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통석 학이편 1

논어 학이편 제1

나무와 까치 2018. 4. 11. 10:04

[學而 제1편]

‘학이’편을 『논어』의 첫머리에 둔 것은 힘써 배우고 그것을 몸으로 익히는 것이야말로 도와 덕의 밝음을 닦아 그로써 참되게 인을 행하는 바탕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제1-1장>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 不亦君子

선생님(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그것을 실생활에서 당면하는) 그때마다 (몸으로 실행하여) 익히니 (그 알아감이) 역시 기쁘지 아니한가? (뜻이 맞는) 벗이 있어 멀리서부터 (일부러) 이곳까지 찾아오니 (이) 역시 (참되게 살아감이) 즐겁지 아니한가? (위의 힘있는) 사람이 (나를) 알지 못하여도 언짢아지 않으면 (이) 역시 군자다움이 아니겠는가?

[注] 子曰: 여기서 ‘子’는 ‘夫子’의 준말로서 ‘(문하에 있는 여러 제자들의) 스승님’ 정도의 어감이다. 갑골문에서 ‘子’는 신을 대신하여 제사를 받는 사람(후대의 시동尸童)의 정면모습을 본뜬 글자이다(『한자의 세계(시라카와 시즈카)』 참고).

상商(은殷나라의 본명)왕조의 무정武丁 때는 ‘子’가 아我ㆍ여余 등과 함께 왕자의 호칭으로 쓰였으며, 이후에 ‘귀인貴人’이나 ‘선생님’ 정도로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學而時習之: 여기서 ‘學’은 지식을 배운다는 것보다는 사람으로서 참된 행동을 배우는 것을 말하며, ‘習’은 배운 것을 습관이 되어 몸에 익도록 그 때마다 실행하는 일이다.

不亦說乎: ‘說’은 ‘열悅’과 통자通字로, 음은 ‘열’이다.

有朋自遠方來: ‘朋’은 고대에 재물財物로서의 조개를 한 쌍으로 나란히 늘어뜨린 모양으로 여기서는 ‘서로 뜻이 맞아 짝으로서 사귀는 벗’을 의미한다. ‘自’는 전치사로서 ‘~로부터’의 뜻.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후왕 등이 (자기스스로 도와 덕 그리고 예의 참됨을 알지 못함으로써 나의 진면목을) 알아보지 못하여도 (탓하거나 언짢아하며) 성내지 않으면 (이) 역시 군자다움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慍’은 단순히 나를 알아주지 않는데 대한 노여움이나 불쾌함이 아니다. 임금이 도와 덕의 밝음을 앎으로써 나의 진면목을 알아보고, 그로써 나를 적절한 직위에 써준다면 장차 천하가 안정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님에도 그러지 못하는 현실이 너무도 초조하고 안타깝다는 심정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본편 제1-16장 및 이인편 제4-14장, 헌문편 제14-32장에도 같은 취지의 내용이 나온다.)

갑골문 등 문자가 성립할 당시 ‘人’은 본래 ‘한 종족의 지배자와 그 동족의 사람’을 의미했다. 이후 변방을 정복하여 여러 씨족들이 복속되고 나라의 규모가 커져 인구가 대중화되면서 백성百姓을 의미하는 ‘民’의 개념이 성립하게 되었다. 그 이후 지도자는 군君, 왕王, 사士 등으로 표시되었고, ‘人’은 지방 군주나 지배층 귀족을 지칭하게 되었던 것이다.

‘民’은 ‘백성’으로 새길 수 있는데, 고대 금문에 ‘民’은 시력을 빼앗긴 사람을 표현한 모양으로 자기 씨족과 종속관계에 있는 ‘이족의 사람’ 곧 피정복 인을 뜻하는 말이다. 이들은 여러 변방의 백성百姓으로서 처음엔 종속관계의 하등신분이었다가 나라가 커지고 씨족적 질서가 대중화되면서 점차 평민화한 것으로 보인다.

