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해석 1

반야심경 해석 1

나무와 까치 2019. 9. 30. 16:48

□ 般若波羅蜜多心經반야바라밀다심경 해석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크나큰 지혜의 피안에 이르는 ‘핵심 경전’ 또는 ‘마음 경전’

 

[注] 摩訶: 산스크리트어 마하mahā의 음역으로 ‘크나큰’ 혹은 ‘광원한’ 등의 의미가 되는데, 여기서는 ‘(깨우침의) 크나큰 경지’ 정도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흔히 마하반야摩訶般若(산스크리트어 mahāprajñā)와 같이 쓰인다.

般若: 산스크리트어 프라즈냐(प्रज्ञा prajñā) 또는 팔리어 빤냐(paññā)의 음역으로 보통은 ‘(크나큰) 지혜’라고 의역한다. 불교 경전에서 산스크리트어 프라즈냐 혹은 팔리어 빤냐를 '지혜'라고 번역하지 않고 음역인 ‘반야’를 사용한 것은 불경의 한역漢譯 5종불번五種不翻의 원칙 가운데 존중불번尊重不翻에 해당하는 것이다. 즉, 반야를 지혜라 번역하면 깊고 원대한 본래의 뜻이 훼손되거나 가벼워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교 서적들은 흔히 ‘반야’를 ‘혜慧’ 또는 ‘지智’, 즉 ‘지혜智慧’로 번역하고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부처가 진여를 깨친 완전한 지혜, 즉 부처의 무분별지無分別智(산스크리트어 니르비칼파 즈냐나nirvikalpa-jñāna)’를 가리켜 반야般若 또는 마하반야摩訶般若(산스크리트어 mahāprajñā)ㆍ대반야大般若ㆍ대지大智라고도 하며, 보리菩提(산스크리트어 bodhi)ㆍ대보리大菩提ㆍ대원경지大圓鏡智(산스크리트어 ādarśa-jñāna) 또는 구경각究竟覺이라고도 한다.

摩訶般若: ‘반야’의 다른 명칭. 반야는 불교의 교의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냥 반야라고만 하지 않고 흔히 마하반야摩訶般若ㆍ대반야大般若ㆍ대지大智ㆍ대지혜大智慧 등으로 불린다. 이러한 명칭들은 불교 경전 등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는데,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経』, 『대지도론大智度論』 등과 같다.

波羅蜜多: ‘바라밀다波羅蜜多’는 산스크리트어 파라미타paramita의 음역으로 바라밀波羅蜜이라고도 하며, 한역으로는 도피안到彼岸(생사의 경계가 분명한 차안此岸에서 열반涅槃의 경지인 피안彼岸에 다다름) 또는 도안到岸이라고도 한다.

‘바라밀다(도피안度彼岸)’란 태어나고 죽는 현실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번뇌와 고통이 없는 경지인 피안으로 건너간다는 뜻으로 ‘피안에 도달하다’ 혹은 ‘깨달음의 언덕에 도달하여 건너다’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보살의 수행修行과 그 수행법을 총칭하는 의미로 대승 불교에서 정립, 유포된 개념이다. 구체적으로는 ‘생사윤회의 고해로부터 벗어나 해탈의 피안으로 건너가다’가 된다.

‘paramita(파라미타)’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 ‘피안(param)+도달하다(ita)’라는 설과 ‘피안에 도달한(parami)+상태(ta)’라는 설의 두 가지인데 보통은 후자의 설에 따라 ‘완성’ 혹은 ‘성취’라고 새긴다.

원시불교 초기에 붓다는 계戒ㆍ정定ㆍ혜慧의 삼학三學을 수행하고,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의 사제四諦를 올바로 깨달아야 한다고 하였으며,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삼학을 바탕으로 여섯 종류의 수행을 열거하며 수행자가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여섯 종류의 수행을 육바라밀다六波羅蜜多 혹은 육도六度라고 하여 보시布施ㆍ지계持戒ㆍ인욕忍辱ㆍ정진精進ㆍ선정禪定ㆍ반야般若를 말하며, 이 중 최후단계의 반야般若가 곧 반야바라밀다로서 다른 다섯 종류의 수행을 인도하는 위치에 있다.

바라밀다의 종류로는 정定과 혜慧의 2바라밀다을 비롯하여, 4바라밀다, 6바라밀다, 7바라밀다, 10바라밀다, 32바라밀다 등 수없이 많은 조목들이 경전에 등장하는데 그 중에서 특히 6바라밀다가 불도 수행의 기본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摩訶般若波羅蜜多: 크나큰 지혜의 바라밀다 수행. 크나큰 반야의 지혜로 깨달음을 얻어 열반涅槃에 이르고자 하는 법 혹은 그 수행을 말한다. 즉, 참된 지혜로 깨달음을 얻어 존재의 실상을 통찰하고 성불에 이르는 보살수행으로 대보살이 의지하는 법이다.

