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통석(제물론 3)

장자 제물론 3

나무와 까치 2016. 3. 13. 14:59

[齊物論]

<萬物齊同論. 세상 만물은 모두 같이 (하나로) 고르다는 논설>

 

 

 

<제2-1절>

齧缺問乎王倪曰 ‘知物之所同乎’ 曰 ‘惡乎知之’ ‘之所不知邪’ 曰‘惡乎知之’ ‘然則物無知邪’ 曰 ‘惡乎知之 雖然嘗試言之 庸詎知吾所謂知之非不知邪 庸詎知所謂不知之非知邪

설결이 왕예에게 여쭈어 말했다. “스승님은 만물에 있어서 (그) 실질 동등하다는 것을 아십니까?” 왕예가 말하길, “내가 어찌 그것을 알겠는가?” (그러자 설결이) “(그러면) 스승님은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십니까?” (왕예가) 말했다. “내가 어찌 그것을 알겠는가?” (설결이) “그러면 만물에 대해 앎이 없다는 것입니까?” (왕예가) 말하길, “내가 어찌 그것을 알겠는가? 그렇다만 시험 삼아 말해보겠다. (나는) 용庸(도의 천연함)에 의거해보아, ‘내가 안다고 일컬은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님을 알며, (또) 용庸(도의 천연함)에 의거하 ‘내가 알지 못한다고 일컬은 것’은 아는 것이 아님을 안다.

 

[注] 齧缺ㆍ王倪: ‘설결’은 ‘(그릇 등의) 이가 빠진’, ‘왕예’는 ‘최상의 경지’ 정도의 어감이다. 뒤의 3-6절에 나오는 ‘天倪’는 ‘하늘의 아이’로서 곧 ‘하늘의 조화造化(天命)에 의한 만물의 생성生成’을 의미하는데, 그와 관련하여 본다면 여기의 ‘王倪’는 만물 중의 왕이란 의미가 된다.

왕예와 설결은 문맥상 서로 사제관계로 나타나며 임의로 설정된 이름에서도 사제 간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천지’편(제5절)에는 ‘堯之師曰許由 許由之師曰齧缺 齧缺之師曰王倪 王倪之師曰被衣’라고 사제지간의 계보가 언급되며, 설결이 왕예에게 4번 물었으나 4번 다 모른다고 하는 말이 ‘응제왕’편(제1절)에도 나온다.

子知物之所同是乎: 고대의 갑골문ㆍ금문 등에 보면 ‘子’는 상商왕조의 무정武丁 때 아我ㆍ여余 등과 함께 왕자의 호칭으로 사용되었던 글자로서 이후 스승 등 남자에 대한 경칭으로 사용된다. ‘是’는 여기서 ‘실질’ 혹은 ‘본질’로 새긴다.

庸詎知吾所謂知之非不知邪: (나는) 庸에 의거하 ‘내가 안다고 일컬은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내가 안다고 일컬은 것은 상대적 주관적 관점이 아니라 도의 천연함에 비추어 사물의 근본을 직시함으로써 아는 것인바 실제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여기는 게 아니라 그 실질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말로 일컬어 전달하는 것은 주관적이고,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상대적인 관점일 수밖에 없으므로 말로써는 어떤 사물의 실질을 있는 그대로 나타낼 수 없는바 도의 천연함에 의거하여 사물을 관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변론으로는 문제의 실질을 완전하게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庸詎知’는 용庸에 의거하여 알다. ‘庸’은 ‘(도의) 천연한 그대로의 작용’ 혹은 ‘도의 근본인 천연한 그대로의 자연스러움’으로, ‘詎’는 ‘의거하다(據)’로 새긴다.<‘대종사’편(제1-1절, 제6-2절) ‘庸詎知’ 및 ‘인간세’편(제1-7절) ‘庸詎可’ 참고>]

 

 

<제2-2절>

嘗試問乎 民溼寢則腰疾偏死 鰌然乎哉 木處則惴慄恂懼 猨猴然乎哉 三孰知正處 食芻豢 麋鹿食 蝍蛆甘帶 鴟鴉耆鼠 四孰知正味 猨猵狙以爲雌 麋與鹿交 鰌與魚游 毛嬙麗姬 之所美也 魚見之深入 鳥見之高飛 麋鹿見之決驟 四孰知天下之正色哉 自我觀之 仁義之端 是非之塗 樊然殽亂 惡能知其辯’

그러면 (어디) 내가 시험 삼아 너에게 묻겠다. 백성들이 습한데서 잠을 자면 허리에 병이 생겨 반신불수로 죽지만 미꾸라지가 그렇던가? (백성들이) 나무위에 있게 되면 벌벌 떨고 공포에 두려워(췌율준구)하지만 원숭이가 그렇던가? (이) 셋은 (과연) 어느 것이 올바른 거처를 알고 있는가?

백성들은 가축을 먹고 고라니와 사슴은 풀을 먹으며 지네는 뱀을 달게 여기고 올빼미와 갈까마귀는 쥐를 즐긴다. (이) 넷은 (과연) 어느 것이 올바른 맛을 아는가?

