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해석 3

반야심경 해석 3

나무와 까치 2019. 11. 10. 16:46

□ 般若波羅蜜多心經반야바라밀다심경 해석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성문승이 추구하는 경지로서) 고ㆍ집ㆍ멸ㆍ도(의 사제)도 없으며, (또한, 보살의 수행에 있어서) 지혜도 없고 (더 이상의) 증득할 것도 역시 없다.

 

[注] 여기까지가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에 대한 설명이다. 그리고 다음 구절부터는 '도일체고액'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이 부분은 법문이나 명상, 불과의 증득 등에 대한 집착을 타파할 것을 말하면서 이러한 집착마저도 벗어나는 것이 성문승ㆍ연각승 및 보살의 수행목표라고 한다. 그리고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그로써 지극한 열반의 경지를 궁구하게 된다는 것이며, 그것이 반야심경의 궁극적 목표라고 한다.

연각승이 수행하는 십이인연의 법문이나 성문승이 수행하는 사제의 도리, 대승보살이 수행하는 육도만행六度滿行 역시 모두 공한 것이다. 물론 이는 대도불법大道佛法을 이룬 이후의 관점이며, 연각승 및 성문승 그리고 보살의 수행관점에서 이러한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보살은 육바라밀다(육도법문)를 수행하여 스스로 진공眞空의 지혜(대반야大般若)를 얻고, 또 중생을 제도한다. 반야진체般若眞體의 관점에서 보면 보살이 수행하는 ‘(반야의) 지혜’라는 것은 사실 본래 공적空寂한 인간의 진면목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 달리 지혜라고 할 것도 없다. 그 때문에 달리 증득할 것도 없다는 것이며, 그로써 진정한 앎과 진정한 얻음, 곧 ‘진공眞空’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불과佛果는 연각緣覺, 성문聲聞, 보살菩薩, 불佛(부처)의 네 가지를 말한다.

無苦集滅道: ‘苦集滅道’는 사제四諦의 첫 글자이다. ‘無苦集滅道’는 곧 ‘사제공四諦空’을 말하는데, 이는 성문승이 추구하는 사제의 한계를 초월하여 법집 및 법아의 타파를 의미한다.

여기서 ‘무無’는 단지 사전적인 의미의 ‘없음’이라기보다는 ‘공空’의 의미로서 ‘초월’ 혹은 ‘자성이 없음’ 정도로 이해하여야 한다. 불교에서의 ‘空’은 정확하게는, ‘자성이 없음’, ‘자성이 공함’, ‘자성이 공허空虛함’ 정도의 의미이며, 혹은 ‘본질적으로 본체가 아님’, ‘본체의 관점에서 공함’, ‘본체의 관점에서 공허함’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제의 수행법문은 성문승이 추구하는 경지인데 석가가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비구比丘에게 설한 최초의 설법인 초전법륜初轉法輪에서 ‘사제’도 결국은 ‘공(실체가 없음)’이라 하였다.

四諦: ‘사제四諦’ 또는 ‘사성제四聖諦’는 산스크리트어 Āryasatya의 한역으로 ‘제諦(사티야satya)’는 ‘진제眞諦’ 혹은 ‘진리眞理’를 뜻하고, ‘성聖(아리야Ārya)’은 ‘높은’ 혹은 ‘고귀한’ 등의 뜻으로 네 가지 높고 큰 진리 정도의 의미가 된다. ‘사제四諦’는 『아함경阿含經』에 나오는 성문승의 기본 교의이며 원시 불교의 기본교의 중 하나로 사성제四聖諦 혹은 사진제四眞諦라고도 하며 흔히 이 네 가지를 간단히 고집멸도苦集滅道라고도 부른다. 고집멸도는 고통의 원인이 집착 또는 갈애이며 고통을 소멸시키는 원인 또는 수단이 도라는 연기관계를 밝힌 것이다.

‘사제四諦’는 고제苦諦ㆍ집제集諦ㆍ멸제滅諦ㆍ도제道諦의 4가지 진리 또는 깨우침으로서 그 요체는 지고知苦, 단집斷集, 증멸證滅, 수도修道이며, 고와 집은 세간世間의 인과를, 멸과 도는 출세간出世間의 인과를 말한다.

1. 고제苦諦(산스크리트어 Duhakaha Satya): ‘고제苦諦’는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의 오온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삶(즉, 아직 부처가 되지 못한 범부의 삶)은 그 자체가 고통(苦)이라는 것이다.

고제는 삼계(욕계ㆍ색계ㆍ무색계)의 중생이 태어나고 살아가는 것이 모두 고통이라는 입장으로 인생과 삼계의 모순과 결함을 밝히고 있다. 즉, 생ㆍ노ㆍ병ㆍ사를 수반하는 인간 존재를 고苦라고 인식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며, 미망迷妄속에 살고 있는 중생들의 생존은 그 자체가 그대로 괴로움이라는 관점으로 이는 인생에 대한 불교적 가치관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 고苦는 크게 고고苦苦, 괴고壞苦, 행고行苦 등 3고三苦로 분류되며, 3고는 다시 8고八苦로 세분되기도 한다. 고고苦苦는 누구나 고통으로 느낄 수 있는 생生ㆍ노老ㆍ병病ㆍ사死의 네 가지 고통을 말한다. 괴고壞苦는 모든 것이 인因과 연緣에 의해 발생한다는 연기의 법칙(즉 인과의 법칙)과 모든 존재가 고정됨이 없이 항상 변화한다는 무상無常의 법칙을 바탕으로 일어나는 ‘변화하고 무너지는 고통’으로, 여기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愛別離苦),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고통(怨憎會苦), 갈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求不得苦)의 세 가지가 있다. 행고行苦는 오온 또는 오취온으로 이루어진 존재인 인간이 자기 스스로에 대하여 ‘나’라는 실체가 있다고 집착함에서 비롯하는 고통으로 이에는 오취온고五取蘊苦(또는 오음성고五陰盛苦)가 있다.