心經: ‘반야심경’을 말하며, 여기서는 ‘핵심경전’ 혹은 ‘마음경전’, ‘마음 다스림’ 등으로 새길 수 있다. ‘심心’을 ‘심장心臟’으로 번역함으로써 크고 넓은 반야계통般若系統의 여러 경전에서 그 정수를 뽑아내어 응축한 ‘핵심경전’이란 의미를 가지고, 또 한편으로는 ‘心’을 사람의 ‘본디 밝은 마음’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어느 날 사리자가 석가모니께 물었다. “관자재보살은 어떻게 하여 성취를 이루었습니까?” 석가모니 부처께서 대답하였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사리자여!)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오묘한 참 지혜)의 바라밀다를 수행하면서, 오온이 모두 공한 것임을 (본래의 청정한 마음으로) 비추어보고 온갖 고통과 재액을 (타파하여) 건넜느니라.

 

[注] 여기에서 관세음보살이 반야바라밀다에 의하여 오온이 모두 공함을 관조하였다는 부분은 자신의 해탈에 해당하는 ‘자리自利’, ‘자도自度’이며, 온갖 고통과 재액을 건넜다는 것은 중생의 이로움을 추구하는 ‘이타利他’, ‘구세救世’의 의미를 가진 것으로 해석한다.

觀自在: ‘觀’은 ‘청정한 본래의 마음으로 (진공眞空의 자성自性을) 헤아림’이며, ‘관조觀照’로 말하기도 한다. 마음공부의 궁극적 목적이 바로 본래의 청정한 성품을 명백히 깨닫는 것이라 할 수 있다. ‘觀’은 마음이 밝아 번뇌煩惱가 없고 보는 것이 자유자재自由自在하므로 사물의 천연한 그대로를 근본에서 직시함을 뜻한다. 자성은 본래 청정하여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다. 그것이 자재自在이다.

‘觀自在’는 ‘관자재보살’의 줄임말이며 ‘관세음보살’과 같다. 관세음觀世音 또는 광세음光世音이라고도 하는데, 적련화赤蓮華를 표식으로 지닌 데에서 연화수蓮花鬚(Padmapani)라고도 한다.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왼편에서 교화를 돕는 보살로서 대승불교에서 가장 널리 신앙되는 보살이다.

菩薩: ‘보리菩薩’는 보리살타菩提薩唾의 줄임말이며, 보리살타는 산스크리트어 보디사트바bodhissattva를 음사音寫한 것이다. ‘보디bodhi(보리菩薩)’는 ‘budh(깨닫다)’에서 파생된 말로 ‘깨달음(각覺)’, ‘불지佛智’ 혹은 ‘(깨달음의) 지혜’라는 의미가 있으며, ‘사트바sattva’는 ‘as(존재하다)’가 어원으로 생명 있는 존재를 말하는바, ‘보리’‘깨달음’ 혹은 ‘깨닫는 존재’, ‘깨달은 존재’로 새길 수 있다.

여기서의 ‘보리’는 ‘깨달은 존재’라는 뜻으로서 ‘각유정覺有情’이라 한역되기도 하는데, 위로 보리(깨달음, 覺)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며 부처에 버금되는 성인으로 대승불교의 이상적 수행자상을 일컫는다.

초기불교에서 보리살타는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 일반적인 의미로는 깨달음을 구하여 수도하는 중생, 구도자, 깨달음(의 지혜)을 가진 자 등으로 풀이되며, 중생衆生 또는 유정有情, 개사開士, 상사上士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우바리優婆夷(출가하지 않고 불제자가 된 여자)에 대한 존칭으로 쓰이기도 한다.

보살의 용어와 개념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2세기경에 성립된 『본생담本生譚』에서이다. 『본생담』은 석가모니가 전생에서 수행한 여러 행적을 기록한 책으로 이때의 보살은 후대에 나타나는 대승의 보살에 대하여 ‘본생보살本生菩薩’이라고 부른다.

照見: ‘청정한 본래의 마음으로 (진공眞空의 자성自性을) 비추어보다’ 혹은 ‘관조하여 통찰하다’.

五蘊: ‘오온五蘊’은 산스크리트어 pañca-skandha(팔리어 pañca-khandha)의 한역으로 불교에서 생멸 · 변화하는 모든 것, 즉 모든 유위법有爲法을 구성하고 있다고 보는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의 다섯 요소를 말한다. 이들을 각각 색온色蘊(육체, 물질)ㆍ수온受蘊(지각, 느낌)ㆍ상온想蘊(표상, 생각)ㆍ행온行蘊(욕구, 의지)ㆍ식온識蘊(마음, 의식)이라고도 부른다. 오온五蘊을 구역口譯으로는 오음五陰이라고 하며 오중五衆 또는 오취五聚라고도 한다.

‘온蘊’(스칸다skandha)은 ‘집적集積’, ‘집결集結’, 혹은 ‘쌓여 모임’, ‘쌓여 모인 무더기’, ‘(쌓여 모인) 요소’, ‘(쌓인) 덮개’ 등으로 풀이된다. ‘오온五蘊’은 ‘다섯 가지 집적된 요소’를 말하는데 개인의 존재를 성립하는 결합요소로서 오온은 불교사상의 핵심인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무아無我를 설명하는 기본개념이며, 넓게는 ‘현상계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다섯 가지 집적集積된 무더기’ 정도로 의미가 확대되어 있다.

오온은 오취온五取蘊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오온을 자아로 집착하는 경향을 말하며, 그로써 오온은 윤회생존의 기반이 된다는 관점이다. 12연기가 논리적이고 역동적인 인간존재의 구성요소라면 오온五蘊은 정태적인 구성요소이다.

