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통석(양생주)

장자 양생주

나무와 까치 2016. 3. 20. 20:41

[養生主]

<‘양생주’는 ‘천연한 그대로의 정신’을 말한다. 일상에서 자연스러운 삶을 기르는 겻을 ‘養生’이라 할 때, 자연스러운 삶을 기르는 주인인 ‘養生主’는 ‘천연한 그대로의 맑은 정신’ 곧 ‘神明’이다.>

 

 

 

<제1절>

生也有涯 而知也涯 以有涯隨涯殆已 已而爲知者 殆而已矣 爲善无惡无近刑 緣督以爲經 可以保 可以全生 可以養親 可以盡年

우리의 삶에는 끝이 있으나 앎에는 끝이 없다. 끝이 있는 것으로써 끝이 없는 것을 좇으면 위태로울 뿐이다. 그럴 뿐임에도 (그러한 상대적인 앎을) 알려고 (집착)하면 (결국) 위태로움으로 끝나게 된다.

참된 일을 하되 이름을 가까이함이 없도록 하고 (설령 참되지 못한) 나쁜 일을 하더라도 형벌에 가깝도록 함이 없게 한다. (사물의) 연유함을 (잘) 살펴서 경전으로 삼으면 몸을 보전할 수 있고 삶을 온전히 할 수 있으며, 부모를 봉양할 수 있고 천수를 누릴 수 있다.

 

[注] 善ㆍ惡: 여기서 ‘善’은 ‘참된 일’, ‘惡’는 ‘참되지 못한 나쁜 일’로 새긴다.(‘제물론’편 제1-1절 ‘善’ 참고)

본 절에서는, 만물의 연유함을 잘 살펴 천리에 따르며 천수를 다하여 살아가는 자연스런 일상과 행동을 강조한다. ‘천수를 다하고 죽는다.’는 것은 죽어서 자연스럽게 道로 돌아감을 뜻한다(『노자』 제22장 ‘誠全而歸之’ 및 제50장 ‘出生入死’ 참고).

이 절은 다음 절부터 곧바로 이어지는 ‘완숙된 기술에서 비롯하는 자연스러운 행동을 바탕으로 정신을 맑고 고요한 상태로 응집함으로써 도와 하나로 통할 수가 있다’는 내용을 시사하는 의미이다.]

 

 

<제2-1절>

庖丁爲文惠君解牛 手之所觸 肩之所倚 足之所履 膝之所踦 砉然嚮然 奏刀騞然 音 合於桑林之舞 乃經首之會 文惠君曰 “譆 哉 技蓋至此乎” 庖丁釋刀對曰 “之所好者也 進乎技矣 始之解牛之時 所見非牛者 三年之後 未嘗見全牛也 方今之時 遇 而不以目視 官知止而神欲行 依乎天理 批大郤 導大窾 因其固然 技經肯綮之未嘗 而況大軱乎

포정이 문혜군을 위해 소를 잡는데, 손을 대고 어깨로는 받치며 발로 밟고 무릎으로 찍어 누른다. 서걱서걱 싹둑싹둑 칼을 달리며 각을 뜨는 소리가 음률에 들어맞지 않음이 없다. 상림의 무악에 부합하며 또한 경수의 곡조에도 잘 맞는다.

(이를 보고) 문혜군이 말했다. “아! (자연스러운 그것이) 참되도다. 기술의 뛰어남이 이토록 지극한가!” 포정이 (차고 있던) 칼을 풀어놓고 마주하여 대답했다. “이 좋아하는 것은 입니다. (그것은) 기술에서 (더) 나아갑니다. 처음 신이 소를 해체할 때 (눈에) 보이는 것은 소밖에 없었습니다. (그처럼 소의 모습 전체가 보여 손을 쓸 수가 없었으나) 3년이 지난 후에는 소의 전체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 은 (천연한 그대로의) 정신으로 (소를) 대하되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신체의) 기관(즉, 눈 등)으로 인식하기를 그치고 정신이 하고자하는 대로 행동합니다. (즉, 천연한) 하늘의 이치에 의거하여 (칼로 소 몸체 내의) 큰 틈을 비집고 (뼈의) 큰 공간으로 이끌어가며 본래의 천연함(그대로의 결)을 따르는 기술은 뼈에 붙은 살과 힘줄도 (건드리고) 지나간 적이 없는데 하물며 큰 통뼈이겠습니까.

