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개요

논어 개요

나무와 까치 2017. 9. 19. 20:09

[논어 통석 論語 通釋]

‘論語’라는 제목에 대하여도 ‘제자들이 논의하여 지은 어록’이라는 등 다양한 설이 있으나 여기서는 그 내용의 실질로서 ‘(공자의) 논설論說 말씀’ 또는 ‘강론講論 말씀’이라 새긴다.

 

1. 공자 소략

공자의 성은 공孔이고 이름은 구丘, 자字는 중니仲尼이다. 공자를 일컫는 영어 명 Confucius는 공자에 대한 존칭인 공부자孔夫子의 라틴어식 표기이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노 양공襄公 22년) 노나라 창평향昌平鄕 추읍郰邑(또는 추읍鄹邑, 오늘날 중국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의 대부인 숙량흘叔梁紇(이름은 紇 자는 叔梁, ?-BC548년)과 안징재顔徵在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결혼 당시 숙량흘은 무장으로 50세가 훨씬 넘었고 어머니 안징재는 15세로서 야합野合으로 공자를 낳았다고 전해진다. 야합이란 정상적인 혼인관계가 아님을 일컫는다. 숙량흘은 첫째 부인 시씨施氏와는 딸만 아홉을 두었고, 둘째 부인과는 맹피孟皮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지만 한 쪽 다리가 불구의 장애인이었다.

공자의 어머니 안징재는 노나라 추읍의 서쪽 궐리闕里 이구산尼丘山 밑에서 악사인 안顔씨의 딸로 태어났다. 공자의 외할머니가 이구산에서 기도를 하여 어머니 안징재를 낳았고, 어머니 안징재는 이구산의 정기를 받고 공자를 낳았으므로 아이의 이름을 구丘라고 짓고, 훗날에 자字도 니尼자를 넣어 仲尼라 하였다고 한다. 『사기』에는 공자가 태어나면서 머리 위가 평평한 언덕처럼 생겼다 하여 이름을 丘로 지었다고 하였다.

공자가 3살 때 아버지 숙량흘이 세상을 떠나 방산防山에 묻혔다. 『가어家語』에는 공자가 23살 때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아버지와 합장하고자 아버지의 무덤을 찾았으나 위치를 알 수 없는지라 성 밖의 오보五父라는 길거리에 빈소를 차렸다고 한다. 오보 거리는 공동묘지로 가는 길목이었으므로 장례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는데 마침 20년 전 아버지 숙량흘의 장지에 상여수레를 끌었던 만부輓父의 어머니가 숙량흘의 무덤을 일러주었던바 어머니를 방산의 아버지와 합장하게 되었다.

공자의 성姓인 공孔씨의 시조는 공보가孔父嘉이다. 공보가는 송나라 첫 임금인 미자微子의 자손으로 송 공실의 공족이었으나 정변으로 몰락하자 아들인 목금보木金父가 노나라로 피신하여 아버지 공보가의 ‘孔’자를 따서 공씨로 행세하며 신분을 숨겨 지냈던 것이다.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은 이 목금보에서 고이睾夷, 방숙防叔, 백하伯夏를 잇는 4대손이 된다.

미자는 본래 상商(은殷의 본명)나라의 왕자였는데 주周나라에 의해 상이 멸망하면서 주 무왕이 상의 어진 왕자인 미자로 하여금 송의 땅에 제후로 봉함으로써 옛 상나라의 제사를 잇도록 하였다. 이후 송나라는 미자微子, 미중微仲, 송공宋公, 정공丁公, 민공湣公, 양공煬公으로 대통이 이어지다가 양공이 그 조카 여공厲公에 의해 죽임을 당함으로써 그 아들로서 후계자였던 불보하弗父何는 임금이 되지 못하였는데, 이 불보하로부터 3대가 지나서 공씨의 시조인 공보가에 이른다.

공자가 15살 무렵에 노나라의 실력자인 맹희자孟僖子는 공자에게 자기 집에 머물면서 인재를 교육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공자는 어머니가 계신 고향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뒤에 맹희자는 그의 아들과 가신들을 불러놓고 “공구孔丘는 성인의 후손인데 그 조상은 정고보正考父에 이르러 대공戴公, 무공武公, 선공宣公을 섬기면서 세 번 임금의 부름을 받았는데 매번 명을 받을 때마다 더욱 공손하였다.

