 결국 남을 위해 줌으로써 그것이 재물이나 명예, 충성심 등으로 나에게 되돌아올 것이라는 기대심리가 그 바탕에 작용하는 ‘有爲’ 혹은 ‘人爲’가 된다.
그러나 성인은 상자연한 도의 밝음을 본받아 천연한 그대로 은미하게 드러남이 없이 만물을 無爲로 위한다. 그렇게 사사로움이 없이 무위로 위하므로 천하가 부귀권세나 명예를 두고 다투지 않는다.
[章注] 원문 旣以爲人 己愈有에서 ‘하상공’은 ‘旣以爲人施設德化 己愈有德<이미 사람을 위하여 덕화(덕행으로 교화함)를 베풀므로 자기에게 유덕함이 뛰어나다.>’이라 주석하고;
원문 旣以與人 己愈多에서는 ‘旣以財賄布施與人 而財益多 如日月之光 無有盡時<이미 사람들에게 재물과 선물을 널리 베풀어주나 재물은 더욱 많아지는데, 이는 마치 해와 달의 빛이 다할 때가 없는 것과 같다.>’라고 하며 황로학의 입장으로 풀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