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도덕경(51장~60장)

노자 도덕경 제 52장

나무와 까치 2014. 4. 7. 08:16

제52장. 모자母子

 

 

 

 

천하유시 이위천하모 기득기모 이지기자 기지기자 복수기모 몰신불태

天下有始 以爲天下母 旣得其母 以知其子 旣知其子 復守其母 沒身不殆

천하의 시작이 있어 (그 시작은) 천하의 어미가 된다. 이미 그 어미(도의 밝음)를 얻고 그로써 그 아들(천하)을 알며, 아들을 알고 다시 그 어미를 지킨다면 몸이 다하도록 위태롭지 않다.

 

- 天下有始 以爲天下母: 천하의 시작이 있어 (그 시작, 즉 도는) 천하의 어미가 된다. 천하의 시작이 있고, 그 시작이 곧 도이므로 도는 천하의 어미가 된다. 도와 천하를 모자간으로 비유하였다. 천하의 만물은 ‘有(천지)’에서 생겨났고, 천지(有)는 ‘無’에서 생겨났다(제40장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참고).(母: 제1,20,25,59장)

 

 

색기열 폐기문 종신불근 개기열 제기사 종신불구

塞其兌 閉其門 終身不勤 開其兌 濟其事 終身不救

(부귀공명에 대한) 기뻐함을 막고 (탐욕과 쾌락의) 문을 폐쇄하면 몸이 다하도록 (쉴 새 없이) 바쁘지 않되, 그 희열을 열고 (그로써) 정사를 구제하고자하면 몸이 다하도록 구하지 못한다.

 

- 塞其兌 閉其門: (성인은 스스로) 부귀와 공명을 기뻐하고 즐기는 열망의 감정을 근원적으로 막아서(塞其兌) 내면에 유입되지 않도록 그 탐욕과 쾌락의 통로를 폐쇄함으로써(閉其門) 맑고 깨끗한 정신으로 공평무사한 내면의 세계를 한 결 같이 유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즉, 성인이 백성을 공정하게 대할 수 있는 심신수양의 요체를 말하고 있다.(제56장 ‘塞其兌 閉其門’ 참고)

 

- 終身不勤: 여기의 ‘勤’은 ‘쉼 없이 부지런히 애씀’, 곧 '쉼 없이 바쁨'이다.(제6장의 ‘不勤’ 참고)

 

 

견소왈명 수유왈강 용기광 복귀기명 무유신앙 시위습상

見小曰明 守柔曰强 用其光 復歸其明 無遺身殃 是謂習常

(임금이) 작은 것을 보며 밝다하고 (짐짓) 부드러움을 지키면서 (스스로) 강하다고 하는데, (스스로 존엄한) 그 빛남을 써서 (도의) 밝음으로 되돌아간다면 몸에 재앙을 끼침이 없다. 이를 습상(常을 익힘)이라 한다.

 

- 見小曰明 守柔曰强: 작은 것을 보며 밝다 하고, (짐짓) 부드러움을 지키면서 강하다고 한다. (不善의 임금이) 자잘한 것을 보며 그것을 ‘도의 밝음’이라 하고, (짐짓) 부드러움을 지키면서 그것을 ‘(스스로 능력이) 강하다’고 한다.

여기서 ‘明’은 기존의 소위 ‘자잘한 도의 밝음’이며, ‘小’는 그 자잘한 도의 밝음으로써 보는 어떠한 현상을 일컫는다.(제55장 益生曰祥 心使氣曰强 참고)

≪참고, 선도仙道 개요: 선도란 도통하여 내가 태어난 본자리인 도계道界의 원신元神으로 돌아가서 영생한다는 것이 그 근본원리이다. ‘元神’이란 하늘에 있는 道界에서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것을 경영하는 ‘道 그 자체의 존재’를 말한다. 말하자면 우주의 모든 神 중에서 으뜸신이며, ‘나’의 영혼靈魂이 분리되어 나온 ‘본자리’인 것이다.

‘도통’이란 호흡을 통하여 기운을 축적하고, 축적된 기운을 운용하여 심신의 강화하여 능력을 키우며, 그렇게 성명쌍수性命雙修하여 양신陽神을 이루고 스스로 도체道體(도계道界를 출입할 수 있는 자기의 분신)가 됨으로써 도에 통달하여 도계의 원신으로 돌아가 불멸의 생명을 얻고 영생한다는 것이 그 본질이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하늘로 돌아가는데, 그 영혼들은 생시의 수련정도에 따라 여러 단계의 天界에서 각각 대기하였다가 여러 天界 중 최고차원의 도계에 있는 원신에 의하여 원기元氣(태화太和의 정기)를 받음으로써 다시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이 仙道의 세계관이다.