 

[注] 庖丁: ‘庖’는 ‘소요유’편에 나왔던 ‘庖人’과 같으며, 요리사, 즉 숙수를 뜻한다. ‘포정’은 ‘정丁이라고 하는 요리사’로 새길 수 있다.

文惠君: ‘문혜군’은 전국시대 양나라 혜왕과 동일인물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양혜왕은 본래 혈기왕성하고 독단적인 성격으로 스스로를 과신하다가 결국 수도를 대량大梁으로 옮기며 낭패를 당하였는데 그 후 자신을 낮추고 폐백을 후하게 준비하여 현자를 초빙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여기서는 그러한 성향의 문혜군이 능숙하게 소를 해체하는 포정의 기술을 보면서 자연스러움과 절제에서 비롯되는 양생의 이치를 해득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문혜군이 양 혜왕과 동일인물인지 혹은 가공의 인명인지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으나 어차피 이 부분이 우화의 형식을 빌려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라면 그 뜻을 이해할 뿐 분명치 못한 인명으로 굳이 논쟁할 실익은 없어 보인다.

: 여기서 ‘善’은 참됨, 능숙함, 훌륭함 등의 뜻으로 쓰였다.

桑林之舞: ‘桑林’은 상商(은殷)나라 탕왕湯王이 상산桑山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만들었다는 무악舞樂.

經首之會: 옛날에는 시에 가락이 있었는데, 이때 여러 악기가 모여서 내는 음을 ‘會’라고 한다. ‘經首’는 요임금이 제사를 위해 지었다는 시.

遇: ‘神’은 ‘정신’이며, 여기서는 맑고 고요하게 응집된 정신을 말한다.(‘제물론’편 제1-13절 ‘神明’ 참고)

依乎天理: (천연한) 하늘의 이치에 의거하다. ‘天理’는 하늘의 조리條理, 곧 ‘도리道理’인데, 여기서 ‘天’은 천제天帝(곧 천신天神)가 주관하는 하늘 그 이전의 하늘이다. 이는 곧, 하늘 중에 또 다른 하늘이 있다는 관점으로 그 하늘 가운데 있는 하늘이 道가 있는 하늘(곧 도의 세계)이라는 것이며, 이는 선도仙道의 세계관이다.(『노자』 제1장 하상공장구 중 ‘天中復有天也’ 참고)]

 

 

<제2-2절>

良庖歲更刀 割也 族庖月更刀 折也 今臣之刀十九年矣 所解數千牛矣 而刀刃若新發於硎 彼節者有間 而刀刃者厚 以厚入有間 恢恢乎其於遊刃 必有餘地矣 是以十九年而刀刃若新發於硎

양포(좋은 솜씨로 이름난 숙수)가 해마다 칼을 바꾸어 쓰는 것은 (뼈에 붙은 살을) 베기 때문이며, 족포(일반 여염가의 숙수)가 달마다 칼을 바꾸는 것은 (힘줄을) 자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의 칼은 오래되어 해체한 소가 수천마리이나 그 칼날은 숫돌에서 새로이 갈아온 것 같습니다. 그 (뼈의) 마디에는 틈새가 있으나 칼날은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음으로써 틈새가 있음에 들어가니 (그 사이는) 칼날이 돌아다니기에 널찍하여 반드시 여유로운 공간이 있습니다. 이리하여 오랜 세월이 지났으나 (그) 칼날은 방금 숫돌에서 갈아낸 것 같습니다.

 

[注] 厚入有間: 이 구절은 『노자』 제43장에 나오는 ‘無有入無間’과 유사한 어법이되 그 의미는 다르다. 아마도 당시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노자』와의 차별화를 의도한 것은 아닌지 생각된다.