내가 듣기로 성인의 후손은 비록 국왕의 지위에 오르지는 못해도 반드시 재덕才德에 통달한 자가 있는바 지금 공구는 나이는 어리나 예를 좋아하니 그가 바로 통달한 자가 아니겠느냐? 내가 죽거든 너는 그를 스승으로 모시도록 하라.”라며 유언을 남겼는데, 맹희자가 세상을 떠나자 그 아들 맹의자孟懿子와 남궁경숙南宮敬叔 형제는 함께 공자를 찾아가 예를 배웠다고 전해진다.

공자는 가난하고 천하게 자랐으며, 키가 9척 6촌(1尺은 약 22㎝)이나 되어 사람들이 모두 ‘키다리(長人)'라고 부르면서 특이하게 여겼다. 공자는 나이 19살 때 송나라 사람 견관幵官씨의 딸 미옥美玉과 혼인했다. 20살에 계손씨季孫氏 집안의 공사장 관리를 맡았고, 그 해 아들 이鯉(자는 백어伯魚)를 얻었다. 21세에 계손씨 목장의 관리책임자가 되었다가 같은 해 맹희자의 도움으로 ‘궐리闕里’라는 이름으로 사설학교를 열어 귀족들의 자제를 가르치며 예禮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34살 되던 해 주나라 수도 낙양에서 주나라 원로 사관이며 황실서고 책임자인 노담老聃(老子)과 만난 이야기가 전해지며(소공昭公 24년, BC518년), 35살 때는 노 소공이 노나라 삼환의 하나인 계평자季平子를 제거하려다 실패함으로써 제나라로 피신하였으므로 소공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던 공자는 뒤따라 제나라로 떠났다가 제나라 태사로부터 소악韶樂을 배우고 이듬해 돌아온 것으로 되어있다.(『사기』에는 그 소공이 진晉?나라에서 죽은 해인 소공 32년 42세에 돌아온 것으로 나온다.)

공자는 22세부터 50세에 이르는 약28년 동안은 주로 제자들은 가르친 시기로 보인다. 노나라 정공定公 5년에 계평자가 죽고 아들 환자桓子가 그 뒤를 잇자 전부터 계씨의 실권을 행사해오던 가신 양호陽虎(논어에는 양화陽貨로 나옴)가 본격적으로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고, 공자는 정치에서 물러나 본격적으로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양호가 계손씨를 비롯한 삼환씨를 제거하고 자기가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반란을 일으키다 실패하고 제나라로 달아났으며, 공산불요公山弗擾가 계손씨의 식읍인 비費를 차지하는 정변이 발생하였다. 공산불요와 삼환씨가 서로 대치하는 상태에서 일시적으로 힘의 균형과 견제가 이루어지고 노나라 정공으로서는 뜻하지 않게 임금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분위가가 조성된 것이다.

공자나이 51세인 정공 9년에 정공은 공실의 직속 영지인 중도中都 땅의 장관으로 공자를 임명하였다. 공자가 중도를 다스린 지 일 년 만에 백성이 모두가 부지런히 일하고, 죄를 짓는 사람이 없었으며, 즐겁게 예절을 따랐다고 한다. 공자는 곧 대사공大司空 맹의자의 아래 직책인 사공(건설농림부 차관 격)이 되었고, 다시 대사구大司寇(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겸임 격)가 되었으며, 54세(정공 12년, BC 498년)에 대사구로서 재상의 일을 겸하게 되었다. 대사구와 재상의 일을 겸하며 직접 국정을 맡게 된지 이레 만에 박식과 달변으로 민심을 현혹하고 정치를 농락하는 음모꾼인 대부 소정묘少正卯를 주벌하였다.

『사기』에는 “공자가 소정묘를 죽이고 국정을 맡은 지 석 달이 되자 염소와 돼지를 파는 사람이 값을 더 부르지 않고, 남녀가 길을 걸을 때는 각각 좌우로 달리하였고, 길에 떨어진 물건이 있어도 주워 가지 않았으며, 사방에서 오는 행객들이 관의 허가나 감시를 받지 않고 필요한 물건을 마음대로 사서 자유롭게 돌아갈 수 있었다”고 기록한다.

제나라 관리들이 이 일을 전해 듣고 두려워하며 ‘공자가 정치를 하면 반드시 노나라가 패자가 될 것이고, 패자가 되면 우리나라부터 먼저 합병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계책을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제나라 가운데서 예쁜 여인 80명을 뽑아 춤을 가르치고 화려한 옷을 입혀 장식한 말이 끄는 수레 30대에 태워 노나라 임금 정공에게 보냈다. 이에 노나라 임금 이하 신하들은 매일같이 이를 구경하며 빠져 정치를 멀리하였으므로 공자는 일부러 핑계를 대고 벼슬을 그만두었다.