현재의 육체는 道의 완성, 곧 道通을 얻기 위한 수련의 필요에 따라 잠시 빌리고 있다는 개념이며, 현실의 삶은 天界에서 영생하기 위한 수련과정일 뿐 진정한 삶은 天界에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선도 관련 사적: ‘신선神仙’에서 선仙의 본자는 선僊이다. 지금까지 신선神仙에 대한 기록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것은 갈홍(284년-363년)의 『신선전』과 『포박자』가 있으며, 『포박자』는 이후 도교 사상의 성립에 핵심적 요소로 발전한다.

그 외에 『사기』「봉선서封禪書」, 『열자』「탕문편湯問編」 등에서도 단편적으로 언급하고 있고, 후기의 황로학에서도 노자를 가탁한 신선사상을 보이고 있다.

한편, 그와는 무관하게 신선사상은 이미 고대 상商ㆍ주周 시대에 널리 유포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대의 제齊나라와 초楚나라에서 특히 신선 사상이 성행했던 것으로 여겨지는바, 실제로 그 두 지역에서는 신선 사상과 관련된 그림, 벽화, 유물들이 다른 지역보다 많이 발견되고 있으며, 춘추 전국 시대 각지의 묘지 부장품들에서도 신선사상을 표현한 그림들이 적잖게 출토된다.

또한, 풍몽룡의 『열국지』에는 진목공秦穆公(BC659년-BC621년재위)의 딸 농옥弄玉과 부군인 소사蕭史가 속세의 부귀영화를 초탈한 채 음풍농월하며 청정하게 살다가 어느 날 신선神仙이 되어 승천했다는 전설이 실려 있다.≫

 

- 用其光 復歸其明: 그 빛을 써서 (도의) 밝음으로 되돌아가다. 여기서 ‘光’은 ‘(임금의 스스로 존엄한 품위의) 빛남’이며, ‘明’은 소위 ‘자잘한 도의 밝음’이 아니라 ‘(우주대자연의 섭리와 같은) 大道의 밝음’이다.(復歸: 제14,16,28장)

≪참고, 『노자』의 도: 노자가 활동할 당시에도 이미 ‘도’라는 것이 성행하고 있었다. 다만 그 당시 도라는 것은 여전히 그러한 귀신이나 천제, 천신, 신선 등이 주재하는 전통적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한 채 혼융되어 그 연장선상에 있거나 그로부터 파생한 것으로서 다분히 신비롭고 주관적인 모습의 소위 ‘신선도神仙道’였으며, ‘각 문파마다의 도’였던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노자가 제시한 것이 ‘도덕사상’이다. ‘도덕사상’은 그저 단순한 자연주의 이념이 아니다. 『노자』는 사물의 천연한 그대로를 물아일체의 관점에서 사실적으로 관찰하고 기술하는 자연과학적 방식으로 도와 덕을 정리하였다.

이는 귀鬼와 신神, 즉 귀신(곧 천제나 천신)이 우주를 지배하는 당시의 세계관에서 우주대자연을 있는 그대로 사실적인 시각으로 관찰하고 관찰한 그대로 가감 없이 받아들이는 자연과학적인 이념의 세계관으로 전환을 시도한, 당시로서는 엄청난 대사건이었다.

마음의 빔을 지극하게 하고 성정을 고요히 함으로써 노자는 스스로 참된 본성을 닦아 사물의 근본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였고, 그 물아일체의 바탕에서 한 치도 어김이 없는 무한한 섭리로 도도히 운행하는 우주대자연의 어떤 실체를 통찰하였던바, 이것이 곧 ‘도道(의 존재)’이다.

덕德이란 그러한 도의 밝음을 인간이 그대로 좇아 참되게 이행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이 직접 도를 행할 수는 없다. 도의 밝음을 사람(왕)이 그대로 좇아 행하는 그것이 사람의 도이며, 이는 곧 참된 덕(上德)이다. 만물이 나서 늙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모두 德의 운영에 따른다. 성군은 그러한 섭리를 참되게 따를 뿐이며, 이를 현덕이라 이른다.