원숭이는 편저(원숭이의 한 종류)를 짝으로 하고, 고라니는 사슴과 교배하며, 미꾸라지와 물고기는 함께 어울려 헤엄친다. 모장과 여희는 사람에게 아름다운 것이나 물고기가 보면 물속으로 깊이 들어가 버리고, 새가 보면 높이 날아가며, 고라니나 사슴이 보면 결단코 달아난다. (이) 넷은 (과연) 어느 것이 천하의 올바른 미색을 아는 것인가?

내가 스스로 관찰해보건대 인의라는 말단과 시비라는 덧칠로 (사람들이 스스로) 울타리를 치고 (시비와 이해로 서로) 뒤섞여 어지러운데 내가 어찌 그러한 변론을 알 수 있겠는가?” (결국 그런 것은 庸詎知, 즉 도의 근본인 천연한 그대로의 작용에 비추어 알 뿐이다.)

 

[注] 民: ‘民’은 ‘백성’으로 새길 수 있다. 고대 금문에 ‘民’은 시력을 빼앗긴 사람을 표현한 모양의 글자인데, 정복자의 입장에서 볼 때 자기 씨족과 종속관계에 있는 ‘이족의 사람’ 곧 피정복 인을 뜻하는 말이다. 이들은 여러 변방의 다양한 백성百姓으로서 처음엔 ‘人’과 종속관계의 하등신분이었다가 씨족적 질서가 대중화되면서 점차 평민화한 것으로 보인다.

상商(은殷)나라 때의 갑골문에 ‘人’은 사람의 옆모습을 형상한 것이다. ‘人’은 본래 씨족의 공동체를 함께 구성하는 집단 내부의 사람인데, 이후 집단의 세력이 커지고 규모가 조직화되면서 民과 구별되는 제후나 귀족 등을 의미하게 된다.

한편, 주周나라 초기 금문에 나오는 ‘人’은 제사에 희생물로 바쳐지는 노예를 의미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멸망해가는 상나라의 사람을 포로로 붙잡아 神에게 제물로 바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한자의 세계(시라카와 시즈카)』 참고)

毛嬙ㆍ麗姬: 모장은 월왕越王의 미희 또는 춘추시대 송宋나라 평공平公의 부인이라고 하며, 여희는 춘추시대 진晉나라 헌공獻公의 부인임. 모두 고대의 미인으로 유명하다.

仁義之端: 인의라는 말단. 즉, 만물에 있어서 천연한 그대로의 자연스러움이 그 근본이라면 형식과 의례로 장식된 인의는 그 말단에 불과하다.

樊然殽亂: (겉으로는 형식을 정하여 그와 다름을 배격함으로써) 울타리를 두르고 (그 안은 시비와 이해로 서로가) 뒤섞여 어지럽다.

我ㆍ吾: ‘我’는 자아의 정체성과 관련한 ‘나’이며, ‘吾’는 대외적인 입장에서의 ‘나’이다.(3-4절 我ㆍ吾 참고)

吾惡能知其辯: 내가 어찌 그러한 변론을 알 수 있겠는가? ‘其辯’은 앞 절에서 설결이 왕예에게 물은 3가지 질문에 대한 통념적 변론을 말한다.

즉, 왕예는 사람과 미꾸라지, 원숭이, 고라니, 사슴, 지네, 올빼미, 갈까마귀 그리고 모장과 여희를 예로 들면서 만물은 저마다 주거의 형태가 다르고 음식에 대한 취향과 맛이 다르며 삶의 방식과 가치, 시야가 제각각인바 어찌 그것을 다 알고 일일이 변론할 수 있겠는가 라며 되묻고 있는 것이다.

그처럼 용庸에 의거한 앎이 아닌, 주관적이며 상대적인 세간의 통념으로 옳고 그름을 구분하여 변론한다는 것은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킬 뿐 절대로 참됨을 밝힐 수 없는 것이다.

 

 

<제2-3절>

齧缺曰 ‘不知利害至人固不知利害乎’ 王倪曰 ‘至人神矣 大澤焚而不能 河漢沍而不能寒 疾雷破山 風振海而不能驚 若然 乘雲氣 騎日月 而遊乎四海之外 死生无變於 而況利害之端乎’

설결이 말하길, “스승님은 ‘이롭고 해로움’을 알지 못하시는데, 본래 지인은 ‘이해’를 알지 못하는가요?” 왕예가 말했다. “지인은 신묘한바 큰 못 전체를 불사르더라도 뜨겁게 할 수 없으며, 황하와 한수가 얼어붙어도 추위를 느끼도록 할 수 없다. 심한 우레가 산을 깨트리고 바람이 바다를 온통 뒤흔들어도 놀라게 할 수가 없다.

만약 (온 세상이) 그러하다면 (지인은) 구름의 기운을 타고 해와 달에 걸터앉아 사해(세상)의 밖에서 (즐거이) 노닌다. 자기에게 (이미) 죽고 삶 자체가 (전혀) 변하는 것이 없는데, 하물며 ‘이해’라는 말단이겠는가?”