삼환씨의 세도를 누르고 왕도정치를 이룩하려던 꿈이 좌절된 공자는 노나라 정공定公 13년(BC 497년) 55세에 수십 명의 제자들과 함께 고국을 떠났다. 처음에는 衛나라로 가서 있은 후 여러 나라를 떠돌다가 마침내 계환자季桓子의 뒤를 이은 아들 강자康子가 폐백을 갖추어 초빙하므로 노 애공哀公 11년(BC 484년) 겨울에 노나라를 떠난 지 14년 만에 완전히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 공자의 나이 68세였다. 그러나 노나라는 끝내 공자를 등용하지 않았고 공자도 더 이상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이후 공자는 육예(『주례周禮』에서 이르는 예禮ㆍ악樂ㆍ사射ㆍ어御ㆍ서書ㆍ수數의 여섯 가지 기예)를 편찬하고 제자를 가르치는데 몰두하던 중 가장 아끼는 제자 안연이 세상을 떠나 깊은 실의에 빠졌다.

공자는 회의 죽음을 “(내가 회를 잃은 것은) 하늘이 나를 잃은 것이다!”라며 서럽게 곡을 하였다. 이를 보고 주위에서 제자들이 너무 서러워하신다고 하였더니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해 서러워하지 않으면 대체 누구를 위해 서러워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렇게 애제자를 떠나보낸 슬픔 가운데에서도 공자는 BC 481년에 『춘추春秋』를 완성했다.

72살(BC 480년) 때는 역시 아끼던 제자 자로가 위나라에서 일어난 정변에 휘말려 아깝게 죽었고, 이번에도 공자는 제자를 위해 곡을 했다. 그리고 집에서 세는 나이 73세(BC 479년)에 공자는 세상을 떠나 노나라 도성 북쪽 사수泗水 언덕에 묻혔다.

제자들이 모두 3년 동안 복을 입었다. 자공은 홀로 무덤가에 여막을 짓고 다시 3년이 지난 후에야 떠나갔다. 제자와 노나라 사람 중에 묘소 밑에서 집을 짓고 사는 사람이 100여 집이었는데 그것이 ‘공리孔里(공자 마을)’가 되었다. 노나라에서는 대대로 세시歲時(새 해를 맞을 때)에 공자 무덤에서 제사를 드렸고, 선비들은 향음주례鄕飮酒禮 등의 예를 행하였다.

한나라 고조는 노나라를 지나가다 태뢰太牢(천자의 제사)를 지냈으며, 제후와 경상들이 노나라에 오면 항상 먼저 공자 무덤에 참배하고 정사에 나아갔다. 사마천은 ‘천하에 군왕에서 현인까지 많은 사람이 있었건만 생시에 아무리 영화로웠던들 죽으면 다 끝이었다. 오직 공자만은 포의布衣로 죽었으나 대대로 전해오면서 학자들의 종주宗主로 숭앙되고 있다.’고 하였다.(『사기』 「공자세가」 참고)

 

 

2. 『논어』의 개요 및 공자사상의 특징

가. 개요

『논어』는 공자의 제자 혹은 그 제자의 제자들이 스승과 제자 사이의 대화를 중심으로 공자의 말씀이나 행적, 모습 등을 기록하고 편집한 단편적 어록이라는 것이 대개의 통설이며, 이는 곧 ‘(공자의) 논설論說 혹은 강론講論 말씀’ 정도로 새길 수 있다.

『논어』는 사서四書의 하나로 유가의 성전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저자로는 자하子夏 등 64제자 설(숭작참崇爵讖)과 중궁仲弓ㆍ자유子游ㆍ자하子夏 설(정현鄭玄), 증자曾子ㆍ유자有子의 제자 설(정자程子) 그리고 그 외 여러 설이 있으나 모두 분명치 않다.

오늘날 전하는 판본은 학이편學而篇에서 요왈편堯曰篇에 이르는 20편으로 되어있는데 그 편명篇名으로는 각 편의 머리 두 글자를 그대로 붙이고 있다. 어떤 책의 제목을 내용의 머리글자로 정한다는 것은 그 저술이 자기가 스스로 창작한 글이 아니라는 의미가 된다.

『논어』의 전반 10편을 상론上論, 후반 10편을 하론下論이라 하는데, 전반 10편까지는 대체로 큰 틀에서 각 편마다의 주제를 세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첫째 편 학이부터 넷째 편 이인까지는 배우고 익혀서 그것을 현실정치와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이치와 그 과정을 일관된 체계로 보여주고자 편집자들에 의해 그 제목을 차례대로 열거한 의도가 분명해 보인다. 반면 후반 10편은 그 내용과 문체가 전반 10편에 비해 좀 더 차이가 있으며 더러는 중복된 문장도 보인다.