그로써 왕은 천지자연의 섭리 같은 조화로운 질서 속에서 모든 것을 긍정하고 포용하며 백성과 더불어 자유롭게 살아가고, 백성은 모두가 부귀권세를 모른 채 그저 생업에 충실하며 소박하나마 맛나게 먹고 맵시 있게 입으며 화목하게 이웃과 더불어 마음껏 자유로운 일상을 즐기면 그만인 것이다. 그렇게 사람은 자유롭게 천수를 누리다가 다시 道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도덕사상’이다.

 

- 是謂習常: 이를 일컬어 ‘상을 익힌다’고 한다. ‘常’의 자의는 ‘항상 상’, ‘떳떳할 상’이며 ‘천연한 그대로의 한결같음’이다. ‘습상’은 천지대자연의 천연한 한결같음을 익힘이며, 곧 ‘상자연常自然’을 뜻한다. ‘상자연’은 도의 밝음에 이르는데 있어서 근본요소이다.(제16장 復命曰常 知常曰明 및 제55장 知和曰常 知常曰明 참고)

 

 

[章注] 원문 旣得其母 以知其子는 「하상공장구」에 旣知其母 復知其子로 되어 있고, ‘子 一也 旣知道已 當復知一<‘자식’은 ‘하나(一)’이다. 이미 도를 안다면 마땅히 다시 하나를 안다>’이라 주석하는데, 여기서 하나(一)는 元氣(태화의 정기)를 말한다.

선도에서 도를 안다는 것은 ‘道通’을 뜻하며, 원기(一)는 도의 본체(元神)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도를 안다면 하나(一)를 아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 ‘하상공’은 원문 塞其兌에서 ‘兌 目也 目不妄視<‘열’은 ‘눈’이다. 눈으로 망령됨을 보지 않는다.>’라고 주석하고, 원문 閉其門은 ‘門 口也 使口不妄言<‘문’은 ‘입’이다. 입은 망령됨을 말하지 않도록 한다.>’라고 풀이한다.

원문 見小曰明 守柔曰强에서 ‘하상공’은 ‘萌牙未動 禍亂未見 爲小 昭然獨見 爲明 守柔弱 日以强大也<싹이 트지 않고 화란이 드러나지 않음이 ‘작음’이며, 빛나게 홀로 드러나는 것이 ‘밝음’이다. 유약함을 지킨다면 날마다 강대해진다.>’이라 해석한다.

왕필은 이 부분을 ‘爲治之功不在大 見大不明 見小乃明 守强不强 守柔乃强也<다스리는 공은 큰 데 있지 않다. 큰 것을 보는 것이 밝은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을 보는 것이 곧 밝음이다. 강함을 지키는 것이 강한 것이 아니라 부드러움을 지키는 것이 곧 강한 것이다.>’라고 주석함으로써 「하상공장구」와 해석을 같이하고 있다. 또한, 왕필의 「노자지략」에는 여기의 ‘見小曰明’과 유사한 내용으로 ‘夫察見至微者 明之極也(무릇 아주 미세한 것을 살펴서 본다는 것은 밝음이 지극하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러한 해석은 원문 ‘見小曰明’의 본래 취지와는 정반대의 풀이가 되는데, 그처럼 원문의 뜻과 달리하는 「하상공장구」와 왕필주석의 형태도 서로가 닮아 있다.

원문 用其光에서 ‘하상공’은 ‘用其目光於外 視時世之利害也<그 눈빛을 밖에 사용하여 현실의 이해를 살핀다.>라고 주석하며, 왕필은 이 부분을 顯道以去民惑<도를 드러내어 백성의 미혹을 제거한다.>’라고 풀이한다.

‘하상공’은 원문 復歸其明에서 ‘言復當返其光明於內 無使精神泄也<마땅히 그 눈빛의 밝음을 다시 안으로 되돌려 정신을 누설함이 없도록 한다는 말이다.>’라고 주석하며 선도의 관점으로 풀이한다.

한편, 왕필은 이 부분을 ‘不明察也<밝게 살피지 않는다.>’라고 주석한다.

원문 無遺身殃에서 ‘하상공’은‘ 內視存神 不爲漏失<내시하여 정신을 보존하고 새나가지 않도록 한다.>’이라 주석한다.

여기의 ‘내시內視’는 ‘내관內觀’의 뜻으로 ‘심신을 고요히 하여 내면을 관조한다.’는 일종의 마음수련 방편인데, 「하상공장구」는 본장 전체를 선도의 관점에서 풀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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