 

[注] 至人神矣: 지인(정신이) 신묘하다. 본래 ‘神’은 ‘도道’가 사람이나 귀신, 천제天帝 등에게 품부한 원기元氣로서 ‘천연한 정신’을 말한다. 즉, ‘神’은 맑고 순수한 천연그대로의 정신을 말하며 여기서는 (그러한 정신의) 신묘함 혹은 신명함, 신령함을 뜻한다.

왕예는 여기서 至人으로 불리는데 그렇다면 왕예의 스승인 피의被衣는 眞人이 된다. 그리고 ‘피의’는 결국 다른 이름으로 암시한 장자 자신일 수도 있다.(‘소요유’편 제1-5절 至人ㆍ神人ㆍ聖人 및 ‘대종사’편 제1절 ‘眞人’ 참고)]

 

 

<제3-1절>

瞿鵲子問乎長梧子曰 ‘聞諸夫子 聖人不從事於務 不就利 不違害 不喜求 不緣道 謂有謂 有謂謂 而遊乎塵垢之外 夫子以爲孟浪之言 而以爲妙道之行也 吾子以爲奚若’ 長梧子曰 ‘黃帝之所聽熒也 而丘也何足以知之 且大早計 見卵而求時夜 見彈而求鴞炙 予嘗妄言之 以妄聽之 奚 旁日月 挾宇宙 爲其脗合 置其滑涽 以隸相尊 眾人役役 聖人愚芚 參萬歲而一成純 萬物盡然 而以相蘊

구작자가 장오자에게 물어 말했다.(즉, 경계심이 많은 까치가 큰 오동나무에 앉아 나무에게 물었다.) “스승님에게 들은 것인데, ‘성인은 정사를 받듦에 굳이 애써 하지 않는다. (사사로이) 이득을 좆아 나서지 않고, (참된 일에) 해로움을 회피하지 않으며, (명성을) 추구함을 좋아하지 않고, (짐짓 자신이) 도에 연유함을 내세우지 않는다. (말로) 일컬음이 없이 (참됨을) 일컫고, (을) 일컬으면서도 (사사로움을) 일컬음이 없이 진구(곧, 세속)의 밖에서 노닌다.’고 합니다. (지금 나의 이 말이) 스승님께는 맹랑지언이 되겠으나 내게는 (그것이) 신묘한 도행으로 여겨집니다. (여기) 우리 선생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장오자가 말했다. “이러한 이야기는 황제黃帝가 들어도 (석연치 못하여 희미한) 개똥벌레 빛인데, (당신 스승인) 공구가 어찌 그것을 충분히 다 알겠소. 그리고 당신 또한 대단히 조급한 계측인, 계란을 보면서 (닭이 알리는) 밤 시간을 묻고 (쇠뇌의) 탄환을 보며 올빼미구이를 얻으려하오. 내 어디 한번 당신을 위해 허망한 말을 해보겠소. 당신도 허망한 것으로 알고 들어보시오.

(그것이) 무엇이냐? 해와 달을 곁에 두고, 우주를 껴안아 그것(영원무궁한 시공간)과 (나 자신이) 문합하는 것이오. (그리고) 명확하지 않은 흐릿함을 (구분함이 없는 그대로) 놓아두고 (스스로를 낮추어) 비천함으로써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오.

뭇 사람이 다들 (많은 것을 얻고자) 쉼 없이 일하나 성인은 우둔하여 만세를 (세속에) 간여하더라도 오직 하나 (자연그대로의) 순수함만을 이루는데, 이로써 세상의 만물은 (천수天壽를) 다하도록 서로를 (긍정하고) 용납하는 것이오.

 

[注] 瞿鵲子問乎長梧子曰: 구작자가 장오자에게 물어 말했다. 구작자와 장오자는 모두 가공의 인물로 이해되는데, 자의를 그대로 읽으면 구작자는 경계심 많은 까치로서 문맥상 공자의 제자로, 장오자는 큰 오동나무로서 수도인 정도의 어감이다. 장자의 의도가 결국 우화적 풍자이고 등장인물들 또한 그에 따른 가공의 인물이라면 ‘경계심 많은 까치가 큰 오동나무에 앉아 나무에게 물었다.’라고 옮기는 것이 그 저술의도에 자연스러울 것이다.

聖人不從事於務: 여기서 ‘聖人’은 ‘참된 지도자’를 말하는데, 『장자』에서 ‘성인’은 상당부분 일반의 개인으로서 참된 사람을 의미하고 있음에 유의한다. 한편, 『노자』에서 ‘성인’은 성군, 곧 ‘참된 임금’ 혹은 ‘참된 지도자’를 뜻한다.

孟浪之言: 물결이 부딪쳐 흩어지듯 허황되고 실없는 말을 뜻하며, ‘허무맹랑한 말’로 새길 수 있다.

吾子以爲奚若: 여기 ‘吾子’는 ‘(여기의) 우리 선생님’ 혹은 ‘거기 선생님’ 정도의 친근하면서 대등한 어감이다(‘천운’편 제5-3절 ‘吾子’ 및 본편 3-4절 我ㆍ吾 참고). 한편, ‘予(나 여)’ 및 ‘女ㆍ汝(너 여)’는 손아래 사람이나 사사로이 친근한 관계에서 쓰인다.