『논어』의 판본은 한漢나라 때까지 공자의 옛집 벽 속에서 나온 고론古論 21편과 제齊나라의 제론齊論 22편, 노魯나라의 노론魯論 20편의 세 종류가 전해지고 있었는데 그 내용에는 별 차이가 없고 다만 편수에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고논어는 진시황 당시에 분서를 피해 공자의 9세손인 공부孔鮒가 벽을 두 겹으로 하여 숨겨두었던 것으로 공벽고문孔壁古文이라고도 하는데 쓰여진 글자가 진시황 이전의 고체로 되어있어 보통 사람은 읽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또한 이때는 이미 제논어와 노논어가 이미 세상에 널리 행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漢의 장우張禹는 노론을 중심으로 제론을 교합하여 교정본校定本 20편을 편찬하였고(장후론張侯論), 후한後漢의 정현鄭玄은 노론ㆍ제론ㆍ장후론 세 가지와 고론을 교합하였다. 이러한 정현본鄭玄本을 바탕으로 위魏나라 하안何晏이 『논어집해論語集解』라는 주석서를 저술함으로써 오늘날의 현존본 원문이 결정되었다.

『논어』는 공자가 직접 그 정신세계나 이념, 사상들을 일관된 논리로 체계를 갖추어 저술한 것이 아니라 공자의 말씀을 타인이 기록하고 편집한 것인바 당연히 공자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논어』에 등장하는 공자의 제자들은 주로 자字를 호칭으로 하는데 증삼曾參이나 유약有若은 이와 다르게 증자曾子, 유자有子로 일컫는 부분이 있다(증자 17회, 유자 3회). 이는 『논어』가 이들의 제자에 의하여 편찬되었다고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유력한 근거가 된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그 제자들이 공자의 정신세계와 가치관, 사고의 구조 등을 어느 정도로 이해하고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논어』를 저술한 제자들에게 공자의 실체는 좇아 이르기에 너무 크고 심원할 수 있다. 안연이 공자보다 먼저 젊은 나이에 요절하자 공자가 ‘(내가 회를 잃은 것은) 하늘이 나를 잃은 것이다.’라며 애통해하였다는 이야기는 이런 것들과 관련하여 분명하게 문제를 제시한다.

공자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논어』의 기록과 편집에 참여한 제자들의 정신세계와 이념체계, 사상적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이 또한 자료의 부족으로 여의치 않다. 그리고 아무리 제자들이 공자의 말을 들은 그대로 기록하였다고 하나 이는 사람이 듣고 삼켜서 소화한 후에 뱉어낸 것인바 거기에는 불가피하게 필자의 정신적 가치나 사고방식, 시각 등의 소화액이 녹아들 수밖에 없는 것이며, 그러한 말이 있었던 시공간과 그 분위기에 따른 뉘앙스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공자의 본질과 그 실체는 늘 저만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신기루처럼 모호하여 그 핵심에 대한 접근을 허용치 않는데 이것은 이러한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볼 수가 있다. 『공자』는 이렇듯 그 제자들에 의하여 1차적으로 왜곡되었다. 그리고 후대의 정자ㆍ주자에 이르러 2차적으로 완전히 비틀어졌던 것이다. 이로써 이제 공자 본래의 자연스러운 모습은 사라지고 『공자』는 신성神聖하고 난해한 형이상학적 학문으로 전혀 새롭게 재탄생하였던 것이다.

만약, 과거 유학자들이 노자의 정신과 사상이 (형이상학적인 사유의 결과물이 아닌) 자연과학적인 논리체계로 되어있다는 것을 간파하였더라면, 또 그것을 공자가 응용하여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몸소 실행코자 노력하였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하였더라면 진즉에 노자ㆍ공자를 함께 아우르는 완벽한 인문학 이론이 수립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지금의 동양철학은 아마 상당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유학자들이 노자ㆍ장자로 일컬어지는 도가를 싸잡아 비난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도가나 기타의 학파들을 주도적인 입장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상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사실 노자나 공자 그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노자』를 『장자』의 방식으로 이해한 도가의 학자들과 노자와 공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유가와 도가학파 그들 자체에 있었던 것이다.

