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도덕경(31장~40장)

노자 도덕경 제37장

나무와 까치 2013. 12. 2. 08:44

제37장. 박樸

 

 

 

도상무위이무불위 후왕약능수지 만물장자화

道常無爲而無不爲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도는 늘 위함이 없으나 하지 않는 것이 없다. 후왕이 (도를) 지킬 수 있으면 만물은 장차 스스로 (순박하게) 변화한다.

 

-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후왕이 (도를) 지킬 수 있으면 만물은 장차 스스로 순박하게 변화한다.(제32장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賓 참고)  

 

화이욕작 오장진지이무명지박 무명지박 부역장무욕 불욕이정 천하장자정

化而欲作 吾將鎭之以無名之樸 無名之樸 夫亦將無欲 不欲以靜 天下將自定

(그렇게) 변화할 것이되 (그래도 굳이 무엇을) 짓고자하면 나는 이름 없는 통나무둥치로 진정시킨다. (만물 모두가) 이름 없는 통나무둥치면 다들 역시 (사사로운) 욕심이 없게 된다. (사사로운) 욕심을 내지 않음으로써 (그 성정이) 고요해지고 천하는 장차 스스로 안정된다.

 

- 化而欲作 吾將鎭之以無名之樸: (그렇게 순박한 성정으로) 변할 것이로되 (그래도 굳이 무엇을) 짓고자하면 나는 이름 없는 통나무둥치로 진정시킨다.(作: 제2,16,37,55,63장)

‘樸’은 ‘통나무둥치’로서 ‘질박한 근본바탕’ 혹은 ‘근본실질’을 일컫는다. ‘無名之樸’은 ‘이름 없는 통나무둥치’이며, ‘질박한 근본’으로 새긴다.(樸: 제15,19,28,32,34장)

 

- 名: ‘名’의 옥편 자의는 ‘이름ㆍ명분ㆍ이르다’ 등이며, ‘사물의 정상을 분별하여 이르다(名하다)’를 뜻한다. 사물은 말로 이름으로써 상대적으로 개념화되고 문자에 의하여 정형화된다.

천지만물은 본래 분별하여 이름(‘이르다’의 명사형)이 없는 ‘無’로 된 하나의 뒤섞인 덩어리였다. 그처럼 하나의 근본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어떤 실체를 (사람이) 상대적 관념으로 인식하고 분별함으로써 차이가 생기게 되고, 그에 따라 이름이 붙여짐으로써 만물의 구분이 생겨나는 것이다. 어떤 객체에 이름을 붙여 이른다는 것은 사물의 정상을 상대적 관점으로 인식하고 이를 개념화하여 규정하는 행위이다.

여러 사람에 의해 다양한 관점에서 인식되는 ‘이름’은 각자 주관적 관점에서 상대적으로 객체를 받아들임으로써 피아를 구분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이름(이르다)으로써 규정된 대상은 그 사물의 한결같은 본래의 모습 그대로일 수가 없다.

(예로부터) 지금껏 있어온 이념이나 법식 등을 전해져오는 명분과 형식으로 답습하며 그 ‘이름’으로써 사물을 인식하고 분별한다는 것은 ‘大道’의 밝은 이치를 통찰함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장애요인이 되는 것이다.

이토록 중요한 ‘名’의 의미를 특별히 강조하고자 도경의 맨 처음인 제1장의 無名ㆍ有名과 마지막 제37장에서 ‘無名之樸(이름 없는 질박함)’을 서로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제1장 名可名 非常名 및 제32장 始制有名 名亦旣有 夫亦將知止 참고)(名: 제1,14,21,25,32,34,37,41,44,47장)

 

 

[章注] 제37장은 「도경」의 마지막 장으로서 제1장의 ‘名’과 ‘‘無名之樸’에 대한 중요성을 또다시 강조하며 마무리한다. 상자연한 도의 속성은 오직 ‘이름 없는 樸’, 즉 ‘질박함’으로써만이 참되게 행할 수 있는 것이다.

한없이 크고 심원한 도는 이 세상 아주 깊숙한 곳에서 언제 어디에서나 끊임없이 작용하면서도 스스로 드러나지 않으며, 미약한 듯 늘 위함이 없으나 하지 않는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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