고제를 수련할 때 세간의 상常, 락樂, 아我, 정淨에 대한 집착을 치유하기 위하여 네 가지 상相을 관조하는 것으로서 고苦, 무상無常, 무아無我, 공空의 사행상四行相이 있다.

2. 집제集諦(산스크리트어 samudaya-satya): 중생의 삶은 그 자체가 괴로움이며 그러한 고통은 모두 번뇌煩惱나 업이 원인이 된다는 관점이다. 남방상좌부불교에서는 번뇌 중에서 인간의 갈애渴愛 또는 망집妄執을 핵심적인 고통의 원인으로 보며, 대승불교에서는 ‘나’ 또는 ‘나의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무지無知ㆍ무명無明에서 비롯된 아집我集 또는 망집妄執을 고통의 주원인으로 본다.

‘集‘은 고苦를 집기集起하는 것으로 집적集積 또는 집기集起, 기인起因 등의 의미가 있으며, 습제習諦 혹은 고집제苦集諦라고도 한다. 『중아함경』에 ‘집集’은 ‘사랑하고 치근대며 물들고 집착하는 것’이라 하였다.

중생이 스스로 취하는 생존이 바로 고가 되는 것은 마음 깊이 갈애渴愛가 있기 때문이다. 갈애는 모든 욕망의 근저가 되며 결국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서 인간의 모든 불행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갈애는 욕애慾愛(감각적 욕망)ㆍ유애有愛(생존의 영속을 바라는 욕망)ㆍ무유애無有愛(생존의 단절을 바라는 욕망)의 세 가지가 있다.

집제를 수련할 때 인因, 집集, 생生, 연緣 사상四相을 관조하는 것은 네 종류의 탐애를 치유코자 하는 것이며, 집제와 고제는 미망의 원인과 결과를 표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멸제滅諦(산스크리트어 nirodha-satya): 고집苦集의 멸滅을 말하는데, 괴로움의 원인인 번뇌를 절멸絶滅함으로써 모든 고통이 소멸되어 영원히 어떠한 고통도 없는 열반涅槃을 증득한다는 것이다. 멸은 출우出寓, 원우遠寓, 무위無爲, 불사不死 등의 의미를 가지며, 이는 마음이 갈애의 속박에서 벗어난 절대자유와 평화의 세계이므로 해탈解脫이라고도 한다. 멸제의 사상으로는 멸滅, 정靜, 묘妙, 리離가 있다.

‘열반’은 ‘멸滅’로도 번역되는바 일부에서는 열반을 허무로 오해하기도 하는데 ‘멸’은 갈애의 멸이지 마음 그 자체의 멸은 아니다.

4. 도제道諦(산스크리트어 mārga-satya): 고집멸苦集滅의 도道로서 아라한이 적멸해탈에 이르는 수행법을 말하며, 도제는 달리 ‘고출요제’ 또는 ‘고멸도성제’라고도 한다.

‘도제道諦’는 일체의 고통을 없애고 열반에 도달하는 수행의 길 혹은 수행의 요체로서 원시불교 경전인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서는 팔정도八正道(또는 팔품도八品道, 팔성도八聖道)를 언급하며, 대승불교에서는 육바라밀다를 도제로 본다. 도제의 사상으로는 도道, 여如, 행行, 출出이 있다.

≪팔정도八正道: 8정도(산스크리트어 āryāṣṭāṅgamārga, 팔리어 pa ariyo aṭṭhaṅgiko maggo)는 도제의 실천항목으로서 석가의 근본교설이며, 멸제를 성취하는 원인이 되는 ‘여덟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길 또는 수단’을 말한다. 즉,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8가지 수행덕목으로서 중생이 고통의 원인인 탐貪ㆍ진瞋ㆍ치痴를 없애고, 고苦를 끊고 해탈解脫하여 열반涅槃(멸진滅盡, 멸도滅度, 적멸寂滅, 적정寂靜)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말한다.

팔리어에서 길(道)은 막고(maggo)라는 단수형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것은 여덟 개의 길이 전체로서 하나를 이루고 있으며 또한 각각의 길은 나머지 일곱을 포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여덟 개의 길 가운데 어느 하나가 실천되면 다른 일곱 개의 길이 그 하나에 포함되어 동시에 행하여지는 관계에 있다. 이러한 취지에 따라 팔정도의 영어 번역도 ‘Noble Eightfold Path’라고 하여 길(Path)을 복수가 아닌 단수로 표현하고 있으며, 여덟도 단순한 여덟(eight)이 아닌 팔중八重(eightfold)으로 표현하고 있다.

팔정도는 중도中道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열반에 이르는 바른 길은 감각적 쾌락을 구하는데 있는 것도 아니고 지나친 고행으로서 자신을 괴롭히는데 있는 것도 아니며 그 양 극단을 떠나 있다는 의미이다. 이는 팔성도八聖道, 8지성도八支聖道, 팔정각로八正覺路, 팔정로八正路, 팔도八道, 팔도행八道行, 팔로八路, 팔종도八種道, 팔직도八直道, 팔진도八眞道, 팔품도八品道라고도 한다.

상좌부불교에서 8정도는 순차적인 단계가 아니라 완전한 깨달음(즉 열반)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구성요소들을 나열한 것으로 서로가 서로를 돕는 관계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실천 수행이라는 측면에서는 8정도를 크게 계戒ㆍ정定ㆍ혜慧의 3학三學으로 분류하는데 정견ㆍ정사유가 혜에 속하고, 정어ㆍ정업ㆍ정명이 계에 속하며, 정정진ㆍ정념ㆍ정정이 정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한다. 계ㆍ정ㆍ혜는 서로를 도와 깨달음을 증득하게 하는 것이지만 크게는 계에 의지하여 정을 득하고, 정에 의지하여 혜를 득한다고 본다.