君子: 『주역』에서 ‘君子’는 대체로 제후나 지방의 지도자를 말하며, 『논어』에서 ‘君子’는 밝은 앎과 참된 덕을 바탕으로 두루 어짊을 실천하는 사람을 말한다. 본래 ‘君’은 밝은 앎과 참된 덕을 갖춘 (옛날의) 참된 지도자 혹은 참된 임금을 뜻하며, ‘君子’는 ‘君’의 자제나 공적이 있는 귀족으로 봉한 제후 혹은 지방의 지도자를 일컫는 호칭이다. 또한 ‘君子’는 주나라 때 한 지방의 지도자로서 중앙정치에 진출한 고위관료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이후 ‘군자’는 학식과 덕행이 높은 사람, 벼슬이 높은 사람 등으로 의미가 확장되면서 ‘士(선비)’와도 의미가 통하여 ‘참된 선비’ 또는 ‘大人’ 등의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주희는 『사서집주(‘태백’편)』에서 ‘君子謂在上之人也(군자는 사람들의 위에 있는 사람, 즉 임금이나 지도자를 일컫는다.)’라고 하였으며, ‘선진’편에서는 어진사대부라고 주석하였다(君子謂賢士大夫也).

程子: 낙양洛陽사람으로 성은 정程 이름은 이頤 자는 정숙正淑, 시호諡號는 정공正公이다(1033년-1107년). 중국 북송北宋 중기의 대 유학자儒學者로 형 정호程顥와 함께 주돈이周敦頤에게 배웠으며, 이천백伊川伯으로 봉해졌으므로 이천 선생이라 불렸다. 저서著書로는 『역전易傳』 『어록語錄』 등이 있다.

그는 특히 『역경易經』에 대한 연구가 깊었으며,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며 이기理氣의 사상을 유교사상에 처음 도입하여 철학적으로 접근하였다. ‘지미至微(은미隱微)한 것은 이理(본체本體)요 지저至著(현저顯著)한 것은 상象(기氣, 용用)인바, 체體와 용用은 근원이 같으며 현顯과 미微에 사이가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의 철학은 주자朱子에게 계승되어 정주학程朱學의 창시자로 되었다.

程顥: 낙양洛陽사람으로 정이程頤의 형이며, 자는 백순伯淳, 호는 명도明道. 시호는 순純이다(1032년-1085년). 북송 중기의 유학자로 아우 정이程頤와 함께 주돈이에게 배웠으며, 정이와 함께 이정자二程子라 불렸다.

그는 저서 『정성서定性書』에서 우주宇宙의 본체를 ‘건원乾元의 기氣’라 하고, 이理를 기초基礎로 하는 도덕설道德說을 주창하여 우주의 본성本性과 사람의 성性이 본래 동일한 것이라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 혹은 ‘성즉이설性則理說’을 주창하였다.

저서로는 『정성서定性書』, 『식인편識仁篇』 및 시로 『추일우성秋日偶成』 등이 있다.

朱子: 중국 송宋나라 때 신新 유학인 송학宋學을 집대성한 남송의 대유학자로 성은 주朱 이름은 희熹, 자는 원회元晦 또는 중회仲晦, 호는 회암晦菴 또는 회옹晦翁이며, 시호諡號는 문공文公이다(1130년-1200년). 후세 사람들은 그를 주자朱子라 높여 칭한다.

그의 선조는 대대로 중국 안휘성安徽省 휘주徽州 무원婺源의 호족이었는데 아버지 위재韋齋가 재상 진회秦檜와의 정책충돌로 벼슬을 그만두고 복건성福建省 우계尤溪로 의탁해 와서는 그를 낳았다.

주희는 19세에 진사에 합격하여 관계官界에 들어갔는데 그 무렵 불교와 노자 계통의 학문에도 흥미를 가졌으나 24세 때 이연평李延平을 만나 사숙私淑하면서 유학에 복귀하여 그 영향으로 정씨학程氏學에 몰두하였다. 그 후 북송의 제유諸儒, 특히 주돈이周敦頤(염계濂溪),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 장재張載(횡거橫渠) 등의 학문學問을 종합하여 ‘이기철학理氣哲學’을 성립하였다.

그는 우주가 형이상학적인 ‘이理(체體)’와 형이하학적인 ‘기氣(용用)’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으며, 인간은 선한 ‘이’가 본성으로 나타나지만 불순한 ‘기’로 인하여 악하게 되는데 ‘격물格物’로 그 불순함을 제거할 수 있다고 하였다.