黃帝: 중국 상고시대 한 부족의 수령이자 전설상의 임금이며 한漢민족의 선조다. 본래 성은 공손公孫 또는 희姬이며 헌원軒轅이란 언덕에서 살았기 때문에 헌원씨라고 한다. 또한 유웅有熊 부족(지금의 하남성 신정현新鄭縣 일대)에 속했기 때문에 유웅씨라고도 불렀다. 그는 수레와 배, 궁실, 문자, 음률, 역법, 관직 등을 창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왕세기帝王世紀』에 ‘황제는 수구壽丘에서 태어나 희수姬水에서 자랐는데 이 때문에 희를 성으로 삼았다. 여러 기록들이 황제를 희씨로 보고 있으며, 헌원이란 언덕에서 살았기 때문에 헌원을 이름으로 삼아 불렀다’고 하였다.

『사기史記』에는 황제가 100년 간 재위하였으며, 그 뒤에 수양산首陽山으로 가서 구리를 캐어 보정寶鼎을 주조한 뒤에 용을 타고 승천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丘也: ‘丘’는 공자의 이름인데, 여기서는 ‘孔丘’를 의미하고 있다.

旁日月 挾宇宙 爲其脗合: ‘문합’은 하나로 꼭 맞음이다. 해와 달의 (영원한) 시간 그리고 하늘과 땅의 (광대무변한) 공간, 즉 영원무궁한 시공간이 나 자신의 천연한 정신과 하나로 합치함을 말한다.

置其滑涽: ‘滑’은 미끈거리며 안정되지 않음이고, ‘涽’은 (생각 등이) 흐릿함이다. ‘滑涽’은 ‘명확하지 않은 흐릿함’으로 새길 수 있으며, ‘置其滑涽’은 ‘불명확한 흐릿함을 (굳이 구분함이 없이 그 상태 그대로) 놓아두다’가 된다. 본편 1-15절 ‘滑疑之耀’ 참조]

 

 

<제3-2절>

惡乎知說生之非惑邪 惡乎知惡死之非弱喪而不知歸邪 麗之姬 艾封之子也 晉國之始得之也 涕泣沾襟 及其至於王所 與王同筐床食芻豢 而後悔其泣也 惡乎知夫死不悔其始之蘄生

삶을 기뻐하는 그것이 미혹됨이 아닌지를 어찌 알겠소. (죽음이란 본래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인데,) 죽음을 싫어하는 게 어려서 고향을 잃어 돌아갈 곳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닌지 어찌 알겠소. 여희는 여융국 ‘애’라는 변방의 관문지기 딸인데, 진나라에 (임금이) 처음 (그녀를) 데려왔을 때 눈물을 흘리며 옷깃을 적셨지요. (그러나) 왕의 처소에서 왕과 함께 동침하며 고기와 기름진 음식을 먹음에 이르러서는 눈물을 흘리며 울었던 것을 후회했다고 하오. (마찬가지로) 죽음에 있어 처음에 (죽기 싫어) 삶을 기구祈求하였던 것을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건지 어찌 알겠소.

 

[注] 麗之姬: 麗姬는 춘추시대 진晉나라 헌공獻公 때 여융국麗戎國의 미녀로서 여융의 변방 의 관문지기 딸이다.]

 

 

<제3-3절>

夢飲酒 旦而哭泣 夢哭泣 旦而田獵 方其夢也 不知其夢也 夢之中又占其夢焉 覺而後知其夢也 且有大覺而後知其大夢也 而愚以爲覺 竊竊然知之 君乎牧乎固哉 丘也與皆夢也 夢亦夢也 其言也 其弔詭 萬世之後 而一遇大聖 知其解 旦暮遇之也

(즐겁게) 술을 마시는 꿈을 꾸다가 아침이 되어서는 통곡하며 울고, 통곡을 하며 우는 꿈을 꾸다가 아침이 되어서는 (기분 좋게) 사냥을 하오. 꿈속에 있을 때는 그것이 꿈인 줄 모르고 꿈을 꾸는 중에 또 그 꿈을 점쳐(해석해)보기도 하는데, 잠이 깨고 나서야 그것이 꿈인 줄을 아오. (그렇듯) 장차 큰 깨우침이 있고 난 후에라야 (현실의) 이것이 커다란 꿈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오.

그런데 (그것을 모르는) 어리석은 것이 자기 스스로 깨우쳤다며 (남의 것을) 절취하여 아는 체하며, 임금이라고 치받들고 천한 목동이라고 백안시하니 (참으로) 고루하도다! (그것이 한낱 꿈인 것을..) 공구나 당신은 함께 모두 꿈을 꾸고 있는 것이오. (지금) 가 일컬어 당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하는 것 역시 꿈이오.

이렇듯 말이란 것은 그 이름(이르다)이 (본래의 뜻과) 어긋나게 되니 만세가 지난 후에 대성인을 한번 만나 그 해석을 (들음으로써 그 참된 뜻을) 안다면 그것은 아침저녁으로 만나는 것(만큼 자주 만나는 것)이 되오. (그만큼 그런 대성인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오.)