불교에서 인간 개인의 존재는 오온五蘊이라는 5가지 유위법有爲法 요소의 집적에 의해 성립되고 지탱되며, 그것은 현상적인 존재로서 끊임없이 생멸ㆍ변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상세계에서 언제나 불변하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개인의 존재는 오온이 임시로 모여 구성된 것인바(오온가화합五蘊假和合) 오온의 그 어느 것도 ‘我’로 불릴 수 없다는 것이다(오온무아五蘊無我).

오온 중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의 사온四蘊은 내면적 요소로서 물질적 요소인 색온色蘊과 결합하여 심신心身을 이루기 때문에 오온은 명색名色(nāmarūpa)이라고도 불린다. 즉, 이름만 있고 형상이 없는 마음(名)과 물질적인 것으로서 형상을 이루고 있는 육체(色)의 의미가 있는데, 이후 의미가 확장되면서 현상 세계의 모든 구성요소를 의미하는 것으로 통용되었다.

세속에서는 이렇게 성립한 존재를 두고 ‘아我’ 또는 ‘자기自己’라고 부르는데, 우리 존재의 본체는 이러한 오온의 집합 속에서는 인식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오온은 청정한 본성을 가리고 있으므로 수행에 있어 인간의 본성을 밝히는데 결정적으로 방해가 된다.

5온은 유루와 무루에 모두 통하는데, 유루에 통한 5온을 5취온五取蘊 또는 5수음五受陰 또는 순대고취純大苦聚(순전하게 큰 괴로움의 무더기)라 한다. 무루에 통한 5온을 5무루온五無漏蘊이라고 한다. 5무루온(무루에 통한 5온)은 유위 무루(유위의 새어남이 없음)이며, 이것은 곧 4성제 중의 도제道諦, 즉 열반(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다.

‘누漏’는 인간이 번뇌 때문에 각종의 악업을 행하고 그 결과 고苦가 그 사람의 삶에 누출漏出(새어나옴)됨을 말하며, 번뇌와 고의 이러한 누출로 인해 그 사람은 혹惑ㆍ업業ㆍ고苦의 윤회3도輪廻三道(혹도惑道ㆍ업도業道ㆍ고도苦道)를 전전하면서 미혹의 세계(迷界)를 유전流轉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누를 곧 번뇌라고 할 수 있다.

≪『잡아함경』의 「음근경陰根經」에서 고타마 붓다는 5온에 욕탐欲貪이 있으면 5온이 곧 5취온이 된다(能於彼有欲貪者 是五受陰)고 말한다. 부파불교와 상좌부불교 전통에서는 고苦(괴로움)는 마음(즉 6식)이 5온의 개별 또는 다수에 집착 또는 갈망하기 때문에, 즉 5온의 개별 또는 다수를 나(我)라고 여기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본다. 그리고 5온에 대한 집착 또는 갈망을 끊음에 의해 고가 소멸된다고 말한다.

대승불교 전통에서도 부파불교나 상좌부불교 전통과 마찬가지로 개별 자아로서의 5온에 대한 집착 또는 갈망, 즉 마음(즉 8식, 심왕, 심법)이 5온의 개별 또는 다수를 나라고 여기는 것, 즉 아집我執이 고의 원인이라고 보며, 또한 아집을 끊음에 의해 고가 소멸된다고 본다. 그러나 아집을 끊는 것만으로는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으며, 존재 전체로서의 5온에 대한 집착, 즉 마음 밖에 외계(법, 5온)가 실재한다는 집착, 즉 법집法執을 끊음에 의해 궁극적 자유 즉 완전한 깨달음이 성취된다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반야바라밀다의 지혜로써 5온이 개인과 존재 전체의 양 측면에서 무아無我라는 것, 연기緣起하여 성립된 것이라는 것, 공空이라는 것을 완전하게 아는 것(證悟)에 의해 궁극적 자유 또는 영원한 자유가 성취된다고 말한다.

1) 색온色蘊(산스크리트어 rūpa-skandha)

‘色’은 ‘형색形色’ 혹은 ‘색신色身’의 의미로서 형상과 질량을 가지고 있는 ‘일체의 물질적 현상’을 가리킨다. 불교에서 ‘색온’은 본래 ‘육체’를 의미하였는데 이후 그 의미가 확장되어 현상세계의 모든 형상과 실물체를 뜻하였다. 즉, ‘色’은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일체의 형상과 물질 또는 모든 존재라 할 수 있으며, 오온의 나머지 사온에 대하여 물질적 측면을 말한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코로 느껴지는 냄새, 혀로 느껴지는 맛, 몸의 감촉으로 느껴지는 것, 내면에 떠오르는 상념 등을 모두 색온이라고 할 수 있다. ‘색’은 결국 인격체의 물질적 요소 외부세계에 대한 물질적 현상과 경험을 의미한다.

2) 수온受蘊(산스크리트어 vedanā-skandha)

‘受’는 대상에 대한 감수感受작용이다. 의식 속에 어떤 인상을 받아들이거나 감각感覺에 의한 작용 등의 단순감정을 포함한다. 이는 대상에 대한 일종의 접수작용으로 낙경樂境(sukha, 즐거움), 고경苦境(dukkha, 괴로움), 불고불락경不苦不樂境(adukkhamasukha,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음)의 세 가지가 있다.