良庖ㆍ族庖: ‘양포’는 솜씨가 좋기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숙수를 말한다. ‘족포’는 많은 식객이 딸린 명문대가의 숙수를 일컫는데, 여기서는 소를 해체하는 그 기술수준이 칼로 힘줄을 자를 정도의 사람이라고 말한다.

今臣之刀十九年矣: 여기서 ‘十九年’은 짝수의 가장 큰 숫자 십과 홀수의 가장 큰 숫자 구를 더하여 ‘오랜 세월’을 의미한다. ‘덕충부’편 2-2절에도 같은 말이 나온다.]

 

 

<제2-3절>

雖然 每至於 見其難爲 怵然爲戒 視爲止 行爲遲 動刀甚微 謋然已解 如土委地 提刀而立 爲之四顧 爲之躊躇滿志 刀而藏之” 文惠君曰 “聞庖丁之言 得養生焉”

비록 그러하나 (어쩌다) 족포(의 지경)에 이를 때마다 는 그 일의 하기 어려움을 봅니다. (그러면) 두려워서 (스스로를) 삼가경계하며 눈으로 봄을 멈추고 행동을 천천히 하면서 칼을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면 ‘획’ 하고 해체가 끝나는데, (이는) 마치 흙덩이가 땅바닥에 내던져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칼을 끌어당겨 일어서서 사방을 돌아보고 스스로 흡족해하며 칼을 (참된 마음으로) 고이 손질하여 보관합니다.” 문혜군이 말하길 “참되도다! 는 포정의 말을 듣고 양생의 이치를 얻었느니라.”라고 하였다.

 

[注] 怵然爲戒 視爲止 行爲遲: 두려워서 경계하며 눈으로 봄을 멈추고 행동을 천천히 하다. 이는 스스로를 삼가 경계하며 정신을 맑고 고요하게 집중하는 모양이다.

躊躇滿志: 어떤 일을 완수하고 스스로 흡족해하다.

得養生焉: 여기서 ‘養生’은 ‘양생의 이치’를 말하며, 곧 ‘스스로를 경계하여 청정淸靜한 정신을 유지함으로써 자연스러운 삶을 기르는 이치’를 뜻한다.]

 

 

<제3절>

公文軒見右師而驚曰 “是何人也 惡乎介也 天與其人與” 曰 “天也非人也 天之生是使獨也 人之貌有與也 以是知其天也非人也 澤雉十步一啄 百步一飲 不蘄畜乎樊中 雖王不也”

공문헌은 우사를 만나보고는 깜짝 놀라 말했다. “이렇다니 어찌된 사람인가? 어찌 (발이) 하나인가? 그것은 하늘이 내린 것인가 사람이 그리한 것인가?” 우사가 말하길, “하늘이지 사람이 아닐세. 하늘이 이렇게 (나를) 낳아서 외발이 되도록 하였네. (무릇) 사람의 모양은 (좌우 양쪽이) 함께 있으니 이로써 그렇게 한 것이 하늘(의 뜻)이지 사람(의 뜻)이 아님을 알 수 있네.

못가의 꿩은 열 걸음을 가서 한번 (먹이를) 쪼아 먹고 백 걸음 가서 한 모금 (물을) 마시나 새장에 갇힌 채 길러지기를 바라지 않으니 (그것은) 정신이 비록 (다부지고) 왕성하더라도 참되지가 못하다는 것일세.”

 

[注] (스스로 근본을 지킴으로써 현실에 굴복하거나 영합하지 않는 등) 어떤 이유로 형벌을 받은 우사가 이를 면할 방도를 찾지 않고 당연한 듯 형벌(비剕-발뒤꿈치 베기)을 받아 다리를 한 짝 잃었으되 우사는 오히려 하찮은 신체의 일부를 그처럼 미련 없이 버리고 절름발이가 됨으로써 육신에 얽매인 틀에서 벗어나 광대무변한 정신의 자유로움(즉, 소요유)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하늘의 뜻이라 하였다.(‘대종사’편 제1-2절 ‘過而弗悔’ 참고)

참고로, 주나라 형서刑書인 『여형呂刑』에는 다섯 가지 형벌로 묵墨(이마에 刺字)·의劓(코 베기)·궁宮(거세)·비剕(발뒤꿈치 베기)·살殺(사형)이 언급되고 있다.