 

[注] 方其夢也: ‘方’은 ‘어느 한 쪽(一方)’의 뜻으로 여기서는 ‘꿈속에 있을 때’를 말한다.

而愚者自以爲覺: 그러나 (그런 것을 모르는) 어리석은 어떤 것이 자기가 깨달은 것으로 행세한다. ‘者’는 옥편에 ‘어조사 자, 놈 자, 것 자, 이 자’ 등으로 나와 있으며, 주로 ‘~은(는)’, ‘~면’, ‘~것’ 등의 의미로 쓰인다. 여기서 ‘者’는 사실상 사람을 지칭하고는 있으나 만물 중의 하나를 뜻하는 ‘어떤 것’ 정도의 의미이거나 혹은 그 정도로 사람을 비하한 의미로 쓰였다. ‘者’는 본래 ‘가리어 숨기다.’, ‘덮는다.’는 의미의 글자로서 사람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者’는 고대 금문金文에서 ‘왈曰(신에게 축원하는 말인 축고祝告의 문서를 넣어둔 용기)’ 위에 ‘(무엇을 가리어 숨기는) 무성한 수풀’의 모양을 더한 글자이다.

고대에는 이족의 신이나 악귀 등에 대하여 저주詛呪나 주술呪術을 행하는 일들이 상당히 보편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者’는 그렇게 주술을 행한 축문을 나무로 무성하게 울타리를 둘러 숨긴다는 의미의 글자인데, 그 대상을 저주한 축고의 문서인 ‘가리어 숨겨둔 어떤 것’이 ‘者’의 본뜻인 것이다.(『한자의 세계(시라카와 시즈카)』 참고)

저주나 주술의 대상은 이족(적)의 장수나 우두머리가 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사람을 지칭하는 의미로도 쓰이게 되는데, 그런 경우 ‘사악한 적’ 또는 ‘이족 포로’, ‘노예’ 정도의 뜻이 된다. 그 옛날에 ‘민民(백성)’은 정벌하여 복속시킨 ‘이족의 사람’을 의미했다.(‘者’의 이러한 용례는 『노자』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是其言也 其名爲弔詭: 이렇듯 그 말이란 것은 그 이르는 것이 (본래의 뜻과) 어긋나게 되다. 여기서 ‘名’은 ‘이르다’의 명사형 ‘이름’으로 쓰다(1-13절 ‘名’ 참고). ‘弔詭’는 ‘적궤’로 읽으며 ‘어긋나게 되다’로 새긴다.]

 

 

<제3-4절>

既使我 我也邪 若 若也邪 其或也 其或也邪 其俱也 其俱也邪 我與若不能相知也 則其黮闇 使正之

이제, 내가 그대와 더불어 변론하여 그대를 이기고 그대를 이기지 못한다면 그대는 과연 옳고 가 과연 틀린 건가요? 내가 그대를 이기고 그대는 나를 이기지 못했다면 나는 과연 옳고 그대가 틀린 걸까요?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틀린가요? 둘 다 옳고 둘 다 틀린가요?

나와 그대는 (서로 상대적으로 인식함으로써) 서로를 알 수가 없소. 만일 (나와 그대는) 사람됨이 본래 (하늘로부터) 검고 어두움(곧 우매한 기운)을 부여받았다면 우리는 누구로 하여금 올바름을 판단토록 하겠소?

 

[注] 既使我與若辯矣: 여기서 ‘既’는 ‘이제 가령’ 혹은 ‘만약’의 뜻으로서 같은 문장의 ‘我與若(나와 그대)’의 ‘若’과 구분하기 위한 용어로 이해된다.(『古書虛字集釋』의 ‘既’ 참고)

使我與若辯矣: 나로 하여금 스스로(즉, 내가) 그대와 더불어 변론하다. 여기서 ‘내가 변론한다.’라고 할 것을 ‘나로 하여금 변론하게 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나를 생성한 어떤 존재’에 대하여 삼가 허락을 구하고 의견을 말한다는 입장의 표현이다.

我ㆍ吾: ’는 옥편에 ‘나 오’, ‘그대 오’, ‘글 읽는 소리 오’ 등으로 나와 있고, 『설문해자』에 ‘吾’는 ‘口(구)’+‘五(오)’로 된 글자로서 ‘口’는 뜻을, ‘五’는 소리를 나타낸다고 하며 ‘我(나)를 스스로 칭함이다’라고 하였다.