① 正見(바른 봄, 팔리어 Samma ditthi, 영어 Right Understanding): 바르게 봄, 즉 바른 견해라는 뜻이며, 엄밀한 의미로는 인과의 도리, 즉 원인과 결과의 법칙(즉, 연기법)을 바르게 아는 지혜를 말한다. 보다 넓은 뜻으로 정견은 5견五見(유신견有身見, 변집견邊執見, 사견邪見, 견취見取, 계금취戒禁取 등의 부정견不正見)을 멀리 떠난 상태를 말한다. 이는 곧 불교에서 인정하는 바른 세계관 또는 인생관 모두를 가리킨다.

‘정견’은 사제四諦에 대한 이해를 통해다. 곧, 사제와 팔정도에 대한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직시함으로써 깨달음을 얻고자 함이다.

일상적인 의미에서 무엇을 안다는 것은 축적된 기억이나 주어진 자료를 통하여 어떤 주제를 추론하는 ‘분별지分別智’를 말하는데 그것으로는 심오한 이치를 관조할 수 없다. 결국, 사물의 근본을 직시하는 무분별지無分別智야말로 참된 반야의 지혜로 들어가는 통문通門이라 할 것이다.

② 正思(정사유正思惟, 바른 사유, Samma sankapp, Right Thoughta): ‘정사’는 모든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천연한 그대로의 평화롭고 참된 본래의 마음을 회복하고자 함이다.

③ 正語(바른 언어, Samma vaca, Right Speech): 말은 곧 생각이므로 말을 절제함으로써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얻을 수 있는바 거짓말, 헐뜯는 말, 무례한 말, 허튼 말 등을 삼간다.

④ 正業(바른 행위, Samma kammanta, Right Action): 모든 행위는 말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발로이므로 함부로 살생하지 않고,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으며, 부도덕한 거래를 삼가고, 성적性的인 방종을 삼가는 것을 이른다. ‘정업’은 곧 도덕적이고 조화로운 행동을 의미한다.

⑤ 正命(바른 생활, Samma ajiva, Right Livelihood): 검소하고 정당한 의식주에 의한 올바른 생명활동을 말한다. 생업을 영위함에 있어 남에게 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무기, 마약, 독극물 등의 거래나 사기 등 부도덕한 행동을 멀리하고 검소하고 정당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⑥ 正勤(정정진正精進, 바른 노력, Samma vayama, Right Effort): 사악하고 온당치 못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그런 마음이 이미 일어났다면 이를 제거하며, 선하고 건전한 참마음을 일으키고 일으킨 참된 마음을 계발하여 완성에 이르도록 정진하는 것을 말한다.

⑦ 正念(바른 이념, Samma sati, Right Mindfulness) 바른 이념理念 혹은 바른 상념想念, 곧 바른 이성적 개념이다.

⑧ 正定(바른 선정, Samma samadhi, Right Concentration): 마음을 맑고 고요하게 집중하여 선정禪定(Dhyana)으로 이끄는 수행이다.

첫 단계에서는 오개五蓋, 즉 청정한 마음을 덮는 다섯 가지 번뇌인 탐욕개貪欲蓋(끝없이 탐하는 번뇌), 진에개瞋恚蓋(성내고 증오하는 번뇌), 수면개睡眠蓋(마음을 흐리게 하는 번뇌). 도회개掉悔蓋(마음이 흔들리고 후회하는 번뇌). 의개疑蓋(부처의 가르침을 의심하는 번뇌)와 같은 강렬한 욕망이나 잡념이 사라지고 기쁨과 행복의 감정들이 유지된다.

둘째 단계에 이르러서는 모든 지적인 활동이 통제되고 마음이 고요해지면서 한 곳으로 집중된다. 기쁨과 행복의 감정은 여전히 유지된다.

셋째 단계에 이르면 기쁨의 감정이 수면 아래로 침잠되면서 고요한 행복감으로 융화되고 마음의 평정상태가 유지된다.

마지막 넷째 단계에서는 행, 불행, 기쁨, 슬픔 등 모든 감정이 사라지고 순수한 평정심과 또렷한 인식만이 남는다.

이상의 여덟 가지 덕목은 자신의 근기나 처한 환경에 따라 각자가 스스로 결정하여 몸소 추구하고 실천해야 하는 개인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그 수행의 순서는 의미가 없다.≫

≪육바라밀다六波羅密多: 보시報施ㆍ지계持戒ㆍ인욕忍辱ㆍ정진精進ㆍ선정禪定ㆍ반야般若의 여섯 가지를 말하며, 육도六度라고도 한다. 아집을 타파하고 생사의 차안을 멸하여 열반의 피안으로 가기 위한 것으로, 그 중 마지막 항목인 ‘반야’는 나머지 오도五度를 인도하는 위치에 있다.

그 중에서 ‘보시’와 ‘인욕’ 두 가지는 이타적인 대승불교의 특질을 나타내고 있는데, 육바라밀의 수행법에서 ‘보시’를 제일 앞에 둔 까닭은 대승불교가 중생 서로 간에 보시자선을 행하는 이타적 사회정신을 중요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시報施: 산스크리트어 다나dāna의 한역이며, 단나檀那 등으로 음역한다. 보시란 널리 베푼다는 의미로서 자비의 마음으로 다른 이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베풀어 주는 것을 뜻한다. 이에는 재물로써 조건 없이 베푸는 재시財施, 석가의 가르침 즉 진리를 가르쳐 주는 법시法施, 스스로 계를 지켜 남을 침해하지 않으며 다른 이의 두려움과 어려움을 구제해 주는 무외시無畏施의 셋으로 구분된다. 인색이나 탐애의 번뇌를 치유하며 중생을 이롭고 즐겁게 한다.

지계持戒: 계율을 몸에 지녀 자발적으로 지키어 피하지 않는 것을 이르며, 출가나 재가, 대승이나 소승의 모든 계법戒法과 선법善法을 포괄한다. 보살은 일체의 계법과 선법의 수행을 통하여 신身ㆍ구口ㆍ의意에 의한 일체의 악업을 단멸할 수 있다.

인욕忍辱: 산스크리트어 크산티Kṣānti의 한역으로, 일체 유정의 모욕이나 외계의 한열, 기갈 등을 참는 수행을 통하여 분노나 원한 등의 번뇌를 극복할 수 있다.