범부나 성인을 막론하고 감각의 요소는 살아있는 인격체의 중요한 기능의 하나인바 지각과 감각이 없는 명상 중의 몰입상태(일상적 의미에서의 인식작용이 없는 상태)를 제외하면 감각경험은 불가피하다.

그러한 감각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억제될 수는 있으나 그 반응자체가 감각에 대한 지속적인 갈증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므로 수행에 있어서는 감수感受를 뿌리로 하는 탐욕(rāga)과 집착(taṇhā)을 제거하는 것이 요체이다.

3) 상온想蘊(산스크리트어 saṃjñā-skandha)

‘想’은 각종 상념이나 단편적 생각이다. 우리가 외부의 대상과 접촉할 때 일어나는 지각과 표상 등과 관련한 내면의 의식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의식적 활동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이어진다. 이는 스쳐 지나기도 하고 머물기도 하면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지각 등의 의식적 활동이다.

개개의 지각 역시 기억과 관념과 기질 그리고 물질적 요소(색色의 기능)들이 함께 뒤섞여 어떤 덩어리를 구성하는 요소인바 다른 요소들이 사상捨象된 순수지각(형이상학적인 발상 등)을 붓다는 인정하지 않았다.

4) 행온行蘊(산스크리트어 saṃskāra-skandha)

‘行’은 의도意圖하고 지향하는 의식작용이다. 능동성ㆍ잠재성에 의한 의욕과 의지 등의 형성 작용이며 그중 특히 의지작용을 말한다. 현재 경험하는 어떠한 것을 실제 존재하는 것처럼 의욕하고 의지를 형성하는 작용으로서 수ㆍ상ㆍ식 이외의 모든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바람이 불어올 때 우리는 그 소리를 듣고 그것이 소리라는 것을 알며(이식耳識), 동시에 그것이 내면에 전달되어 그 소리가 바람이 불어서 나는 것임을 분별하는데(의식意識) 이러한 분별은 흐르는 물처럼 끊임없이 이어져 일어난다. 이처럼 앞의 물결을 따라 뒤 물결이 이어지듯 쉬지 않고 계속되는 것이 ‘행’이다.

‘행’이야말로 왜 순수지각이 존재할 수 없는가를 설명해준다. 붓다는 行이 色과 감각과 지각과 행온 자체와 의식 등이 각기 특이한 양상으로 작용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붓다의 입장에서 행은 인간의 개체화, 즉 지각의 개체화를 조성하는 요소이다.

행온에 의해 틀이 지어지거나 방향성을 부여받는 것은 비단 인격체만이 아니다. 우리의 환경, 예컨대 의식주로부터 우주공간에 이르기까지도 행온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다.

5) 식온識蘊(산스크리트어 vijñāna-skandha)

‘識’은 인간의 분별이나 인식작용을 가리킨다. 대상을 식별하고 판단하는 의식작용ㆍ인식작용 또는 마음의 작용 전반을 총괄하는 주체적 마음활동이다. ‘식’은 ‘행’에 의해 개체성이 확립된 인간존재의 연속성을 설명하는 요소로서 다른 요소와 마찬가지로 식도 나머지 요소(色ㆍ受ㆍ想ㆍ行)에 의존하여 존재하고 또 자료를 공급받는다.≫

空: ‘空’은 산스크리트어 수냐Śunya(팔리어 Suñña)의 한역으로 아무것도 없음(무無), 비어있음(Void, emptiness), 존재하지 않음(비유非有), 공적空寂의 뜻이다. ‘空’은 불교의 근본교리 중 하나로 인간을 포함한 일체 만물에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즉, 일체의 사물이나 현상은 모두 여러 조건들이 모여서 형성된 것이므로 그 조건이 변하게 되면 따라서 그 현상도 변하는 것인바 본래의 진정한 실체는 없다는 것이다.

‘공’은 불교 이전부터 널리 사용되어 인도의 수학에서 영零으로 사용되었고, 힌두교에서는 브라만(범梵)과 니르바나(열반涅槃)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후 ‘공’은 불교에서 현상계의 모든 사물의 이법理法을 설명하는 원리로서 근본사상이 되었으며, 대승불교의 핵심적 개념이자 반야사상의 요체이기도 하다.

한자로서 ‘空’의 자의는 ‘구멍(혈穴)’이며 공간적 개념으로의 ‘텅 빔’을 의미하는 문자이다. 일체의 사물은 상대성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것인바 현실에 존재하는 일체의 현상들은 모두가 여러 다양한 조건들이 집적되어 형성된 것으로 독립된 실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결합된 그 조건들이 변하면 존재하는 그 현상도 따라서 변하는바 그래서 그 진정한 실체없다는 것(空)이다.

위 구절에서는 ‘照見五蘊皆空’이라 하여 오온, 즉 현실세계의 모든 존재와 현상은 空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궁극의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의 경지에 이르면 모든 것이 空하다는 그것 또한 空한 것이라는 ‘진공眞空’이 된다.