주자의 학문은 이기설理氣說(존재론), 성즉리性卽理의 설(윤리학), 격물규리格物窺理와 거경居敬의 설(방법론), 경전의 주석이나 역사서의 저술, 구체적인 정책론으로 되어 있고, 거기에는 모두 중세 봉건사회의 근간인 신분 및 혈연적 계급질서의 관점이 관철되고 있다. 그의 학문과 정책은 모두 봉건 사회의 질서원리가 철학적으로 강고하게 체계화되었던바 주자학은 봉건 사회의 이데올로기로서 오랫동안 군림하였던 것이다.

돈이(염계)의 태극도설太極圖說에 의하면 태극은 동動하기도 하고 정靜하기도 하여 음ㆍ양이 발생하며, 태극은 음양과 오행五行의 작용과 결합하면서 인간과 만물이 발생되어 나온다고 한다.

이것이 주자에 의해 ‘태극은 이理로, 음양ㆍ오행은 기氣로 확인되는 이기理氣철학’으로 정립되면서 태극과 이理ㆍ기氣개념은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이론체계의 기본 틀이 되었다. 여기의 ‘이理’는 비록 유교 경전으로는 『주역』에서 언급되기는 하나 정확히는 『장자』 또는 불교 『화엄경』의 형이상학적 개념이 도입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저서로는 『자치통감강목』, 『사서집주』, 『근사록』 등이 있다.]

 

 

<제1-2장>

有子曰 其爲人也孝弟 而好犯上者 鮮矣 不好犯上 而好作亂者 未之有也 君子務本 本立而生 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

유자가 말씀하였다. 그 사람됨이 효제로우면서 윗사람을 범하는 것을 좋아하기는 드물며, 윗사람을 범하길 좋아하지 않으면서 (거슬러) 어지러움을 짓기 좋아하는 것은 있어본 적이 없다. 군자는 근본에 힘쓸 것이로되, 근본이 서게 되면 도가 생겨난다. 효제라는 것은 어질게(仁) 되는 근본이로다!

[注] 有子: 공문십철의 한 사람으로 노魯나라 사람이며, 성명이 유약有若이고, 자字는 자유子有 또는 유자有子이다. 『사기(열전)』에는 공자보다 13세 아래로 되어있고 『공자가어』에는 33세 등으로 나와있다. 사망연도는 『예기』의 내용으로 미루어 노魯 도공悼公 재위 기간인 기원전 466년에서 429년 사이로 추정된다.

유약은 사람됨이 강직하고 박학다식하며 옛 사람들의 학문을 공부하길 좋아했다고 한다. 공자 사후에 공자를 계승할 사람으로 증자와 유자가 거론되었을 때 유자가 증자보다 나이가 위이고 특히 공자와 모습이 닮은 데가 있어 그를 지지하는 제자들이 많았는데 결국 증자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편, 『논어』에 등장하는 공자의 제자 중 ‘자子’로 존칭되는 경우가 유자有子(유약有若), 증자曾子(증삼曾參), 염자冉子(염유冉有), 민자閔子(민자건閔子騫) 등 네 사람이 있는데(각각 17회, 3회, 3회, 1회), 이는 『논어』가 증자와 유자 등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편찬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의 근거가 된다.

孝弟: 부모에 대한 효성(孝)과 형제간의 우애(弟). ‘弟’는 ‘悌’와 같은 의미로 쓰였다.

好犯上: 여기서 ‘上’은 ‘윗사람’을 의미하는데, 정확히는 ‘임금’을 말한다.

作亂: ‘작란’은 역리반상逆理反常과 패역쟁투悖逆爭鬪의 행위이다.

本立而道生: 근본이 서게 되면 도가 생겨난다. 『논어』에서 공자가 말하는 ‘道’는 궁극적으로 우주 대자연이 운행하는 섭리로서의 길(道)이며, 구체적으로는 주역에서 말하는 천도운행의 법도法道를 일컫는다. 그러한 천지자연의 섭리를 자연의 일부인 사람이 그대로 본받음으로써 인간사회가 굴러가는 법도가 되며, 이것이 곧 인간 개개인에 있어서는 인간으로서 의당 가야할 길(The Way men have to go)로서 도리道이고 사회의 윤리이며, 곧 ‘올바른 길’인 것이다.