公文軒ㆍ右師: ‘公文軒’은 송나라 사람으로 성은 ‘공문’, 이름은 ‘헌’이라 하며, ‘右師’는 관직이름이라는 설이 있으나 가공의 인물로 보인다.

雖王不也: 여기서 ‘善’은 ‘천연한 그대로의 참됨’을 뜻하여 자연그대로의 자유로운 정신(神)을 강조하고 있다(‘제물론’편 제1-1절 ‘善’ 참고). ‘王’은 ‘旺’과 통용되며, ‘왕성함’으로 새긴다.]

 

 

<제4절>

老聃死秦失弔之 三號而出 弟子曰 “非夫子之友邪” 曰 “然” “然則弔焉若此 可乎” 曰 “然也吾以爲其人也 而今非也 向吾入而弔焉 有老者哭之 如哭其子 少者哭之 如哭其母 彼其所以會之 必有不蘄言而言 不蘄哭而哭者 是遁天倍情 忘其所受 古者謂之遁天之刑 適來夫子時也 適去夫子順也 安時而處順 哀樂不能入也 古者謂是帝之縣解”

노담(노자)이 죽어서 진일이 조상을 하였는데, (그는 형식적으로) 세 번 곡을 하고는 나와 버렸다. (그것을 보고) 제자가 말했다. “(그 분은) 스승님의 친구가 아니십니까?” (진일이) 말하길, “그렇다” (다시 제자가) “그러면 (스승님은) 조상을 이와 같이 (형식적으로) 하셔도 되는가요?” (진일이) 말하길, “그렇다. 처음에 나는 그 사람됨을 (높이) 대접하여주었으나 지금은 아니다. 내가 빈소로 나아가 조문을 하는데 (거기엔 여러) 늙은이가 있어 곡을 하는 게 마치 제 자식이 죽은 듯 곡을 하며, (많은) 젊은이가 곡을 하는데 마치 그 어미가 죽은 듯이 곡을 하는 것이다.

저들이 그렇게 (슬프게 곡을 하며) 모인 까닭은 반드시 (노담이) 원하지 않는 듯 말하면서 원하여 말하고, 곡을 하도록 바라지 않는다면서 곡을 하도록 함이 있는 것이다. 이는 하늘(의 조리)을 회피하고 (인간 본래의) 성정을 배반하는 것으로서 (삶은 하늘로부터) 받은 것임을 잊는 것이니 옛날에는 (그것을) 일컬어 ‘하늘(의 뜻)을 회피하는 형벌’이라 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오게 된 것은 그(노담)가 올 때가 된 것이고, 가게 된 것은 그가 (천명을) 따르는 것이다. 언제나 (마음을) 안정되게 하여 순리로 처신한다면 슬픔과 즐거움이 (정신 속에) 들어올 수 없다. 옛날에는 이러함을 일컬어 ‘천제의 속박에서 풀려남’이라 하였다.”

 

[注] 老聃: 초楚나라(楚에 병합되기 전의 진陳나라) 고현苦縣 여향勵鄕 곡인리曲仁里(현 하남성河南省 주구시周口市 녹읍현鹿邑縣) 사람으로 본명은 이이李耳다. 李는 성이고 耳는 이름이며 자는 담聃으로 원로학자라는 의미로서 노담老聃이라고 불렸다. 『사기』에는 젊은 공자와 원로학자로서 노자가 만난 이야기가 전해진다.

秦失: 노자의 벗으로 등장하는 사람이며 성은 진, 이름은 일이라 하나 가공의 인물이다.

遁天倍情: 하늘의 조리條理(곧 道理)를 회피하고 인간 본래의 천연한 성정을 배반하다.

安時而處順 哀樂不能入也: 이와 유사한 의미로 ‘인간세’ 편 제2-2절에 ‘自事其心者 哀樂不易施乎前(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섬긴다면 슬픔과 즐거움은 자기 앞에 쉽게 벌어지지 못할 것이다.)’이란 구절이 나온다.