‘진공’은 ‘참된 공空’이다. 욕심과 집착은 물론 내가 무엇을 가졌는지 그것조차도 인식함이 없는, 나 자신의 존재조차도 생각함이 없는 천연한 그대로의 의식 상태이며,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가진 인간본래의 마음이다. 이를 정확히 체득한다면 비로소 인공人空, 법공法空, 공공空空의 장애마저도 소멸되고 ‘만물과 차등 없이 하나로 되는 관조의 마음’이 되어 적멸寂滅(곧 열반)에 이르고,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대승의 입장에서) 열반에는 생사변화의 원인을 끊는 유여열반有餘涅槃과 생사변화의 결과마저 끊는 무여열반無餘涅槃이 있는데, 이는 다시 아라한의 열반과 보살의 열반 그리고 부처의 열반으로 구분하기도 한다.(知常曰明)

결국 ‘공’은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물체의 자성自性이 空하다는 것이며, 그 공성空性 혹은 공상空相을 말하는 것이다. ‘공’ 역시 하나의 실상이며 분명한 본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공’의 개념은 ‘색’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度一切苦厄: 이 구절은 현존하는 범어 원전 『반야심경』의 판본에는 찾아볼 수가 없고 구마라집 및 그보다 200년 후의 사람인 삼장법사가 변역한 한역본에만 나오는 구절이다.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다.

度: ‘도渡’와 같은 의미로 ‘(온갖 번뇌와 고통을 타파하여 피안의 세계로) 건너가다’ 혹은 ‘극복하여 건너 넘다’ 정도의 의미로 새긴다.

苦厄: 고통과 재액.]

아미타불阿彌陀佛(Amitāyus Buddha):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와 같은 말로 줄여서 미타彌陀라고도 한다. 아미타불은 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法을 설한다는 부처를 말하는데, 이 아미타불의 신앙을 중심으로 하여 성립된 것이 정토교淨土敎이다.

아미타란 이름은 산스크리트어 아미타바(amitabhas, 무량한 광명을 가진 것, 무량광無量光), 아미타유스(amitayus, 무량한 수명을 가진 것, 무량수無量壽)에서 유래하였다. Amita는 '끝없는', abha는 ‘광명’, ayus는 ‘삶’ 또는 ‘수명’을 의미한다. 즉, 아미타바는 ‘끝없는 광명’, 아미타유스는 ‘끝없는 삶(수명)’이란 의미가 된다. 아미타불은 앞의 ‘아미타’만 음역한 것이다.

그것이 중국으로 전해졌을 당시에 함께 ‘아미타’라고 음사音寫되었으므로 ‘아미타’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아미타와 함께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는 의역명칭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서 아미타불은 과거에 ‘법장法藏’이라는 구도자(보살)였는데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願을 세우고 오랫동안 행行(수행)한 결과 그 원을 성취하여 지금부터 10겁劫 전에 부처가 되어 현재 극락세계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아미타불은 아미타불에 귀의한다는 의미의 염불할 때 외우는 주문이다. ‘나무’는 ‘귀의하다’ 또는 ‘귀명하다’의 의미가 된다.

淨土: 번뇌煩惱의 속박束縛을 벗어난 아주 깨끗한 세상으로 서편에 있다는 극락세계를 말한다. 유마경維摩經에서는 마음이 깨끗하여 성불成佛에 이르면 정토는 도처에 있다고 하며, 서방정토西方淨土도 그중 하나이다.≫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여! 색(일체의 현상)이 공(실체가 없음)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느니라. 색이 곧 공 이것이고 공이 곧 색 이것인 것이다. (명온으로서의) 수ㆍ상ㆍ행ㆍ식 역시 (근본적으로 색온과 같이 동일한 양상으로) 반복되느니, 이와 같다.

 

[注] 舍利子: ‘舍利’는 산스크리트어 ‘śāri’의 음사이며, ‘子’는 산스크리트어 ‘putra(아이)’의 의역이다. 사리자는 석가모니불 십대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지혜제일智慧第一의 불제자인 사리불과 동일 인물이다.

사리자(사리불舍利佛, 사리푸타라Śāriputra)는 마갈타국 왕사성 북쪽의 나라촌那羅村에서 바라문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젊을 때부터 학문이 뛰어나 당시 육사외도六師外道의 한 사람인 산자야의 제자가 되어 나중에 250명의 제자 중 일인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친구인 목건련(목련존자)과 함께 250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석가모니불에게 귀의했다.

일찍 깨달음을 얻어 대중의 신뢰와 존경을 받았으며 주로 교화 활동에 종사하였고, 경전 중에는 석가를 대신하여 설법한 경우도 적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석가모니불의 아들 라훌라의 스승이기도하였으며 석가모니의 후계자로 지목받았기도 하였으나 석가모니보다 먼저 입적했다.

色: ‘형색形色’ 혹은 ‘색신色身’의 의미로서 형상과 질량을 가지고 있는 ‘일체의 물질적 현상’을 가리킨다. 즉, ‘色’은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일체의 형상과 물질 또는 모든 존재라 할 수 있으며, 오온의 나머지 사온에 대하여 물질적 측면을 말한다.(앞 단락의 오온五蘊 중 ‘색온色蘊’ 참고)

空: ‘空’은 불교의 근본교리 중 하나로서 인간을 포함한 일체 만물에는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음을 말한다. ‘공’은 불교 이전부터 인도의 수학에서 영零으로 사용되었고, 힌두교에서는 브라만(범梵)과 니르바나(열반涅槃)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후 ‘공’은 불교에서 현상계의 모든 사물의 이법理法을 설명하는 원리로서 근본사상이 되었으며, 대승불교의 핵심적 개념이자 반야사상의 요체이기도 하다.