인욕에는 복인伏忍, 유순인柔順忍, 무생인無生忍(보살의 인욕행), 적멸인寂滅忍(부처의 인욕행)의 네 가지가 있다.

정진精進: 심신을 가지런히 하여 일체의 대행大行을 성실히 수련하면 나태함에 빠지지 않고 일체의 선법을 성취할 수 있다. 정진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몸과 입으로써 부지런히 착한 일을 닦고 배우며 실행하는 것이고, 둘째는 뜻을 항상 진리에 머무르게 하여 모든 생각이 참됨을 떠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선정禪定: ‘선禪’은 산스크리트어 드야나dhyāna(팔리어 자나jhāna)의 음사로 선나바라밀禪那波羅蜜이라고도 하며, ‘定’은 그의 뜻을 나타낸다. 선정은 곧 마음을 닦고 생각을 쉬는 것이다. 산만한 마음을 안정시키고 진리에 대하여 사유하며 한 경계에 몰입하여 ‘안이비설신의’의 육근을 제어하면 적정묘경寂靜妙境에 들 수 있다.

반야般若; 산스크리트어 프라즈냐(प्रज्ञा prajñā) 또는 팔리어 빤냐(paññā)의 음역으로 보통은 ‘(크나큰) 지혜’라고 의역한다. 불교 경전에서 산스크리트어 프라즈냐 혹은 팔리어 빤냐를 '지혜'라고 번역하지 않고 음역인 ‘반야’를 사용한 것은 깊고 원대한 본래의 뜻이 훼손되거나 가벼워진다고 보았기 때문에 보통의 판단능력인 분별지分別智와 구별하기 위하여 지혜라 하지 않고 반야라고 음역한 것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부처가 진여를 깨친 완전한 지혜, 즉 부처의 무분별지無分別智를 가리켜 반야般若 또는 마하반야摩訶般若ㆍ대반야大般若ㆍ대지大智라고 하며, 보리菩提ㆍ대보리大菩提ㆍ대원경지大圓鏡智 또는 구경각究竟覺이라고도 한다.

반야에는 문자반야文字般若(부처님이 설한 경經ㆍ율律ㆍ논論의 법), 관조반야觀照般若(경ㆍ율ㆍ논의 문자반야를 통하여 진리를 알아내고 그 진리에 의하여 수행하는 것), 실상반야實相般若(부처가 체득한 진리 그 자체)의 세 가지가 있다.≫

無智亦無得: 여기서 ‘智’는 ‘(반야의) 지혜智慧’이다. 이는 ‘오묘한 지혜’로서 무루지無漏智이며 성문聲聞ㆍ연각緣覺의 지혜이다. ‘無智’는 이미 고집멸도의 사제를 초월한 무고집멸도의 경지이며, 무수무루無需無漏의 지혜로서 자재해탈의 경지이다. ‘無得’의 ‘득’은 불과를 증득함 혹은 그러한 경지에 이름을 의미한다.

‘無智無得’은 대승보살에 있어서 성불을 향한 수행경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지에서는 지혜란 것도 없고 그 이상 더 깨달아 증득할 것도 없다. 알고도 아는 바가 없는 것이 진정한 앎이며, 얻고도 얻는 바가 없는 것이 진정한 얻음이다. 이는 행하면서도 행하지 않음의 경지인 것이다.]

 

이무소득 고보리살반야바라밀다 고심무괘애 무괘애고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以無所得 故菩提薩埵依般若波羅蜜多 故心無罣碍 無罣碍故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그렇게 달리 무엇을) 얻을 것이 없는바 그 때문에 (이러한 경지의)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큰 지혜의 피안에 다다름)에 의거한다. 그러므로 마음에 괘애(근심과 장애)가 없고, 괘애가 없으므로 공포(무섭고 두려움)가 없으며, 전도몽상을 영원히 멀리하여 저 끝의 (지극한) 열반(대열반, 성불)을 궁구하는 것이다.

 

[注] 이 수행단계에서 보리살타는 얻고자 하는 것이 없으며, 얻고자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구함도 없고 행함도 없음이 당연한 것임을 설명한다. 또한 그럼으로써 결국, 지극한 저 끝에 있는 열반(대열반, 성불)을 궁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菩提薩埵: ‘보리살타’는 산스크리트어 보디사트바bodhissattva를 음사音寫한 것으로 줄여서 ‘보리菩薩’라고도 한다. 산스크리트어 ‘보디bodhi(보리)’는 ‘budh(깨닫다)’에서 파생된 말로 깨달음(각覺)ㆍ불지佛智 혹은 ‘(깨달음의) 지혜’라는 의미가 있으며, ‘사트바sattva’는 ‘as(존재하다)’가 어원으로 생명 있는 존재를 말하는바, ‘보리’‘깨달음’ 혹은 ‘깨닫는 존재’, ‘깨달은 존재’로 새길 수 있다.

‘보리살타’는 ‘깨달음을 이룬 존재’라는 뜻에서 ‘각유정覺有情’이라 의역하는데, ‘대보살’의 의미로서 ‘대각유정大覺有情’ 혹은 ‘대중생大衆生’이라고도 하며 위로 보리(깨달음, 覺)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며 부처에 버금되는 성인으로 대승불교의 이상적 수행자상을 일컫는다.

원시불교에서 보리살타는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일반적인 의미로는 깨달음을 구하여 수도하는 중생, 구도자, 깨달음(의 지혜)을 가진 자 등으로 풀이되며, 중생衆生 또는 유정有情, 개사開士, 상사上士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우바리優婆夷(출가하지 않고 불제자가 된 여자)에 대한 존칭으로 쓰이기도 한다.

보살의 용어와 개념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2세기경에 성립된 『본생담本生譚』에서이다. 『본생담』은 석가모니가 전생에서 수행한 여러 행적을 기록한 책으로 이때의 보살은 후대에 나타나는 대승의 보살에 대하여 ‘본생보살本生菩薩’이라고 부른다.