 

나. 공자사상의 특징

道ㆍ德: 『논어』에서 공자가 말하는 ‘道’는 궁극적으로 천지자연의 천연한 이치와 그러한 자연의 일부인 인간 간의 마땅한 원리를 뜻하며, 구체적으로는 주역에서 말하는 ‘천도운행의 이치’를 담고 있다. 결국, 공자의 道는 우주 대자연의 운행섭리로서 길(道)이며, 자연의 일부로서 사람이 가야할 길이다. 즉, 인간사회가 굴러가는 윤리나 법도로서 인간이 의당 가야할 길(The Way men have to go)이며, 곧 '인간의 도리道理'를 일컫는다.

德’은 도의 밝음을 사람이 그대로 좇아 이행하는 것이다. 『논어』에서 ‘도’와 ‘덕’은 대체로 ‘마땅히 해야 할 인간의 도리’ 정도의 개념으로 통용된다.

≪참고: 『노자』에서 ‘道’는 천연한 우주의 섭리를 물아일체의 입장에서 관찰한 개념으로서 ‘우주대자연의 섭리와 같은, 상자연한 도’를 일컫는다. 그러한 도의 실체와 작용이치(섭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몸으로 체득하는 것을 ‘도의 밝음’이라 일컫는다.

마음의 빔을 지극하게 하고 성정을 고요히 함으로써 노자는 스스로 참된 본성을 닦아 사물의 근본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였고, 그러한 물아일체의 바탕에서 한 치도 어김이 없는 무한한 섭리로 도도히 운행하는 우주대자연의 어떤 유기적 실체를 통찰하였던바, 이것이 곧 ‘도道(의 존재)’이다. 『노자』에서는 이를 ‘天之道’ 또는 大道’라고도 하였다.

덕德’이란 ‘道’의 밝음을 인간이 그대로 좇아 참되게 이행하는 것을 말하며, ‘인仁’은 그러한 덕을 백성으로서 한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지극히 행함을 일컫는다.≫

: 『논어』에서 말하는 공자의 ‘禮’는 단순히 윤리와 범절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마땅히 가야할 길, 즉 ‘道’인 것이며, 삶의 윤리이고 문화이고 법이 된다. 그리고 인을 행하는 최선의 수단인 것이다.

따라서 예를 잃는다는 것은 곧 삶의 법도를 거스르는 일이며 도를 잃는 것이다. 공자는 그래서 정성을 다하여 예를 행하되 현실에서의 쓰임에는 그 조화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禮’는 본래 음식을 풍성히 차려놓고 귀鬼와 신神에 제사지내는 의미의 글자이다. 귀와 신, 곧 귀신이 천상과 지상의 모든 세계를 지배하던 당시의 현실은 살아있는 사람을 제물로 바쳐 귀신의 환심을 얻으려할 정도로 귀신이 사람보다 더 높고 실질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한 대상에게 제사를 올린다는 것은 자신과 종족의 생존 그리고 안정된 삶을 허락받는 지극히 신성한 행위이며, 현실을 살아가는 일상 그 자체로서 현실의 그 어느 행사보다 중요한 의식이고 삶에 있어 최상위의 가치이자 수단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禮’는 천지대자연과 인간, 사물 간의 심원원리를 뜻하며, 이는 결국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가치기준이나 사회윤리, 법도에 관한 기본 틀이 되는 것이다.

仁: 『논어』에서 공자가 말하는 ‘지극한 仁’이란 어떤 사람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다른 사람을 대함에 사사로운 욕심이 전혀 없고, 그 마음가짐이나 처신이 자연의 섭리처럼 마땅하여 조화가 지극함을 말한다. 곧, 우주대자연의 섭리와도 같은 천연한 그대로의 심신과 그로 말미암은 행위를 일컫는 것이다.

본래 ‘仁’이란 ‘사람과 사람간의 지극한 도리’ 정도로 말할 수가 있는데, 이러한 ‘仁’의 개념은 공자가 나중에 『주역(문언전文言傳)』에서 ‘하늘의 원본元本’으로서 ‘元’이 곧 인의 본질이라 설명하면서 ‘천지자연의 천연한 조화’ 정도로까지 그 의미가 확장된다.