한자로서 ‘空’의 자의는 ‘구멍(혈穴)’이며 공간적 개념으로의 ‘텅 빔’을 의미하는 문자이다. 일체의 사물은 상대성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것인바 현실에 존재하는 현상들은 모두가 여러 다양한 조건들이 집적되어 형성된 것으로 독립된 실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결합된 그 조건들이 변하면 존재하는 그 현상도 따라서 변하는바 본래 그 진정한 실체는 그래서 없다는 것(空)이다.

결국 ‘공’은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물체의 자성自性이 空하다는 것이며, ‘공’ 역시 하나의 실상이며 분명한 본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공’의 개념은 ‘색’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앞 구절 ‘照見五蘊皆空’ 참고)

色不異空 空不異色: (일반 중생의 수행에 있어서는) 색(일체의 현상)이 공(실체가 없음)과 다르지 않으나, 또한 (보살의 경계에서는) 공이 색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色不異空’은 세속의 중생에 대하여 일체의 색상色相(‘相’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의 형상形相 또는 성질性質)이 모두 고유한 실체가 없는 신기루와 같음을 말하고, ‘空不異色’은 성문승, 연각승 등 이승二乘의 수행에 있어서 공에 대한 집착을 타파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色卽是空 空卽是色: (일반의 중생의 수행에 있어서는) 색이 곧 공 이것이라 하되, (성문승, 연각승의 수행 단계에서는) 공 그것도 곧 색 이것임을 알아야 한다. ‘空’은 불교 교리의 기본 틀을 구성하는 핵심 키워드이다.

‘色卽是空’이라는 말은 일체 사물의 현상이 모두 각각의 인연에 의하여 생기는 것인바 그것은 모두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空’은 ‘아무것도 없음’, ‘존재하지 않음’, ‘허공虛空’ 등의 의미로서 ‘비유非有’를 말하는 것이되, 색이 멸하면 전혀 아무것도 없다는 ‘무無’를 말함이 아니다.

한자의 ‘空’은 그 어원이 ‘혈穴(구멍)’로서 공간적 개념으로서의 ‘텅 빔’을 의미하는 문자인데 여기의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에서 ‘空’은 물리적 공간개념으로서 ‘아무것도 없음’, 즉 ‘텅 빔(허공虛空)’의 의미이다. 그리고 뒤에 나오는 ‘제법공상諸法空相’에서의 ‘空’은 정신적ㆍ심리적 공간으로서 ‘텅 빔(虛)’, 즉 ‘허무虛無’의 개념에 가깝다.

일체의 사물은 본래 자성自性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인연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것인바 ‘색’은 본질적으로 가상假相이며 허상虛像이라는 것이다. 여기의 ‘색’은 우주에 존재하는 일체의 형상을 모두 포함하는 의미이고, ‘공’의 개념은 그러한 ‘색’의 존재를 전제로 한 실상인 것이다.

≪참고: 『반야심경』에서의 ‘空’만큼 『노자』에서 구조적으로 같은 위치에 있는 글자는 ‘無’이다. 똑같은 개념으로 비교할 수는 없으나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에서의 ‘空’은 『노자』 제14장 ‘복귀어무물復歸於無物’에서의 ‘無’에 가깝고, ‘제법공상諸法空相’에서의 ‘空’은 제16장 ‘치허극수정독致虛極守靜篤’의 ‘虛’에 가깝다.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교의 원전이 한역으로 된 것은 대체로 중국 수ㆍ당 시대로 알려져 있는데, 이때 기존의 사회 주류사상인 『노자』나 『장자』의 ‘無’ 및 ‘虛’와 차별화를 꾀하면서 그 의미를 모두 포괄하는 용어로 ‘空’이 사용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여! 이 모든 은 공의 모습이니 (그로써 세상 만물은 본래) 불생불멸하고(생성도 소멸도 하지 않고) 불구부정하며(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부증불감하느니라(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느니라).

 

[注] 諸法空相: 앞의 ‘색불이공~공즉시색’이 인류적인 측면을 말하였다면, 이 구절부터는 ‘諸法空相’이라 하여 우주적 측면으로 공성空性에 대한 의미를 확대하고 있다.

諸法: 모든 법. 여기서 ‘모든 법’은 세간의 일체 현상의 법칙 혹은 규범, 패턴 등을 말한다. 즉, ‘法’은 세간에 존재하는 사물과 일체 현상의 어떤 작동방식, 법칙, 이치, 패턴 그리고 석가의 가르침인 불법, 진리 등을 포괄하는 의미이다.

‘法’은 산스크리트의 ‘다르마Dharma’의 한역漢譯으로 달마達磨ㆍ담마曇摩ㆍ담무曇無 등으로 음역하며 그 기원은 인도의 고전 『베다veda』에까지 소급된다. ‘다르마’란 말은 불교에서 처음 사용한 말이 아니라 일찍이 인도 고대의 문헌인 『베다』 이래 브라만교의 여러 문헌들 속에서 사용되어 온 말이다. 다르마는 다르dhar라는 동사어근動詞語根으로부터 파생한 말로서 ‘유지하다’, ‘질서秩序지우다’ 등의 뜻이 있다. 따라서 ‘다르마’는 ‘∼을 유지하는 것, 질서지우는 것’ 등의 의미로 새길 수 있다.