心無罣碍: 눈앞의 일체 만물의 실체를 관조하는 것이 ‘空’이다. 그러한 수행이 깊어지면 어떠한 경계(사물과 현상)에 대해서도 마음이 동요하지 않고 헛된 망념이 일지 않게 된다. 그렇게 각종 망념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 어떤 근심도 장애도 없게 되는 것이 ‘심무괘애’이며, 곧 ‘자재自在’의 의미를 지닌다. ‘괘애’는 마음에 걸리는 어떠한 근심과 장애이다.

無有恐怖: 보살은 번뇌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났기에 마음이 청정하여 걸림이 없고 생사의 두려움이 없으므로 또한 그 어떤 두려움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중생은 근심과 번뇌에 휩싸이며 아집이나 법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갖가지 근심과 두려움에 시달리게 된다. 그 두려움은 ‘오외五畏’ 혹은 ‘오포외五怖畏’라고 하며 악명외惡名畏ㆍ악도외惡道畏ㆍ괴활외壞活畏ㆍ사외死畏ㆍ대중위덕외大衆威德畏의 다섯 가지로 말한다. ‘恐怖’는 결국 생사에 대한 두려움을 가리킨다.

顚倒: 일체의 사상이나 행위가 불합리한 것이다. 곧, 실상이 없는 현실세계에 대한 미련과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꿈속에서 헤매는 것과 같은 잘못된 인식이며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모두 포괄한다.

범부凡夫에 있어서는 아집과 법집에 미혹됨으로 인한 상전도常顚倒, 낙전도樂顚倒, 정전도淨顚倒, 아전도我顚倒의 사전도四顚倒가 있으며, 성문승과 연각승에 있어서는 이미 아집을 극복하였으되 여전히 법집에 얽매어 있음으로 인한 무상전도無常顚倒, 무락전도無樂顚倒, 무정전도無淨顚倒, 무아전도無我顚倒의 사전도가 있다. 대승의 관점에서는 아집과 법집을 타파하여야 진정으로 전도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夢想: ‘몽상’은 일체의 전도된 생각이나 인식으로, 즉 허망한 환상이다.

遠離顚倒夢想: 보살이 제법개공의 이치를 깨닫게 되면 일체의 불합리한 사상이나 망상에서 영원히 벗어나게 된다. 전도몽상을 타파하면 심신心身ㆍ자타自他ㆍ물아物我의 차등에서 벗어나고, 그렇게 각종 고액의 근본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생사로 인한 두려움이 없게 되며, 궁극적으로 구경열반에 이르는 것이다.

究竟涅槃: 저 끝의 (지극한) 열반(곧 대열반, 성불)을 궁구하다. 여기서 ‘究’는 궁구이며, ‘竟’은 ‘지극한 저 끝’의 의미이다. ‘열반涅槃’ 이란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의 음역으로 원래는 ‘취멸吹滅(불길이 꺼진 상태)’ 또는 적멸寂滅(모든 것이 사라지고 고요한 상태)을 의미한다. 부처님의 죽음을 그렇게 부른데서 연유하였는데 일반적으로 죽음의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다만 열반은 생명의 불길이 꺼진 상태가 아니라 바로 탐ㆍ진ㆍ치의 불길, 고통과 번뇌의 불길이 꺼져 일체의 장애가 사라진 상태를 가리키는바 열반이 죽음의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석가모니는 열반을 가리켜 절대 안온, 최고 낙樂, 안전, 섬, 피난처, 평화, 또는 불사不死라고까지 하며 현생에서의 열반을 무엇보다도 강조하였다.

‘구경열반’이란 대승보살이 추구하는 경지로서 대승보살이 반야에 의지하여 일체사물의 실체를 관조하며 인공人空, 법공法空, 공공空空의 세 가지 장애를 소멸시키고 일체의 번뇌와 얽매임에서 벗어나 자유자재로 생사를 넘나들며 중생을 제도하면서 점진적으로 성불의 경지를 향해 매진하는 경지를 말한다.

그로써 마음에 어떠한 걸림이나 장애도 없고 어떠한 두려움도 없이 일체의 전도몽상에서 벗어나게 되며, 궁극에는 이러한 구경열반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구경열반’은 대반열반大般涅槃을 궁구함이다. ‘대반열반’은 산스크리트어로 mahā-parinirvāṇa로 대멸大滅, 대멸도大滅度, 대입멸식大入滅識, 대원적입大圓寂入 등의 의미가 있다.

‘涅槃’은 멸滅, 멸진滅盡, 적멸寂滅 등의 의미로서 탐貪ㆍ진瞋ㆍ치痴의 삼독三毒이 모두 소멸되어 고통과 번뇌로부터의 해탈을 뜻한다. 또한, 열반은 모든 번뇌의 얽매임에서 벗어나 진리를 깨닫고 불생불멸의 법法을 체득한 경지이며, 일체一切의 번뇌를 해탈解脫하여 불도佛道를 이룬 경지를 말한다.

열반은 불교의 궁극적 목표이자 최고선인 만큼 그에 대한 언급은 어렵고 조심스러운데 어떤 면에서는 이미 이론의 영역을 넘어선 수행과 실천, 체험과 증득의 문제로 인식된다. 원시적 의미로서 열반은 완전한 적정寂靜을 뜻하며, 확장된 의미로는 해탈解脫, 불생불사不生不死, 무생무멸無生無滅, 항상적 희열喜悅 등으로 표현된다.

『대지도론大智度論(용수龍樹, 150년?-250년?)』에서는 유여의有餘依열반과 무여의無餘依열반의 두 가지를 말한다. 유식종唯識宗(법상종法相宗)에서는 유여의有餘依열반(번뇌의 장애에서 벗어났으나 육신은 여전히 남아있는 열반), 무여의無餘依열반(생사의 장애에서 벗어나 육신이 이미 없어진 회신멸지灰身滅智의 소승의 최종 경지),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번뇌장煩惱障이나 소지장所知障에서 벗어났으며 생사에도 머물지 않고 열반에도 머물지 않는 보살승의 경지), 본래자성청정열반本來自性淸淨涅槃(청정불변의 법성진여法性眞如의 상태로 중생 모두가 가지고 있고, 누구나 스스로 내면에서 증득할 수 있는 열반.)의 네 가지를 제시한다.