지도자로서 ‘천지자연의 천연한 섭리와도 같은 조화’는 노자가 일컫는 ‘德’의 개념이기도 하다. 노자의 개념으로 덕이란 ‘우주대자연의 섭리 같은, 상자연한 도의 밝은 이치’를 사람이 그대로 좇아 행하는 것이다. 만년에 공자는 인의 의미를 이러한 덕의 경계로까지 확장하였던바 공자의 덕 또한 노자의 덕과 궁극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이다. ‘지극한 인’이란 결국 내면에 갖취진 ‘우주대자연의 섭리와도 같은 덕’을 바탕으로 하여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행위를 의미한다. 결국 지극한 인은 참된 덕과 아무런 차이가 없으되 다만 하나가 있다면 인은 나 이외의 사람에 대한 ‘자기표현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덕과 인은 사회전체의 평화와 행복을 추구한다는 목적과 취지는 다르지 않으나 ‘덕’이 지도자의 입장에서 (도의 밝음을 좇아) 전체백성을 조화롭게 한다는 것이 본질이라면, ‘인’은 한 개인이 사회의 같은 구성원으로서 다른 개인을 지극히 대하는 입장이라는 차이가 있다.

‘덕’은 ‘도의 밝음’을 사람이 좇아 그대로 이행하는 것이며, ‘克己’란 자기가 스스로를 닦아서 덕德의 밝음을 지극히 하는 것이다. ‘克己復禮’란 스스로를 닦아서 지극한 예로 되돌리는 것이다. ‘克己復禮為仁(극기복례로 어질게 되다)’은 인을 행하는 핵심수단이 바로 예라는 것이고, 그에는 상황에 따른 균형과 조화가 필요하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결과적으로, 공자가 말하는 인과 예는 각각 따로 분리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며, 예는 인을 행하는 최선의 수단인 것이다. 결국, ‘극기복례로 비롯한 인’은 노자가 말하는 ‘천지자연의 섭리 같은, 상자연한 덕’과 별반 차이가 없다.

한편, 공자 이후의 유가에서 말하는 ‘인덕仁德’은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으며, 이는 德과 仁의 의미를 굳이 구분하지 않는 유가의 현실적인 인식관으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吾道一以貫之: 『논어』 이인편 제4-15장 ‘吾道一以貫之(나의 도는 하나로 꿰어있다.)’에서의 ‘一’은 하나의 근본바탕을 뜻한다. 즉, ‘一’은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기본 틀(혹은 기본원리)을 가리키는 것이며, ‘나의 도는 하나로 꿰어있다’는 것은 인을 행함에 있어서 나의 도는 ‘극기복례’라는 하나의 기본원리로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음을 말한다. 이 말에는 그 외 세세한 것들은 상황에 따른 조화와 균형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포함된다.

공자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았으나 유독 진실로 미워했던 부류로는 ‘향원’이 있다. 이는 그 당시에 이미 민간에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기존의 유학자들로서 기득권을 가지고 백성을 갈취하던 원시 유학자를 일컫는다. 그 대표적인 예가 소정묘라는 인물이다. 소정묘는 당시의 선동가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며 현실정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정치꾼이었다. 공자의 나이 56세 때 대사구로 재상을 겸하면서 가장 먼저 처리하였던 일이 소정묘를 처형하는 일이었다.

“유자儒者란 교묘하여 법도를 좇으려 않으며 오만하고 제멋대로이니 아래로 삼기 힘들고, 상례를 숭상하여 애도를 다한다며 파산에 이를지라도 장례는 후히 하니 풍속에 득이 없고, 유세나 하고 다니면서 재물만 빌어먹으니 나라에 득이 없습니다.

주나라가 창업된 이래 큰 현인이 없어진 이후 왕실이 쇠약하여 예와 음악이 없어진 것이 오래 되었습니다. 지금 공구가 예복을 성대하게 차려입고 임금에게 예절과 진퇴의 절도를 번잡하게 하고 있으니 여러 대를 두고 하더라도 그 학문을 다 할 수 없고, 한평생 하여도 그 예를 다 할 수 없습니다. 임금께서 그를 써서 제나라의 풍속을 고치고자 하시면 그것은 어리석은 백성을 위하는 첫 번째 일이 아닙니다.”

이 말은 제 경공이 공자를 크게 등용하려 할 때 재상 안영晏嬰이 공자를 반대하여 간하였던 내용인데 실은 향원에 대한 설명이었던 것이다.

(안영은 춘추시대 제나라의 정치가로 이름은 영嬰 자는 중仲이며, 시호는 평平으로 평중平仲이라고도 불린다. 스스로 청렴하여 제나라 영공靈公ㆍ장공莊公ㆍ경공景公 3대에 걸쳐 나라를 바르게 이끌었던바 관중管仲과 더불어 후대까지 훌륭한 재상으로 존칭되며 안자晏子라 불리기도 하였다.)