한편, 갑골문ㆍ금문에서 ‘吾’는 ‘口(신에 대한 축고祝告의 용기)’ 위에 ‘五(하늘에서 내려오는 신의 기운 혹은 신의 모습)’를 올려놓은 모양이다. 이는 ‘신의 뜻을 맞아 받들고 있는 상황’으로서, 그로부터 ‘(상대방에 대하여) 삼가는 나’로 인신引伸 혹은 가차假借된 것이라 이해된다.(『한자의 세계(시라카와 시즈카)』 참고)

실제로 ‘吾’는 대외적으로 자신을 삼가면서 상대방을 존대하는 의미의 ‘나’로 쓰이고 있음을 현존하는 고전의 다양한 구절에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그처럼 ‘吾’는 자기를 낮추면서 상대방을 대접하여 ‘나’를 칭하는 것이 본래의 쓰임인데, 가족이나 특정 집단 등 몇 명의 무리를 대표하여 대외적으로 ‘나’를 칭할 때 ‘우리’가 된다. 또한, 동질감과 친근감을 표시하며 나와 대화상대자를 함께 ‘우리(吾)’라 칭하여 ‘나(자기 스스로에 대한 지칭)’를 대신하거나 그런 방식으로 대화상대자를 높여 ‘그대(You)’의 뜻을 대신하기도 하는데, 러한 용례를 『노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노자』 제49장 및 제74장 참고)

따라서 ‘吾’라는 말에는 기본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자신을 삼가는 의미가 내포되는데, 현재의 우리말에도 우리 집, 우리 아버지, 우리 선생님 등으로 그 영향이 남아있다.(‘인간세’ 편 제3-1절 ‘吾國ㆍ吾身’ 참고)

한편, ‘아’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자신’의 정신적 내면 구성하는 ‘자아自我의 정체’로서 ‘나’를 말한다<『설문해자』중 ‘我, 施身自謂也(‘我’는 시행하는 몸을 스스로 일컬음이다.)’ 및 갑골문ㆍ금문의 ‘我(‘我’는 제사에 희생으로 쓰이는 양을 손질하는 톱니모양의 절단도구의 형태이며, 지금의 ‘我’는 그로부터 가차假借된 것으로 본다)’ 참고>.

이에 대해 ‘기’는 외형적으로 일정한 형태를 가짐으로써 타인과 구별되는 ‘자기’로서 ‘나’ 혹은 ‘그’가 된다. 또 ‘자’는 코로 숨을 쉬며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생활 주체로서 ‘자신’이며 몸의 생리적 작용으로서 의미가 강하다. ‘신’은 몸을 펴고 구부리며 물리적으로 작용하는 ‘자신’으로서 몸의 외형적인 기능의 의미가 강하다.(『설문해자 주(단옥재)』 참고)]

또한, ‘子’는 상商왕조의 무정武丁 때 아我ㆍ여余 등과 함께 왕자의 호칭으로 사용되었던 글자이다.]

 

 

<제3-5절>

使同乎正之 既與同矣 惡能正之 使同乎正之 既同乎矣 惡能正之 使異乎我與若正之 既異乎我與若矣 惡能正之 使同乎我與若正之 既同乎我與若矣 惡能正之 然則俱不能相知也 而待也邪

그대와 입장이 같은 사람으로 하여금 올바름을 판단토록 한다면 이미 그대의 뜻과 같으니 어찌 올바를 수 있겠소. 와 입장이 같은 사람으로 하여금 올바름을 판단하도록 한다면 이미 나의 뜻과 같으니 어찌 올바를 수 있겠소.

나나 그대와 입장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올바름을 판단하도록 한다면 이미 나와 그대의 뜻과 다르니 어찌 올바를 수 있겠소. 나와 그대와 입장이 같은 사람으로 하여금 올바름을 판단하도록 한다면 이미 나와 그대의 뜻과 같으니 어찌 올바를 수 있겠소.

그렇게 나와 그대 그리고 (제3의) 다른 사람 모두가 (주관적 입장으로 인해) 서로를 알 수가 없으니, 그렇다면 (그 외 어떤) 저것에 기댈 것이오?

 

[注] 使同乎若者正之: ‘者’는 옥편에 ‘어조사 자, 놈 자, 것 자, 이 자’ 등으로 나와 있으며, 주로 ‘~은(는)’, ‘~면’, ‘~것’ 등의 의미로 쓰인다. 여기서 ‘者’는 사실상 사람을 지칭하고는 있으나 만물 중의 하나를 뜻하는 ‘어떤 것’ 정도의 의미로 쓰였다.(본편 3-3절 ‘者’ 참고)

而待彼也邪: ‘待’는 ‘기대하여 기다리다’이며, 여기서는 ‘기대다’ 혹은 ‘의지하다’로 새긴다. ‘彼’는 나와 그대 그리고 다른 사람이 아닌 그 외의 ‘어떤 기준이나 사례’를 한다.]

 

 

<제3-6절>

化聲之相待 若其不相待 和之以天倪 因之以曼衍 所以窮年也 謂和之以天倪 曰 是不是然不然 是若果是也 則是之異乎不是也亦無辯 然若果然也 則然之異乎不然也亦忘年忘義 振於無竟 故寓諸無竟

(만물이 각자) 분화한 소리를 내면서 (근본적으로) 서로 기대는 그것이 서로 기대지 않는 것 같은 것은 (만물은) 천예로써 조화하고 무궁한 변화에 기인하여 한평생을 (그렇게) 다하는 때문이오.