帝之縣解: 천제(상제)가 매어 닮, 곧 천제의 속박에서 풀려남을 말한다. 이는 천제가 정한 세상의 틀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얻음으로써 비로소 세상 밖의 광대무변한 세계에서 자유롭게 노닐게 된다는 것이다. ‘대종사’편 제5-3절에도 ‘縣解’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천제의 속박에서 풀려난다.’는 사고에는 ‘道’는 ‘帝’가 존재하기 이전의 존재로서 당연히 천제나 천신 등은 도로부터 생성된 만물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의식구조가 작용한다. 즉, 스스로 내가 도와 하나로 통하게 되면 천제나 그 밖의 다른 신, 귀신 등은 이미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관점인 것이다. (‘대종사’편 제2-3절 ‘神鬼神帝’ 및 『노자』 제4장 ‘象帝之先’ 참고)

본래 ‘帝’는 상商나라 왕족의 조상신이다. ‘上帝’는 그 중 최고의 신으로서 세상의 모든 일에 관여하여 천하 만물을 다스리는 전지전능한 존재이며 ‘天神’이다. 이후 상나라가 멸망하고 주나라가 들어서면서 ‘上帝’의 개념은 하늘에서 세상을 다스리는 ‘天帝(하늘)’의 개념으로 전환된다.

 

본 절에서는, 노담의 죽음에 사람들이 비통해하고 아까워하는 것은 평소 그의 행동들이 세속의 틀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것을 말하며 그로써 노담의 정신적 자유로움은 완전하지가 못함을 말하고 있다. 즉, 노담은 직책을 가지고 벼슬을 하면서 왕을 섬겼는바 역시 상당부분 세속에 젖어 그 티끌이 묻어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반면, 장주 자신은 세속에 깊이 관여하지 않으며 정치적인 직임도 받지도 않았으므로 그런 점에서 자신의 정신적 자유로움은 노자보다 완전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제5절>

指窮於爲薪 火傳也 不知其盡也

(그렇게) 손가락이 불쏘시개가 되어 (불을 붙이는 역할을) 다하면 불은 계속 번져나가 (영원토록) 그 다함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注] 『장자』 중에서도 특히 이 부분은 난해한 것으로 알려져 왔고 그만큼 해석도 다양하나 앞 절들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리 어려운 내용이 아니다. 말하자면 본 절은 ‘양생주’편 전체를 한 줄로 간단히 요약한 내용이다.

손끝의 완숙된 기술에서 비롯한 자연스러움이 심신心身의 자연스러움과 자유로움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스스로를 삼가 경계하여 정신을 맑고 고요한 상태로 응집함으로써 도와 하나로 통하여 그 다함이 없다는 것이다.

 

[篇注]

본편에서는 원숙한 기술에서 비롯하는 자유로움 그리고 나아가 스스로를 삼가고 경계함으로 유지되는 맑고 고요한 정신을 말하면서 그 사례로서 ‘포정’을 든다. 또 육체적인 얽매임에서 벗어나 정신의 자유로움을 얻는 사례로서 ‘우사’를 들고 있다.

神人’은 스스로를 삼가 경계함으로써 ‘정신이 청정淸靜한 상태로 응집된 사람’이다. ‘원숙한 기술’ 그리고 자연스러운 일상과 자유로운 사고를 제어하는 主體는 결국 ‘정신’이다. 스스로를 삼가 경계하며 자연스러운 심신을 기르는 겻을 ‘양생’이라 한다면, 양생의 주체인 ‘養生主’는 결국 ‘천연한 그대로의 정신’, 곧 ‘신명’을 말한다.

‘제물론’편이 학문과 지식에 적응된 머리로서 도의 속성과 실질을 이해하고 추구하는 입장이라면 본편에서는 몸으로 도에 접근해가는 방식이다. 한편, ‘대종사’편에서는 도와 하나로 통한 지인ㆍ신인들 중에서도 최고경지의 사람으로 ‘眞人’을 언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