 

 

3. 공자와 노자 사상의 요체 및 그 공통점과 차이점

『노자』와 『논어』를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는 지도자의 청정한 정신과 사사로움이 없는 마음 그리고 심원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천하를 자연의 섭리처럼 조화로운 질서로 조성하는 것이다. 그 속에서 민초들은 평화롭고 자유롭게 즐거운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사람은 맹수나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척박한 환경에 적응하여 먹고 자고 입으며 스스로 건강하게 생명을 유지함으로써 최선을 다해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본래부터 삶의 근본실질이며 복된 일상의 원형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웃과 더불어 서로를 배려하며 자유롭고 평화롭게 생명을 즐기면서 자유롭게 지금을 살아가는 것이 궁극적인 복福인 것이다. 복(행복)이란 본시 넘치는 재물이나 남다른 지위, 불후의 영예 같은 것이 아니라 천재지변이나 전쟁, 질병 같은 환난이 없이 나와 가족의 건강과 화목하고 평화로운 일상이 그 핵심인 것이다.

참된 삶이란 결국 막강한 권세, 고귀한 신분, 넘치는 재화로 인한 화려하고 풍족하며 거룩한 삶이 아니라 소박하게 생업에 충실하며 필요한 만큼의 음식을 맛나게 먹고, 검소하나마 맵시 있게 옷을 입으며, 이웃과 더불어 화목하게 풍속을 즐기면서 마음껏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공자와 노자는 공히 모든 민초들의 삶이 천연한 본성을 바탕으로 자유롭고 행복하여야 한다는 키워드로 시종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그 양자 간의 차이점이라면 노자의 경우 천하의 지도자가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려놓은 채 물아일체의 상태에서 만물을 공평하게 대함으로써 천하의 질서를 조화롭게 아우른다는 입장이고, 공자의 경우 그러한 천하의 지도자 역시 사회의 동등한 한 구성원으로서 백성들과 더불어 상호 보완적 입장이라는 것이다. 즉, 노자가 지도자 주체의 시각이라면, 공자는 참된 인성과 통찰력을 겸비한 선비를 주체로 하는 시각인 것이다.

노자는 우주대자연의 천연한 그대로를 (물아일체의 관점에서) 사실적인 시각으로 관찰하고 기술하는 자연과학적 방식으로 도와 덕을 파악한다. “마음의 빔을 지극하게 하고 성정을 고요히 함으로써 노자는 스스로 참된 본성을 닦아 사물의 근본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였고, 그러한 물아일체의 바탕에서 한 치도 어김이 없는 무한한 섭리로 도도히 운행하는 우주대자연의 어떤 유기적인 실체를 통찰하였던바, 이것이 곧 ‘도道(의 존재)’이다.(『노자』제14장 및 제16장 靜ㆍ命ㆍ常ㆍ明, 제25장 道法自然ㆍ獨立不改 참고)

덕德이란 인간이 직접 도를 행할 수는 없는바 그러한 도의 밝음을 인간이 그대로 좇아 참되게 이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귀鬼와 신神, 즉 귀신(곧 천제나 천신)이 하늘과 땅, 우주를 지배하는 당시의 세계관에서 우주대자연을 있는 그대로 사실적인 시각으로 관찰하고, 관찰한 그대로 가감 없이 받아들이는 자연과학적인 이념의 세계관으로의 전환을 공개적으로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노자의 이념은 당시로서는 기존의 세계관에 도전하는 엄청난 진보적 사건이다. 공자의 이념 또한 당시 귀족 중심의 중앙정치에 백성이 직접 당사자로서 관여한다는 기존의 정치의 틀을 뛰어넘는 파격 그 자체인 것이다. 공자와 노자의 논리는 공히 형이하학적이며 천연한 그대로의 자연과학적 시각과 논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노자의 그러한 근본적 입장을 ‘순수 인문학’이라 한다면, 공자의 경우 그것은 실생활에 적용하는 ‘응용 인문학’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한 사람의 최고 권력자로 인하여 백성의 삶이 자유롭고 풍부하기도 하였으나 권력자 한 사람의 왜곡된 가치나 이념, 사사로운 욕심이 민초의 삶을 억압하고 피폐하게 만들기도 하였던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참된 선비들이 무능한 지도자를 이끌어 민초들의 삶을 풍부하게 하기도 하였으나 신하의 독선과 오만, 사욕이 정치를 파탄내고 민초의 삶을 곤궁하게 하였던 것 또한 역사의 오래된 진실이다.