≪참고: 『노자』에서 ‘道’는 천연한 우주의 섭리를 물아일체의 입장에서 관찰한 개념으로서 ‘우주대자연의 섭리와 같은, 상자연한 도’를 일컫는다. 그러한 도의 실체와 작용이치(섭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몸으로 체득하는 것을 ‘도의 밝음’이라 일컫는다.

마음의 빔을 지극하게 하고 성정을 고요히 함으로써 노자는 스스로 참된 본성을 닦아 사물의 근본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였고, 그러한 물아일체의 바탕에서 한 치도 어김이 없는 무한한 섭리로 도도히 운행하는 우주대자연의 어떤 유기적 실체를 통찰하였던바, 이것이 곧 ‘도道(의 존재)’이다. 『노자』에서는 이를 ‘天之道’ 또는 大道’라고도 하였다.≫

 

 

<제1-3장>

子曰 巧言令色 鮮矣仁

공자가 말했다. 교묘하게 말을 하며 (짐짓) 고결한 얼굴색을 짓는다면 (그로써) 어짊은 드물다.

[注] 본장과 같은 내용이 양화편 제17-17장에서도 중복되며, ‘巧言令色’은 공야장편 제5-25장에서도 볼 수 있다.]

 

 

<제1-4장>

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為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증자가 말했다. 나는 하루에 세 번 나 자신(의 몸, 곧 처신)을 살펴본다. (즉,) 사람을 위해 도모함에 있어 (혹여) 충심이지 못하였는가? 벗과 더불어 사귐에 있어 (혹여) 미덥지 못하였는가? (스승이나 학우로부터) 전해들은 것을 익히지 못하였는가?

[注] 曾子: 노나라 무성武城(지금의 산동성山東省 가상현嘉祥縣) 사람으로 이름은 삼參 자는 자여子輿로 역시 공자의 제자인 증점曾點(증석曾晳, 자는 자석子皙)의 아들이다(BC 505년-BC 435년).

공자의 제자 가운데 나이가 가장 어리고 노둔老鈍하였으나 효심孝心이 깊고 내성궁행內省躬行에 힘썼다. 증자가 공자의 도道를 계승하여 공자의 손자 자사를 거쳐 맹자에게 전해졌다고도 하며, 유가에서는 종성宗聖이라 부른다. 『효경孝經』 『대학大學』 등의 저자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공자가 죽은 뒤 고향 수사洙泗에서 강학講學하여 70여 명의 문인을 배출했다고 한다.

為人謀而不忠乎: 여기서 ‘人’은 제후나 귀족인사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제1-5장>

子曰 千乘之國 敬事而信 節用而愛人 使民以時

공자가 말했다. 천승지국의 도는 일(제사나 정사)을 받듦에 경건하여 미덥고, (나라의 물자를) 절약하여 쓰되 사람(인재)을 아끼며, 때를 보아서 백성을 부리는 것이다.

[注] 道千乘之國: 천승지국에 있어서의 도. 여기서 천승은 수레의 숫자를 말하는데 수레가 만승인 나라는 천자의 나라이며, 천승의 나라는 제후국으로서 대국을 일컫는다.]

 

 

<제1-6장>

子曰 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眾而親仁 行有餘力則以學文

공자가 말했다. (각 가정의) 젊은이들은 (집으로) 들어서는 효도하고, (밖에) 나와서는 공손하며 (스스로를) 삼가서 미덥게 하고, 널리 뭇사람을 아끼어 어짊을 가까이한다. (그것을) 행하고 힘이 남으면 곧 글을 배울 것이로다.

[注] 弟子: 집안에서 가장의 보호아래에 있는 가장의 동생이나 집안의 자식들을 일컬으며, 여기서는 맏형이나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는 ‘젊은이’로 새길 수 있다.

出則弟: 여기서 ‘弟’는 ‘悌’와 같이 쓰이어 ‘(손윗사람에) 공손하다’로 새긴다.]