베다시대의 달마는 리타(산스크리트어 rta, 천칙天則) 등과 함께 자연계의 법칙, 인간계의 질서를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브라마나ㆍ우파니샤드 시대에는 ‘인간의 행위’의 규정으로 사용되어 법칙ㆍ질서의 의미 외에 (정당正當ㆍ정의正義의 범위로서) 권리權利 및 의무義務, 규범規範과 같은 의미가 첨가되었다.

팔리어 주석서에 따르면 ‘法’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한다.

1. 인因(hetu): 올바른 인과因果 관계로 합리ㆍ진리를 가리킨다. 연기緣起는 법이라고 하는 말이 그것으로, ‘연기의 도리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보편타당성이 있는 진리’라는 의미이며, 이는 규칙ㆍ법칙 등의 의미와도 상통한다.

2. 덕德(gu): 인간이 지켜야 할 정도正道, 도리, 즉 윤리성을 가리킨다. 아소카 왕의 법칙문法勅文은 상기한 합리성과 윤리성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3. 교敎(가르침, āsana): 특히 불법佛法, 즉 석가의 가르침을 말한다.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 및 불佛ㆍ법法ㆍ승僧의 삼보三寶 중 법보 등이 이러한 의미로 사용되며, 나아가 경전經典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법통法統ㆍ법호法號ㆍ법회法會ㆍ법고法鼓ㆍ법등法燈 등은 모두 불법의 의미이다.

4. 사물事物: 일체법一切法ㆍ제법무아諸法無我ㆍ법성法性 등이 이러한 의미이다. 후에 아비달마阿毘達磨 철학에서는 ‘독자적 성질(자성自性)’ 또는 ‘존재의 본질(자상自相)’을 유지하기 때문에 법이라 한다고 정의하여 법을 실체實體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사물을 실체로 보는 데 반대하여 법공法空 또는 법무아法無我를 주장한다.

사물을 실체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대승불교의 사상은 12처설十二處說에 잘 나타나 있는데, 여섯 인식기관(眼ㆍ耳ㆍ鼻ㆍ舌ㆍ身ㆍ意의 6근根)과 그에 대응하는 여섯 인식대상(色ㆍ聲ㆍ香ㆍ味ㆍ觸ㆍ法의 6경境)에서 특히 법은 인식ㆍ사고의 기능을 갖는 의意(manas)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때의 법은 실체적 대상(vastu)으로서가 아니라 인식대상(aya)으로 파악되며, 모든 존재는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주관과 객관의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서 그 존재의의를 지닌다는 것이다.

여기의 ‘제법’은 특히 ‘오온제법’을 말하며, 오온의 집적과 인연 생기生起의 결과로 발생하는 일체 현상의 법칙, 규범, 패턴 등을 가리킨다. 즉,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판단과 행동으로 인한 일체 현상의 패턴, 규칙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세간의 일체 현상과 이치理致를 제법諸法이라 할 때 이와 비교되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불법佛法이다. 현대의 학자들은 ‘法’을 경험적(empirical) 법과 초경험적(transcendental) 법으로 나누기도 한다.

空相: ‘空相’은 산스크리트어 ‘śūnyatā-lakṣaṇa’의 의역으로 공空의 상태ㆍ성질ㆍ특징을 의미하며, 혹은 산스크리트어 ‘ākāśa-lakṣaṇa’의 허공虛空의 상태ㆍ성질ㆍ특징을 의미한다.

‘空’은 아무것도 없음(무無), 존재하지 않음(비유非有), 공적空寂의 뜻이다. 욕심과 집착은 물론 내가 무엇을 가졌는지 그것조차도 인식함이 없는, 나 자신의 존재조차도 생각함이 없는 천연한 그대로의 의식 상태를 말한다.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가진 인간본래의 마음이 ‘참된 공空’, 곧 ‘진공眞空’이다.

‘相’은 얼굴의 생김새나 모습을 나타내는 글자로 불교에서는 존재, 사물, 대상 등의 뜻으로 쓰이며, 불교의 전적에서는 ‘性(성질)’과도 특별한 구분이 없이 통하는 글자이다.

諸法空相: 공상空相은 공성空性과 같으며, 현실세계의 모든 현상은 공空의 모양(공의 성질)이라는 의미이다. 즉, 현실에서 존재하는 일체의 사물과 현상들은 모두 인연의 화합으로 발생하는바 그 실체(본질, 자성)는 본래 공(아무것도 없음, 자성이 없음)의 모습이다.]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의식계

意識界

이러하므로 공상空相(공성空性, 곧 공의 성질) 가운데에는 색온(일체의 물질적 현상)이 없고, 수온(감수感受작용)ㆍ상온(상념想念이나 단편적 생각)ㆍ행온(의식意識과 의지意志작용)ㆍ식온(분별分別이나 인식認識작용)의 사온(일체의 심리적 현상)도 없다.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의 6근)도 없으며,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의 6경)도 없다(곧, 12처도 없다).

(18계의 첫 번째 요소인) 안계가 없고 그로부터 (18계의 마지막 요소인) 의식계까지도 (일체가 공성이라) 없다.