궁극적으로는 본래자성청정열반에 듦으로써 각행원만覺行圓滿한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이라 말한다. 즉, 마음과 법이 모두 평등하여 더 이상 얻을 바가 없는 상태의 원만한 불도佛道의 경지(부처의 경지)에 이름을 말하는데, 결국 사람이면 누구나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순수한 그대로의 마음’을 뜻한다.

: ‘法’은 세간의 사물 및 (일체의) 존재현상을 말하며, 또한 (우주운행에 있어서의) 어떤 일정한 작동방식, 패턴, 이치, 법칙, 진리 등의 의미로 쓰인다.(앞 구절 ‘諸法空相’의 ‘法’ 참고)]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 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 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과거 현재 미래 삼대겁三大劫의 모든 부처도 『반야바라밀다』에 의거한다. 그리하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무상정등정각)를 체득하느니라.

 

[注] 三世諸佛: ‘佛’은 부처를 말하는 것으로 ‘각자覺者’ 혹은 ‘묘각妙覺’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사람이 이룰 수 있는 (저 끝의) 지극한 경지이다. ‘각覺’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자각自覺ㆍ각타覺他ㆍ각행원만覺行圓滿이 그것이다. 불교의 설법에 의하면 범부는 세 가지가 모두 결여되어 있고, 삼승의 보살은 뒤의 두 가지가 결여되어 있으며, 부처만이 오직 세 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다.

‘삼세제불三世諸佛’은 ‘시방삼세제불十方三世諸佛’, 즉 시방삼세에 출현하는 모든 부처를 말한다. ‘三世’는 과거ㆍ현재ㆍ미래 혹은 전세ㆍ현세ㆍ내세를 말하며, ‘시방十方’은 동ㆍ서ㆍ남ㆍ북의 사방四方과 동남ㆍ동북ㆍ서남ㆍ서북의 사유四維 그리고 상하上下의 두 방향을 합친 의미이다. ‘諸佛’은 ‘모든 부처’ 곧 시방삼세十方三世에 존재하는 모든 부처이다.

‘시방삼세十方三世’는 불교적 관점의 시간과 공간개념이면서 오늘날 존재하는 일체의 시공개념이기도 하다. 대승大乘에서는 공간적으로 시방의 모든 부처가, 시간적으로 삼세에 걸쳐서 나타난다고 하여 시방횡화十方橫化 삼세수화三世竪化라고 하며, 소승에서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나타나는 1불佛 1불의 모든 부처를 가리킨다.

불교에서는 삼대겁三大劫, 즉 과거(장엄겁莊嚴劫) 현재(현겁賢劫 혹은 선겁善劫) 미래(성숙겁星宿劫)에 각각 천 명의 부처가 출현하였고, 출현한다고 한다. 과거불은 비바시불ㆍ시기불ㆍ비사바불ㆍ구류손불ㆍ구나함모니불ㆍ가섭불의 여섯 부처를 꼽는데, 석가모니불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입장에서 과거불로 인식하여 함께 ‘과거칠불過去七佛’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과거불은 가섭불迦葉佛(혹은 연등불燃燈佛)을 말하고, 현재불은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미래불은 미륵불彌勒佛을 말한다.

삼신불三身佛: 대승불교의 삼신설三身說에 부처는 법신法身ㆍ보신報身ㆍ응신應身(또는 응화신應化身)의 3가지 몸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 중 ‘법신法身’은 산스크리트어 다르마카야(Dharmakāya)의 한역으로 문자 그대로의 뜻은 진리의 몸(truth body) 또는 실재의 몸(reality body)이다. 따라서 법신은 진리 그 자체로서의 현실적인 존재(곧, 불법)이다. 보신은 보살의 원願ㆍ행行에 의하여 성취된 부처이며, 응신은 중생구제를 위해 그에 상응하여 나타나는 부처이다.

석가모니불은 2,500여 년 전 인도라는 특정의 지역과 시대에 나타난 응신의 불타로서 시방삼세제불十方三世諸佛의 일부가 되는데, 신앙의 입장에서 석가모니불은 위의 3신을 모두 갖추고 있는 부처로 숭배되고 있다.

삼신불三身佛은 법신불法身佛ㆍ보신불報身佛ㆍ응신불應身佛의 세 부처로서 곧 비로자나불ㆍ아미타불ㆍ석가모니불의 세 부처를 이른다. 비로자나불은 삼신불 중에서 불교의 절대 진리를 의미하는 부처로서 우주 만물을 창조함으로써 모든 만물이 이 부처에게서 탄생하였다고 한다.

‘비로자나’는 산스크리트어 바이로차나(Vairocana)의 음역으로 ‘두루 빛을 비추는 존재(태양)’라는 의미이다. 부처의 신광身光ㆍ지광智光이 법계法界에 두루 비추어 원만히 밝힘을 뜻한다. 법신은 빛깔이나 형상이 없는 우주의 본체인 진여실상眞如實相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부처를 신身이라고 하였으되 평범한 색신色身이나 생신生身이 아니라 갖가지 몸이 이것을 근거로 나오게 되는 원천적인 몸을 뜻한다.

‘비로자나’는 부처의 진신眞身을 뜻하여 ‘비로자나청정법신불’이라고 부르며, ‘여래’라 하지는 않는다. 석가모니가 이 부처의 응신應身이며, 신앙의 입장에서 비로자나는 곧 석가모니釋迦牟尼를 의미하기도 한다.≫

依般若波羅蜜多: ‘의반야바라밀다’는 수행방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성불成佛을 위한 필수조건이라 할 수 있으며 특히 부처의 수행을 의미한다. 보살들만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삼세의 모든 부처들이 이 반야에 의지하여 수행함으로써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의 과실을 얻은 것이다.