 

 

<제1-7장>

子夏曰 賢賢易色 事父母能竭其力 事君能致其身 與朋友交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

자하가 말했다. 어짊을 어질게 대하여 얼굴빛을 바꾸(고 어진 이를 공손히 맞으)며, 부모를 받듦에 있는 힘을 다할 수 있고, 임금을 받들어 몸으로 다할 수 있으며, 벗과 더불어 말을 주고받음에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보고) 비록 (사람들은) 배우지 못하였다고 말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배웠다고 일컬을 것이다.

[注] 子夏: 卜商. 위衛나라 사람(산서성山西省 출생)으로 성은 복卜 이름은 상商이며 자는 子夏이다(BC 507-?). 공문십철의 한 사람으로 내면의 마음을 중시하는 증자曾子 등과 달리 자하는 예의 형식을 중시하였으며, 자유子游와 더불어 문학에 능하였다.

공자가 죽은 뒤에 서하西河에서 사람들을 모아 가르쳤으며 위나라 문후文侯에게 초빙되어 스승이 되었다.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여읜 아들의 죽음을 비통해하다 실명失明하였다고도 전해진다.

賢賢易色: 어짊을 어질게 대하여 (이를 맞고자) 얼굴빛(色)을 (공손하게) 바꾸다.]

 

 

<제1-8장>

子曰 君子不重則不威 學則不固 主忠信 無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

공자가 말했다. 군자가 진중하지 않으면 위엄이 서지 않고, 배워도 (뜻이) 굳지 못하다. (군자는) 충(참됨)과 신(믿음)을 주로 하는바 (그러한) 자기와 (뜻이) 같지 아니하면 벗함이 없으며, 과실이 있으면 (스스로) 고치는데 거리낌이 없도록 한다.

[注] 君子: 『논어』에서 ‘君子’는 밝은 앎과 참된 덕을 바탕으로 두루 어짊을 실천하는 사람을 말한다. 본래 ‘君’은 밝은 앎과 참된 덕을 갖춘 (옛날의) 참된 지도자 혹은 참된 임금을 뜻하며, ‘君子’는 ‘君’의 자제나 공적이 있는 귀족으로 봉한 제후 혹은 지방의 지도자를 일컫는 호칭이다. 또한 ‘君子’는 주나라 때 한 지방의 지도자로서 중앙정치에 진출한 고위관료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이후 ‘군자’는 학식과 덕행이 높은 사람, 벼슬이 높은 사람 등으로 의미가 확장되면서 ‘士(선비)’와도 의미가 통하여 ‘참된 선비’ 또는 ‘大人’ 등의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제1-9장>

曾子曰 慎終追遠 民歸厚矣

증자가 말했다. (군자가 부모의) 죽음에 근신하며 (제사에 있어서) 먼 조상까지 추모하면 백성의 이 두텁게 돌아온다.

[注] 民德歸厚矣: 『논어』에서 공자는 德에 대하여 특별히 설명하지는 않으나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 정도의 의미로 통용되며, 대체로 노자의 德과 큰 차이가 없다.

≪참고: 『노자』에서 ‘덕德’이란 ‘우주대자연의 섭리 같은, 상자연한 道’의 밝음을 인간이 그대로 좇아 참되게 이행하는 것을 말하며, ‘인仁’은 그러한 덕을 사람과 사람 간에 지극하게 행함을 일컫는다.

결국, ‘德’은 자기의 내면적 수양을 그 본질로 하며, ‘仁’은 그러한 덕의 밝음을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온전히 이행하고자 하는 마음가짐과 행동거지에 관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民’은 ‘백성’으로 새길 수 있다. 고대 금문에 ‘民’은 시력을 빼앗긴 사람을 표현한 모양으로 자기 씨족과 종속관계에 있는 ‘이족의 사람’ 곧 피정복인을 뜻하는 말이다. 이들은 여러 변방의 백성百姓으로서 처음엔 종속관계의 하등신분이었다가 나라가 커지고 씨족적 질서가 대중화되면서 점차 평민화한 것으로 보인다.]