천예로써 조화한다는 것은 무엇을 일컫는가? (그것은) 말하자면, 이러함과 이러하지 않음, 그러함과 그러하지 않음이 있을 때 (그) 이러함이 만약 과연 (실제로) 이러하더라도 (그) 이러함이 이러하지 않음과 다르다는 것을 역시 (스스로) 변론함이 없고, (또) 그러함이 만약 과연 (실제로) 그러하더라도 (그) 그러함은 그러하지 않음과 다르다는 겻을 역시 (스스로) 변론함이 없소. (즉, 스스로를 변론함이 없이, 생성된 자기의 본래모습 그대로 각자 천연하게 있을 뿐이오.)

(천예로써의 조화를 알게 되면 아무 것도 가짐이 없이 생사조차 무심하므로) 세월을 잊고 의리를 잊은 채 (마음을 텅 비우고) 무無의 경지에서 (스스로) 떨쳐나오. 그래서 (至人은) 모든 것을 무無의 경지에 맡겨두는 것이오.’

 

[注] 化聲之相待 若其不相待 和之以天倪 因之以曼衍 所以窮年也: 여기의 5구 25자가 본 절 ‘則然之異乎不然也亦無辯’의 다음에 온다는 설도 있으나 문맥상 어색하다. 여기서는 여길보呂吉甫 등의 의견과 같이 한다.

化聲: ‘화성’이란 ‘분화한 소리’이다. 이는 본편 1-2절에 나오는 ‘온갖 구멍이 내는 소리’이며, 곧 하나의 근본에서 분화되어 물화한 세상만물이 내는 소리이다.

和之以天倪: (천하 만물은) 천예로써 조화調和하다. ‘天倪’는 직역으로 ‘하늘의 아이’이며, 곧 ‘하늘의 조화造化로 인한 만물의 생성生成’을 의미한다.(‘인간세’편 제1-10절 ‘是萬物之化也’ 및 ‘우언寓言’편 제2절 ‘天倪者 天鈞也’, 『노자』 제42장 ‘沖氣以爲和’ 참고)

曼衍: ‘曼衍’은 자의가 ‘널리 퍼지다’로서 만물이 분화하여 살아감에 있어서의 무궁한 변화의미한다.

是不是然不然: 여기서 ‘’는 ‘이러함’으로서 ‘어떠한 실질’을, ‘不是’는 ‘이러하지 않음’으로서 ‘실질이 아님’을 의미한다.(본편 1-16절 ‘是’ 참고)

寓諸無竟: 여기의 ‘無’는 모든 사사로운 감정과 욕망에서 자유로운 ‘허무虛無’를 뜻하며, ‘無竟’은 그러한 ‘허무의 경지’가 된다. 한편, 『노자』에서 ‘無’는 ‘도의 근본바탕’을 뜻한다(『노자』 제14장 ‘復歸於無物’ 및 道紀’ 참고). ‘諸’는 ‘~에(於)’로 읽을 수도 있으나 여기서는 ‘모두’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다.]

 

 

<제4절>

罔兩問景曰 ‘曩子行 今子止 曩子坐 今子起 何其無特操與’ 景曰 ‘有待而然者邪 所待又有待而然者邪 吾待蛇蚹蜩翼邪 惡識所以然 惡識所以不然’

그림자가 (서로 함께하는) 두 짝으로서 형形象에게 묻는다. “접때는 선생이 걸어가더니 이번에는 멈추고, 접때는 앉더니 이번엔 일어서고 하는 것이 (마냥 수동적으로 따를 뿐) 어찌 특별한 절조가 없는가요?”

형상이 이르길, “(그건) 내가 기대는 것(나를 움직이게 하는 어떤 주체 곧 몸체)이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인데, 내가 기대는 그것은 또 기대는 것(또 다른 주체, 곧 마음)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오. (결국) 나는 뱀의 비늘(허물)이나 매미의 날개(허물)에 기대고 있는데, 그러한 까닭을 어떻게 인식하며 (또) 그렇지 않는 까닭은 어찌 알겠소?

(결국, 그 모든 것을 無에 의탁함으로써 의식의 경계가 흐릿하여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가 되고, 곧 ‘장주지몽의 의식상태’로 되어 이로써 그러함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注] 罔兩問景曰: ‘罔’은 ‘가리다, 숨기다, 속이다’ 등의 뜻으로 그림자를 말하며, 그로써 의식의 경계를 굳이 구분하지 않는 ‘무분별의 의식상태’를 비유하고 있다.(‘천지’편 제4절 ‘象罔’, 및 ‘달생’편 제8절 ‘罔象’ 참조, 『주역』 진괘 초육 효사 ‘망부罔孚’ 용례 참고.) ‘兩’은 물체의 형상과 그에 겹쳐진 흐릿한 그림자 그 두 가지를 말한다.

‘영景’은 바깥으로 드러난 물체의 현상現象 혹은 형상形象으로서, 여기서는 상대적 입장에서 객체를 인식하고 분별하는 일반적인 의식 상태를 비유한다. 결국,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피시이분의 의식과 행동들을 주장主掌하는 실체는 ‘장주지몽’에서 의미하는 분별없는 마음과 그 속에 내재하는 천연한 정신이라는 것이다.

何其無特操與: 어찌 (자신의) 독특한 절조가 없는가!]