‘의반야바라밀다’는 생사윤회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즉 일체의 고통과 윤회가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해 그 원인과 결과를 인과율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불교에 있어서 인과율은 가장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우주의 본질적 진리라고 할 수 있으며, 불교입문에 있어서 기본적 이론인 동시에 불교의 가장 심오한 진리이다.

阿耨多羅三藐三菩提: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혹은 ‘무상정편각無上正遍覺’으로 의역하며, 그보다 더 이상이 없는, (십법계가 동등하게 일체가 되므로) 치우치지도 삿되지도 않는 (외도外道의 견해와는 다른) 정확한 깨달음을 뜻한다. 지극히 원만한 불과佛果로서 자재보리自在菩提라고 할 수 있으며, 모든 부처의 해탈의 경지로서 오직 부처에 이르러야 가질 수 있는 능력이다. 깨달음에 있어서 그 이상이 있을 수 없는 최고의 경지이다.

‘아뇩다라阿耨多羅’는 산스크리트어 avatāra의 음역이며, ‘무상無上’의 뜻으로 그 이상이 없는 최고의 경지를 말한다. ‘삼먁삼보리三藐三菩提’는 산스크리트어 삼먁삼보디samyak-saṃbodhi의 음역으로 ‘삼먁’은 ‘완전히’ 혹은 ‘정확히’를, ‘삼보리’는 ‘완벽한 지혜’를 뜻한다. ‘정등정각正等正覺’으로 의역할 수 있으며, 정등각正等覺ㆍ정변지正遍知(정확하고 보편적 앎)로도 쓴다.

정正’은 불편불사不偏不邪(치우치지도 삿되지도 않음)의 의미를 갖는다. ‘등等’은 여섯 미계迷界인 천상계天上界ㆍ인간계人間界ㆍ수라계修羅界ㆍ축생계丑生界ㆍ아귀계餓鬼界ㆍ지옥계地獄界와 네 오계悟界인 불계佛界ㆍ보살계菩薩界ㆍ연각계緣覺界ㆍ성문계聲聞界의 십법계十法界가 동등하게 일체가 됨을 뜻한다. ‘정각正覺’은 외도外道의 견해와 다른 ‘정확한 깨달음’이다.]

 

 

고지 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故知 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그리하여 아노니, 반야바라밀다는 바로 크게 신묘한 주문이며, 크게 밝은 주문이며, 보다 더 이상의 것이 없는 주문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으로 일체의 괴로움을 없앨 수 있고 진실하여 허상이 아닌 것임을 (아느니라).

 

[注] 是大神呪: ‘주呪(만다라mantra)’는 ‘다라니陀羅尼’를 달리 이르는 말로서 ‘주문呪文’ 혹은 ‘진언眞言’의 뜻이다. ‘다라니陀羅尼’는 산스크리트어 ‘다라니dhāranī’를 음사音寫한 것이다.

「다라니」는 비교적 긴 장구章句로 되어 있는 주문으로 총지總持, 능지能持, 능차能遮라 번역하며 불법佛法을 마음속에 간직하여 잊지 않게 하는 힘이다. 우주의 실상에 계합하여 수많은 법문法門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란 의미를 지니며, 뛰어난 기억력이란 의미도 있다.

즉, 하나의 다라니를 기억함으로써 다른 모든 것을 연상하여 잊지 않게 하고(총지), 선법善法을 지니게 되며(능지), 악법을 막을 수 있도록 하는 것(능차)을 뜻한다. 특히 밀교密敎에서는 진언眞言과 다라니를 지송持誦함으로써 마음을 통일하고 궁극의 경지에 도달하여 부처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원시불교에서는 세속의 주술이나 밀법密法을 행하는 것을 엄금하였으나 실제로는 원시불교 경전에서 이미 호신주護身呪가 쓰였고, 대승불교 초기에 부분적으로 다라니가 채택되어 점차 증대되어갔다. 4세기경부터는 주법呪法만을 역설하는 독립적인 경전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후 이 다라니를 중심으로 하여 대일여래大日如來의 설법이라고 자칭하는 밀교가 나타나게 되었으며, 밀교에서는 주다라니呪陀羅尼라 하여 재난을 없애는 힘이 있다고 보고 있다.

일반적으로 범문梵文의 짧은 구절을 진언 또는 주呪라 하고, 긴 구절로 된 것을 다라니 또는 대주大呪라고 하며 악을 없애고 복을 빌 때나 죽은 이의 명복을 빌 때 또는 불보살을 공양하거나 참회할 때 등의 의식에 사용되고 있다.

「다라니」의 산스크리트어를 대부분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음사한 것은 번역으로 인한 의미의 제한을 방지함과 그 신비성을 보전코자 함이다. ‘大神呪’의 범어는 ‘마하만다라mahāmantra(大呪)’이나 삼장법사가 번역을 하면서 ‘신묘神妙’ 혹은 ‘신력神力’을 뜻하는 ‘神’자를 넣었다.

‘다라니’는 모든 악한 법法을 버리고 한량없이 좋은 법을 지니게 한다는 의미의 신비적 힘을 가진 것으로 믿어지는 주문呪文이다. ‘呪’라는 글자에는 본래 ‘신神에 대한 언어’ 혹은 ‘신의 말씀’이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오묘한 반야의 이치는 언어로 분명하게 나타낼 수가 없고 오직 은밀하게 체득되는 것인바 ‘주呪’라고 하는 것이다.

『반야심경』은 언어로 설명하기도 하고 언어를 떠나서 설명하기도 한다. 이 구절의 이전 전반부에 기술된 문장이 현설顯說로서 현교顯敎의 교의라면, 여기서부터 기술되는 즉, 후반부의 문장은 밀설密說로서 밀교密敎의 주문이다. 그런 이유로 『반야심경』을 현밀원융顯密圓融의 불가사의라고 말하며, 또 깊은 반야의 지혜를 대신주大神呪라고 한다.