 

 

<제1-10장>

子禽問於子貢曰 夫子至於是邦也 必聞其政 求之與 抑與之與 子貢曰 夫子溫 良 恭 儉 讓以得之 夫子之求之也 其諸異乎之求之與

자금이 자공에게 물었다. 선생님(공자)께서 이 나라에 이르시면 (임금이) 반드시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선생님이 그렇게) 구하신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면 (임금이 스스로) 함께한 것입니까? 자공이 말했다. 선생님께서는 온화(溫)ㆍ선량(良)ㆍ공경(恭)ㆍ검약(儉)ㆍ겸양(讓)하여 그런 것이다. 선생님께서 추구하시는 것은 모두 (일반의) 사람이 추구하는 것과는 다르니라.

[注] 子禽: 진陳나라 사람으로 성이 진陳 이름은 항亢이며, 자는 자금子禽이다. 공자보다 40세 아래이고 자공보다는 9세 아래로 공자의 제자로서 자공을 따른 사람으로 여겨지는데 혹은 자공의 제자라고도 한다. 『사기』「중니제자열전」에는 그 이름이 없다.

子貢: 위衛나라 사람으로 성은 단목端木 이름은 사賜 자는 子貢이며, 공문십철의 한 사람이다. 정치ㆍ경제ㆍ외교에 탁월하였고, 특히 고향인 위나라를 근거로 통상교역에 밝았으므로 공자가 천하를 주유하는데 실질적으로 기여한 인물이다.(BC 520년-?)

夫子: 원래 ‘夫子’는 대부大夫에 대한 존칭이다. 공자가 노魯나라 대부였으므로 그의 제자들이 공자를 ‘夫子’라고 불렀는데, 그로써 나중에는 스승에 대한 존칭으로 쓰이게 되었다.

溫ㆍ良ㆍ恭ㆍ儉ㆍ讓: 溫온화ㆍ良선량ㆍ恭공경ㆍ儉검소ㆍ讓겸양]

 

 

<제1-11장>

子曰 父在觀其志 父沒觀其行 三年無改於父之可謂孝矣

공자가 말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적엔 그 뜻을 (잘 살펴서) 보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생전의) 그 행동을 (깊이 새겨서) 본다. (돌아가신 이후) 삼 년 동안 아버지의 를 고침이 없어야 효라 일컫게 되는 것이다.

[注] 父在觀其志: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엔 (아버지의) 그 뜻을 (잘 살펴서) 본다. 여기서 ‘其志’는 ‘아버지의 뜻’이다. 주희의 『사서집주』 역시 그러한 의미로 해석하고 있으나 많은 사람들이 이를 ‘그 아들의 뜻’으로 해석한다.

三年無改於父之: (돌아가신 이후) 3년 동안 아버지가 행하시던 도를 바꿈이 없다. 여기서 ‘父(아버지)’는 아마도 대화당사자가 임금일 것으로 본다면 ‘돌아가신 선왕’으로 해석할 수 있다.

’란 용어가 『노자』 못지않게 『논어』에도 자주 보이는데, 『논어』에서는 대체로 ‘도’가 천지자연의 섭리와 일상의 사물 간 당연한 이치, 즉 인간사회의 윤리나 법도로서 ‘인간이 의당 가야할 길(Way) 혹은 도리道理’ 정도의 의미로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제1-12장>

有子曰 之用和為貴 先王之斯為美 小大由之 有所不行 知和而和 不以禮節之 亦不可行也

유자가 말했다. 예의 쓰임은 조화를 귀중히 삼는바 옛날의 (참된) 왕의 도는 이것이 아름답게 여기어 작고 큰일들이 (모두 이에서) 연유하였다. (그러함에도 이를 제대로) 행하지 못하는 바가 있는데, 화합만 알고 화합하되 예로써 절제하지 아니하면 역시 (올바로) 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注] 禮之用和為貴: (현실적인) 예의 쓰임에는 조화가 귀중하다. 『논어』에서 ‘禮’는 단순히 윤리나 예절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禮’는 크게는 천지자연의 천연한 질서이며, 작게는 인간이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분수’를 말한다. 그리고 천지자연의 천연한 질서와 인간의 분수를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 예악이다. 결국, 예는 인을 행하는 최선의 수단인 것이다. 따라서 예를 잃는다는 것은 곧 삶의 법도를 거스르는 일이고, ‘길(道)’을 잃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는 정성을 다해 예를 행하되 현실에서의 쓰임에는 그 조화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禮’는 본래 음식을 풍성히 차려놓고 귀鬼와 신神에 제사지내는 의미를 나타낸 글자이다. 귀와 신, 곧 귀신이 천상과 지상의 모든 세계를 지배하던 당시의 현실은 살아있는 사람을 제물로 바쳐 귀신의 환심을 얻으려할 정도로 귀신이 사람보다 더 높고 실질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한 대상에게 경배하며 제사를 올린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지극히 신성한 행위이며 삶을 살아가는 현실의 가치기준이 된다. 그것은 자신과 그 종족이 자연적 재난과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안위와 생존을 지킬 수 있는 궁극적 수단이기도 하다. 그러한 바탕에서 사회적 법도와 윤리의 기본 틀이 규정되는 것이다.