오늘날은 이미 인성과 자질이 완벽한 임금이나 노자, 공자 같은 성인을 기대할 수도 없고, 그러한 자질을 가진 성인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대적 환경도 아니다. 지금은 지명도와 인기만 있으면 그 누구라도 대통령, 즉 왕이 될 수 있는 세상인 것이다.

당연히 『노자』나 『공자』를 액면 그대로 현대생활에 적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를 수가 없는 것이 생명의 보존, 안정된 생활, 행복 등과 같은 삶의 가치는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그 본질이 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에 『노자』와 『논어』를 실제로 생활에 활용한다면 『노자』는 자기의 정신과 인성을 닦는 교범으로 이용할 수 있으며, 『논어』는 조금 더 응용하여 사회생활의 기본지침서로 활용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옛 사람의 뛰어난 인성과 통찰력을 바탕으로 의술이나 심리, 정치, 사회, 인문, 예술 등의 기능을 익혀 응용한다면 누구든지 성인다운 인성과 자질, 재능을 갖출 수가 있을 것이며, 그러한 사람들이 주관하는 사회는 진실로 건강하고 조화로우며 행복할 것이다.

 

 

4. 공자의 위대한 점

공자의 위대한 점은 술이편 제7-2장 ‘默而識之 學而不厭 誨人不倦 何有於我哉<묵묵히 (성인의 도를) 되새기면서 배우되 싫증내지 않는 것, 사람을 가르침에 게으르지 않는 것, (그것 외에) 내게 (할 일이) 무엇이 있으랴?>의 구절로 요약된다.

 

첫째. 어릴 적부터 묻고 배우고 익히기에 남달리 노력하면서 스스로를 경계하여 사사로움이나 안일을 조금도 허용치 않았다. 학문과 재능이 그 누구보다 뛰어났음에도 끊임없이 묻고 배우기를 주저하지 않고 오히려 배움을 즐기면서 죽는 그날까지도 치열하게 최선을 다하며 현실을 살아냈던 것이다.

 

둘째. 이웃을 자기와 같은 높이로 배려하며 모든 사람이 더불어 평화롭고 행복한 삶이 되고자 하였으며, 배움에 뜻을 두었다면 누구에게나 최선으로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배우는 사람의 습관과 환경을 고려하며 그 자질과 능력에 맞도록 각자에 대한 맞춤방식으로 가르침에 평생토록 노력하였던 역사상 최고의 교육자였다.

 

셋째. 공자는 부지런히 배우고 참되게 익히며 끊임없이 연구하여 학문과 재주가 그 누구보다 뛰어났으며 삼천여 명이나 되는 제자를 두었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이부작述而不作(술이편 제7-1장)’이라 하며 자기 나름의 이념으로 창작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스스로 옛날 성인의 도를 체득하였고, 그 도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으며 앞으로도 다를 것이 없다고 확신하며 그것을 사람들에게 올바로 전술傳述하되 새로이 창작하여 이론理論을 짓지 않은 것이다. 이는 공자의 도에 대한 이해정도를 한마디로 대변하는 키워드이자 그의 위대함을 추측할 수 있는 가장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자료가 될 것이다.

우주대자연의 섭리와도 같은 천연한 그대로의 심신과 그로 말미암은 행위가 사람에 있어서 도와 덕의 본질이다. 물아일체의 관점에서 사물의 근본실질을 바라보게 되면 만물은 모두가 다만 하나로 더불어 있을 뿐 저마다의 입장과 관점이라는 개념은 본질적인 입장에서는 의미가 없다. 흔히들 말하는 ‘각자의 입장이나 논리라는 것은 사물의 본질을 둘러싸고 있는 겉모습을 어느 한 각도에서 바라본 시야를 대변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참된 도의 눈으로 보면 옛날의 도와 지금의 도가 서로 다를 수 없는 것이고, 공자가 말한 ‘술이불작’은 이러한 입장을 대신하는 표현이며 그것은 지극한 밝음을 아는 성인에게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그토록 다방면으로 앎과 재능이 뛰어났음에도 공자가 나름대로의 이념으로 창작을 하지 않고 교육과 전술에 심혈을 기울인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진실로 도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미 전해지는 옛 성인의 말보다 더 참되고 완전한 진리는 없음을 아는바 공자는 자신의 지식이나 통찰력 또한 옛 성인의 도와 다르거나 그 이상의 것이 아님을 안다. 거기에 무엇을 덧붙여 수정하거나 새로이 창작하여 독자적으로 진리를 구현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외람된 일이며 이미 사족이라는 것이다.

다만,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하므로 그 중 잘못 전해지는 부분을 바로 잡아서 올바르게 전하는 것만이 공자 자신의 할 일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