≪751년(경덕왕 10년) 창건한 불국사의 석가탑을 해체하였을 때 탑 속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無垢淨光大陀羅尼」가 나왔다. 이 ‘다라니’는 7일 뒤에 죽어서 16지옥에 떨어지게 되어 있는 바라문을 구제하기 위하여 석가모니가 외우도록 한 것으로 우리나라의 조탑신앙造塔信仰과 매우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탑을 세울 때 이 다라니를 일곱 번 외우고 탑 속에 안치하면 죽은 뒤 극락세계에 태어난다고 하였다. 또 사리탑을 77번 돌고 이 다라니를 77편 외운 뒤 77본本을 써서 작은 토탑土塔 77좌를 만들어 그 속에 이 다라니를 1본씩 봉안하고 공양하면 수명이 연장되고 모든 업장이 소멸되며, 영원히 삼악도三惡道(죄를 지은 자가 지옥ㆍ아귀ㆍ축생의 세 곳으로 태어나는 곳)를 떠나서 태어나는 곳마다 모든 부처님을 만나게 된다고 하였다.≫

是大明呪: ‘大明’은 ‘無明’에 대한 상대적 개념으로 암흑 같은 어리석음인 무명을 소멸시키어 진정한 밝음으로 이르게 한다는 의미가 된다.

是無上呪: ‘無上呪’는 산스크리트어로 ‘아뇩다라anuttara(無上)-만다라mantra(呪)’이다. 삼장법사는 『반야심경』에서 ‘anuttara’를 두 가지로 번역하고 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는 음역하고 이 구절에서는 의역을 하고 있다. 여기서의 ‘無上’은 반야바라밀다가 존귀하고 특별하여 어떠한 법문도 그 이상을 초월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고자 함이다.

是無等等呪: ‘無等’은 ‘대등함이 없음’, 즉 ‘함께 견줄 수 없음’ 정도로 새길 수 있다. 열반은 부처의 경지이며 어떤 것도 함께 대등하게 견줄 수 없는 무등無等의 법法이다. ‘반야바라밀다’는 부처와 동등한 경지이기 때문에 ‘더 이상 대등하게 견줄 수 없는 것, 곧 부처의 경지(無等)’와 ‘동등(等)’한 주문, 즉 ‘無等等呪(그 어떤 것도 대등하게 견줄 수 없는 법과 동등한 주문)’인 것이다.]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故說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그리하여 (지금까지 드러나게) 반야바라밀다 주문(의 묘법妙法)을 설하였던 것을 이제 (은밀하게) 주문으로 설하여 말한다.

 

[注] 卽說呪曰: 여기의 ‘卽說呪曰’은 그 이전까지의 ‘경문’에 이어서 시작되는 ‘주문’의 연결부로서, 앞부분에서 드러나게 설명한 반야바라밀다와 그 내용 그대로를 은밀하게 담은 주문의 효력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말한다. 즉, 앞 구절 ‘故說般若波羅蜜多呪’에서는 대승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참되게 수행하면 궁극적으로 무상정등정각에 이를 수 있음을 다시금 강조하면서 이제부터 말하는 주문(大呪) 또한 그러한 반야바라밀다의 묘법을 그대로 지니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娑婆訶

가세, 가세 (진리의) 피안에 가세. 피안으로 모두가 다 함께 (진리에) 가세. (간절히 원하며) 깨달음에 정성을 다하리로다.

 

[注] 여기서 부터가 주문呪文이며 『반야심경』 본문 전체의 요지가 이 네 구의 주문에 모두 함축되어 있다. 주문은 부처의 진언眞言 혹은 밀어密語이기 때문에 번역을 하지 않고 그대로 옮기는 것이다. 여기 네 구의 주문을 염송하는 효력은 경문 전체를 읽는 것과 동등한 것인바 이러한 주문을 지극한 마음으로 염송하면 각종 죄업을 소멸시키고 복락을 얻을 수 있으며 마음의 안정과 지혜의 계발에 도움이 되어 보다 빠르게 성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주呪는 밀어密語, 즉 부처의 비밀언어로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부분이다. 예로부터 주문은 그 진실성과 불력佛力, 신비성을 해칠 우려가 있다고 하여 번역하지 않았으나 인도의 제바보살提婆菩薩은 이를 ‘간다. 간다. 저쪽으로 간다. 결정코 피안에 갔다. 도심道心 있는 중생이여.’라고 번역하였다. 또 신라의 원측법사圓測法師는 ‘훌륭하도다. 훌륭하도다. 저 피안은 훌륭하도다. 각覺이 다 끝났도다.’라고 번역하였다.

揭諦: ‘아제gate’는 ‘가자, 도달하자’ 혹은 ‘이루자’의 의미가 있다. ‘諦’는 의역어로서 ‘진리’를 의미하여 ‘진리에로 가자’는 의미로 새길 수 있다. ‘아제 아제’라고 거듭 말하는 것은 ‘자도도타自度度他’의 의미로 이해된다.

波羅揭諦: ‘波羅’는 ‘초월’, ‘구경究竟(지극함을 궁구하다)’, ‘피안에 이르다’ 등의 의미로서 ‘바라아제’는 ‘피안(의 진리)으로 가자’가 된다.

波羅僧揭諦: ‘僧’은 산스크리트어 '삼sam'에 해당하며 ‘모두(총總)’, ‘널리(보普)’의 뜻을 가지며, ‘피안으로 모두가 다 함께 가자’가 된다.

菩提: ‘菩提’는 ‘모지’ 또는 ‘보리’로 발음하며, 깨달음(각覺), 정각正覺, 불지佛智 등으로 새길 수 있다.

娑婆訶: 고대인도의 경전인 『리그베다』와 『우파니샤드』의 기록에 따르면 ‘사바하’는 본래 손으로 공물을 받들어 신에게 바칠 때 내는 감탄의 소리로서 ‘잘 놓아둔다’ 또는 ‘불 속의 공물을 잘 안치한다’는 의미를 가지는, 화신에게 기도할 때 사용하는 신성한 용어였다고 한다. 여기서는 ‘정성을 다하리로다’로 새긴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揭提揭提 波羅揭提 波羅僧揭提 菩提裟婆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