 

[注] 앞에서 ‘五蘊皆空’이 오온을 인류관의 측면에서 보는 小乘의 입장이라면, 여기서는 오온을 우주관의 측면에서 인식하는 大乘의 입장이다.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공성(의 상태) 그 한가운데에는 색온(일체의 물질적 현상)이 없고(가유假有이고), 수온(감수感受작용)ㆍ상온(상념想念이나 단편적 생각)ㆍ행온(의식意識과 의지意志작용)ㆍ식온(분별分別이나 인식認識작용)의 사온도 없다(허상虛像이다).

육근六根: 신체의 일부로서 몸의 안팎에서 기능하는 신체기관. 육근(the six organs of perception)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 안(눈)ㆍ이(귀)ㆍ비(코)ㆍ설(혀)ㆍ신(신체)ㆍ의(意-뜻, 의사)의 안근眼根ㆍ이근耳根ㆍ비근鼻根ㆍ설근舌根ㆍ신근身根ㆍ의근意根을 가리킨다.

6근根은 6경境이라는 객관을 감지하는 주관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6식識의 대상으로서 6식을 발생시킨다.

육경六境: 신체기관이 보고 느끼며 작용하는 여섯 대상(객체)이다. 여기서 ‘경境’은 곳, 영역, 대상, 객체, 경우境遇 등을 의미하며, ‘육경(the six objects)’은 6근에 상대되는 객체를 말한다.

즉, 육경은 색(형상과 물질物質을 보고 느낌)ㆍ성(소리를 듣고 느낌)ㆍ향(향취 등의 냄새를 맡고 느낌)ㆍ미(맛을 보고 느낌)ㆍ촉(신체의 접촉으로 감각함)ㆍ법<일체 현상의 법칙, 규범, 패턴 등을 느끼고 생각함>의 대상으로서 색경色境ㆍ성경聲境ㆍ향경香境ㆍ미경味境ㆍ촉경觸境ㆍ법경法境(현상계 일체의 법칙, 규범, 패턴 등)을 가리키며, 육진六塵 또는 육적六賊이라고도 한다.

육식六識: ‘육식(the six consciousnesses)’은 육근과 육경이 서로 작용하며 인식하여 이루어지는 여섯 가지 기본적인 판단과 분별작용이다. 眼ㆍ耳ㆍ鼻ㆍ舌ㆍ身ㆍ意의 6근根에 의존하여 色ㆍ聲ㆍ香ㆍ味ㆍ觸ㆍ法의 6경境을 인식하는 여섯 식識으로 안식眼識(눈으로 물질과 현상을 보고 느낀 것을 인식하여 판단하고 분별함)ㆍ이식耳識(귀로 소리를 듣고 느낀 것을 인식하여 판단하고 분별함)ㆍ비식鼻識(코로 냄새를 맡고 느낀 것을 인식하여 판단하고 분별함)ㆍ설식舌識(혀로 맛을 보고 느낀 것을 인식하여 판단하고 분별함)ㆍ신식身識(신체의 접촉으로 감각하여 느낀 것을 인식하여 판단하고 분별함)ㆍ의식意識(사물과 현상에 대한 느낌과 단편적 상념 등을 인식하여 판단하고 분별하고 거기에 욕구와 의지를 더하여 일련의 사고체계를 형성함)을 말한다.

十二處(十二入): ‘處’는 ‘곳’, ‘장소’이다. 십이처(the twelve loci)는 몸의 내부에 있는 6근根과 외부 객체인 6경境을 합친 의미로 지각이 생기는 12가지 장소 또는 조건을 말하며, 육근과 육경이 서로 진입한다는 의미에서 십이입十二入이라고도 한다.

세계의 성립 조건을 주관과 객관의 상호관계로 보고, 내적이며 주관적인 여섯 조건(6근根)과 외적이며 객관적인 여섯 조건(6경境)을 대응 관계로 묶어 표현한 것이 12처處이다. 즉, 눈은 색깔과 형체에, 귀는 소리에, 코는 향기에, 혀는 맛에, 신체는 감촉에, 마음은 일체의 현상에 각기 대응한다. 원시불교에서 12처의 의미는, 대상을 인식하는 감각 기관인 6근이 인간의 존재를 의미하고 6경은 인간을 둘러싼 자연 환경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체의 세계, 곧 세계의 모든 것을 뜻하고 있다.

十八界: 십팔계는 眼界ㆍ耳界ㆍ鼻界ㆍ舌界ㆍ身界ㆍ意界의 여섯 가지와, 色界ㆍ聲界ㆍ香界ㆍ味界ㆍ觸界ㆍ法界의 여섯 가지, 眼識界, 耳識界, 鼻識界, 舌識界, 身識界, 意識界의 여섯 가지로 구성된다.

여기서 ‘界’는 각각의 범위와 한계를 의미하여 육근은 내계를, 육경은 외계를, 육식은 중계를 뜻하고 있다. 십팔계는 인간을 중심으로 세계의 일체 현상과 사물의 구성을 설명하는 분류인데 인간의 몸에는 각각 이 십팔계가 구비되어 있으므로 십팔계는 중생 그 자체를 가리킨다고도 할 수 있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를 합쳐서 일체一切 혹은 삼과三科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