 

 

<제5절>

昔者莊周夢爲胡蝶 栩栩然胡蝶也 自喻適志與不知周也 俄然覺則蘧蘧然周也 不知周之夢爲胡蝶與 胡蝶之夢爲周與 周與胡蝶則必有之謂物化

언젠가 장주가 꿈에 호랑나비가 되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호랑나비는 (그것이) 자기의 뜻에 꼭 맞아 스스로 유쾌한지라 (자기가) 장주임을 알지 못했는데 문득 깨어나 보니 그대로 장주이었다. 장주가 꿈속에서 호랑나비가 되었는지 호랑나비가 꿈속에서 장주가 되었는지 알지를 못하였도다.

(그처럼, 본래는 분별이 없으나 현실에서는) 장주와 호랑나비는 반드시 분별이 있는데, 이러함을 일컬어서 ‘물화’라 한다.

[注] 蘧蘧然: ‘蘧’는 ‘형태가 있는 모양’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장주의 형태’로 새긴다.

不知周之夢爲胡蝶與 胡蝶之夢爲周與: 장주가 꿈속에서 호랑나비가 되었는지 호랑나비가 꿈속에서 장주가 되었는지 알지를 못하도다. 이 부분은 장주가 스스로 피아일체의 상태로 있음을 말한다.

物化: 하나의 근본(곧, 일一)에서 말단의 현상(곧, 만물萬物)으로 分化됨을 ‘物化’라 한다. 장주는 ‘無의 지경(경계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무분별의 의식상태)’에서 분화되고 물화한 현실의 현상을 피아의 구분이 없이 관조하고 있는 것이다. ‘제물론’편을 굳이 한마디로 압축한다면 여기의 ‘물화’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으며, 지금까지의 과정들은 결국 ‘물화’를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가 있다.

만물의 근본은 하나로 같으며, 같은 하나의 근본에서 분별로 인하여 만물로 분화한다고 한다. 즉, 무의 상태에서 시작하여 유로 되고 그로부터 나아가 만물이 분화한다는 것인데 이를 ‘物化’라고 한다.

‘물화’는 아일체의 상태에서만 관찰할 수 있는데 여기서처럼 장주 자신이 나비인지 나비가 장주 자신인지 모르는 ‘무분별의 상태’에서 비로소 피시가 하나로 되는 아일체의 입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실에서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외형적 구분이 있으되 상호간에 인과관계나 주종관계가 직접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장주와 나비는 본래 같은 근본의 하나이나 현실에서 상대적 분별로 인하여 구분이 생길 뿐이라는 것이다.

본 절은 ‘제물론’편의 첫머리에 나오는 남곽자기가 궤안에 기대앉아 ‘후우’ 하며 깊은 숨을 쉬는 모습의 내면적 의식 상태를 말하고 있다. 즉 모든 것을 허무의 경지에 맡겨둠으로써 분별함이 없는 의식의 상태로 된다는 것이다.

이 절의 ‘호접지몽’이야기는 응제왕 편의 ‘혼돈’이야기와 함께 『장자』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부분이다.]

 

[篇注]

『장자』 ‘제물론’은 한마디로 피시이분의 상대적 입장에서 벗어나 피시방생의 관점에서 보면 만물은 본래 같은 하나로서 모두가 동등하며 고르다는 도의 본질과 속성을 설명하는 내용인데 그 논리가 뚜렷하면서도 어법은 기발하고 문체는 명쾌하다.

‘천예天倪’로써 조화造化한 만물의 자연스러운 그대로의 균형 상태를 ‘천균天鈞(1-13절)’이라 한다. 스스로를 수양하여 영원무궁한 시공간과 문합함으로써(1-5절 ‘非彼無我 非我無所取’ 및 1-10절 ‘彼出於是 是亦因彼 彼是方生之說也’, 3-1절 旁日月 挾宇宙 爲其脗合 참고) 모든 것을 허무의 경지에 의탁하여 道와 하나(一)로 통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1-12절 및 3-6절 ‘寓諸無竟’ 참고)

‘至人’은 ‘앎과 정신의 맑고 천연함이 지극한 사람’이다. 지극한 앎이란 ‘모른다’이다. 즉, (도에 대하여) 모르는 그 상태에서 앎을 그치되 모든 것을 무의 경지에 의탁하는 것이다(‘제물론’편 제1-20절 ‘知止其所不知 至矣’ 및 제2-3절 ‘至人神矣’, 제3-6절 ‘寓諸無竟’ 참고).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무의 경지에 의탁하며 세상의 밖에서 노닐 뿐 스스로의 존재를 의식함이 없는 것이다.

‘제물론’편이 학문과 지식에 적응된 ‘머리의 두뇌’로부터 도의 속성과 실질을 이해하고 추구하는 입장이라면 다음에 이어지는 ‘양생주’편은 머리의 앎이 아닌 몸 전체로써 도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즉, ‘양생주’편에서는 신체의 원숙한 기술에서 비롯하여 얻어지는 자유로움과 그 자유로운 상태에서 스스로를 삼가 경계함으로써 맑고 천연한 정신으로 도에 접근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