先王之道: 여기서 선왕은 ‘옛날의 참된 왕’, 즉 옛날의 성인을 말하며, 대체로 요堯ㆍ순舜ㆍ우禹ㆍ탕湯ㆍ문文ㆍ무武와 같은 성왕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제1-13장>

有子曰 信近於義 言可復也 恭近於禮 遠恥辱也 因不失其親 亦可宗也

유자가 말했다. (임금을 받듦에 있어) 미더움이 의에 가까우면 (자기의) 말을 (성실히 이행한 후 복명復命으로) 되돌릴 수 있고, 공경함이 예에 가까우면 치욕을 멀리하게 될 것이며, (정사政事가) 기인함에 친절을 잃지 않으면 역시 으뜸이라 할만하다.

[注] 信近於義: 주희는 ‘信’을 ‘約信也’라 주석하였고, ‘約信’은 ‘믿음에 대한 약속’, 즉 임금을 믿고 받듦(신봉信奉)에 대한 약속이라 하였다. ‘義’는 의로움으로 새긴다.]

 

 

<제1-14장>

子曰 君子食無求飽 居無求安 敏於事而慎於言 就有而正焉 可謂好學也已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음식을 먹되 배부르도록 구하지 않으며 거처함에 안일함을 추구하지 않는다. 일을 받듦에 민첩하며 말을 신중히 하고, 도가 있는 데로 나아가 (그 스스로를) 바르게 한다면 배움을 좋아한다고 일컬을 만하다.

[注] 就有: ‘有道’는 ‘도가 있음’, 곧 도가 있어 그것이 온전히 행해지는 곳을 말한다.]

 

 

<제1-15장>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子貢曰 詩云 如切如磋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子曰 賜也 始可與言詩已矣 告諸往而知來者

자공이 말했다. “빈한하되 아첨함이 없고 부유하되 교만함이 없으면 어떻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그런 정도면) 괜찮다. (그러나) 빈한하되 (그것을) 즐기고 부유하되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다.” 자공이 말했다. “『시詩』에 이르기를 ‘끊는 듯 (줄로 문질러) 쓰는 듯 쪼는 듯 가는 듯하다’함은 이를 두고 일컫는 것입니까?” 공자가 말했다. “사야 이제야 비로소 너와 더불어 시를 말할 만한 것이, (내가) 지난 것을 (하나) 알려주면 (너는 그다음에) 올 것을 아는구나.”

[注] 告諸往而知來者: 이 구절은 공자가 자공을 격려하는 의미의 칭찬으로 이해된다. ‘諸’는 ‘之於’ 또는 ‘之乎’의 합성어로 음은 ‘저’이다.

如切如磋 如琢如磨: 『시경詩經(위풍衛風,기욱淇奧)』의 첫 구절로 옥을 가공하는 과정을 말하는데, 대개는 학문이나 덕을 닦아 정진함을 일컫는다. 절차탁마切磋琢磨.]

 

 

<제1-16장>

子曰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공자가 말했다. 남이 자기를 알지 못함을 근심하지 말고 (자기가 스스로를 알지 못함과 그로써) 남을 알(아보)지 못함을 근심하여라.

[注] 본장의 구절과 거의 같은 내용이 ‘헌문’편 제14-32장에 나오며, ‘이인’편 제4-14장에도 같은 취지의 구절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