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도덕경(1장~10장)

노자 도덕경 제10장

나무와 까치 2013. 5. 27. 07:53

제10장. 현덕玄德

 

 

 

재영백포일 능무리호 전기치유 능영아호 척제현람 능무자호 애민치국 능무

載營魄抱一 能無離乎 專氣致柔 能嬰兒乎 滌除玄覽 能無疵乎 愛民治國 能無

지호 천문개합 능무자호 명백사달 능무위호

知乎 天門開闔 能無雌乎 明白四達 能無爲乎

나라에 있는 사람의 성정을 (차등 없이) 하나로 품어 (삶의 터전을) 떠나지 않도록 할 수 있는가? 오로지 (스스로) 기운을 유연하게 하여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될 수 있는가? (미망迷妄으로) 어둡게 봄을 닦아내어 (교만과 사치향락의) 허물이 없도록 할 수 있는가?

백성을 아낌으로 나라를 다스려 (학식의) 앎이 없도록 할 수 있는가? (그렇게 백성이 순박함으로써) 하늘 문의 문짝을 (활짝) 개방하되 암컷(의 은근하고 조용함)도 없도록 (은미하게) 할 수 있는가? (그로써 도의) 밝고 밝음이 천지사방에 이르도록 함을 (그처럼) 무위로 할 수 있는가?

 

- 載營魄抱一 能無離乎: 이 나라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의 성정을 (차등함이 없이) 하나로 품어 (삶의 터전을 등지고) 떠나지 않도록 할 수 있는가?

여기서 ‘載’는 ‘(땅에) 싣다’이며, ‘재在’와 같이 쓰였다. ‘營’은 ‘넓게 조성된 거주시설’을 의미하며, ‘백魄’은 ‘성정’ 혹은 ‘넋’으로 새긴다. 여기서 ‘一’은 선악이나 귀천의 구분과 차등이 없는 ‘하나’이다.(『장자』 ‘덕충부(제3-1절)’편 ‘天無不覆 地無不載’ 및 『예기禮記』 ‘공자한거孔子閒居’편 ‘天無私覆 地無私載’, ‘교특생’편, ‘魂氣歸于天 形魄歸于地’ 참고)

 

- 滌除玄覽 能無疵乎: (미망迷妄으로 인해) 어둡게 봄을 닦아내어 (부귀 권세의 탐욕이나 사치, 향락 같은) 병폐가 없도록 할 수 있는가? 여기서 ‘滌除’는 맑고 깨끗하게 닦아냄이다. ‘玄’은 여기서 자의가 ‘검다’이며, ‘어둡고 컴컴한’이다. ‘玄覽’은 ‘(미망迷妄에 가려) 어둡게 봄’이다. ‘疵’는 부귀권세의 교만과 사치향락의 허물이다.

 

- 愛民治國 能無知乎: 백성을 아낌으로 나라를 다스려 (학식을) 앎이 없도록 (순박하게) 할 수 있는가? 이 구절에서 ‘知(앎)’는 ‘(학문에 대한) 지식’이며, (순수하고 천연한 도의 밝음이 아닌) 문리文理적 사변과 형이상학적 추론에 의한 상대적 분별의 지식을 의미한다.

노자가 활동하던 춘추시대 말기는 가히 말세라 할 정도로 천제(천신)와 천자(왕)를 중심으로 한 기존의 귀족정치가 붕괴되면서 바야흐로 혹세무민의 제자학파나 미신이 급속히 확산하였다. 그런 한편으로, 특권층에 진입하는 문호가 일반에게도 개방되고 이에 대한 열망이 첨예하면서 지금까지는 귀족의 전유물이던 학문이 급속히 대중화하는 때이기도 했다.

당시는 물자가 귀한 고대농경사회인데다가 혼란한 정치상황으로 백성의 삶은 매우 피폐해있었던바, 당연히 하루하루의 의식주생활이 쉽지 않았고 더구나 백성은 무시로 전쟁이나 노역에 동원되던 것이 현실이었다. 백성들로서는 공역公役에 동원됨이 없이 배불리 먹고 즐겁게 살아가는 것 그리고 원만하게 가정을 꾸려 일상을 자유롭게 살아가는 그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이며, 진정한 삶의 가치인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학문을 장려한다는 것은 부귀권세의 사사로운 욕망을 위한 전쟁에 백성을 내몰고자 재주를 키우기 위한 것이므로 이는 백성을 아끼는 행위가 아니다. 백성은 다만 하루의 일상을 살아가고자, 나아가 안정된 삶이 보장되는 부귀권세를 확보하고자 학문과 지식을 겨루며 첨예하게 다투게 되는바 이는 백성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천하는 사악함이 넘치고, 이에 임금은 조세와 법령으로 교묘하게 백성을 감찰하는바 인간은 누구나 근본적으로 차등이 없음에도 학문學文을 숭상함으로 인하여 선악과 귀천으로 차별되며, 그럴수록 세상은 더욱 어지럽고 위태로워진다. 왕은 당연히 학식과 지혜를 떠받들지 말아야 백성이 순박한 본성으로 돌아오는 것이다.(제20장 ‘絶學無憂’ 및 제52,56장 ‘塞其兌 閉其門’, 제3장 使夫智者不敢爲也, 제18장 大道廢 有仁義 慧知出 有大僞, 제19장 絶聖棄智 참고)

 

- 天門開闔 能無雌乎: (그렇게 백성이 순박함으로써) 하늘 문의 문짝을 (활짝) 개방하되 암컷(의 은근하고 조용함)도 없도록 (은미하게 그것을) 할 수 있는가? 즉, 도의 밝음을 활짝 열어젖히되 ‘암컷 새(雌)’의 은근하고 조용함조차도 없이, 그 조짐이나 흔적조차도 없이 은미하게 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天(하늘)’은 ‘우주대자연으로서 하늘’이다. ‘天門’은 ‘하늘 문’이며, 곧 ‘하늘의 문호門戶’이다. ‘하늘의 문호’란 곧 도의 밝음을 간직한 문이며, 이곳의 문호를 활짝 열어젖힌다는 것이 ‘천문개합’의 의미이다. 여기의 ‘門’은 ‘學門’이나 ‘同門’의 ‘門’과 같은 ‘門戶’이다. 『장자』 ‘천운’편에도 ‘天門’의 용례가 나온다(제10장 끝부분 ‘天門弗開矣’).

한편, 본장의 원문 ‘能無雌乎’에 대하여 「하상공장구」에서는 이 부분 원문을 ‘能爲雌乎(능히 암컷처럼 하는가)’으로 하여 ‘無’ 대신에 ‘爲’로 되어 있는데, ‘雌(암컷 새)’의 은근한 여성적 이미지로서 얼핏 ‘能爲雌乎’가 적절해 보이나 여기서는 그러한 ‘雌(암컷 새)’의 은근함보다 더욱 은미하게, 그 조짐이나 흔적조차도 없이 도의 밝음을 이행토록 주문하고 있음에 주의한다.(雌ㆍ雄: 제28장)

 

- 明白四達 能無爲乎: (도의) 밝고 밝음이 천지사방에 이르도록 함을 (그처럼) 무위로 할 수 있는가?(明: 제16,41장)(白: 제28,41장)

 

 

생지축지 생이불유 위이불시 장이부재 시위현덕

生之畜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덕이) 낳아서 먹여 기른다. (만물이) 살아감에 있어서 (스스로)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위하여 (그에) 의지하지 않으며, (삶을) 이끌되 주재하지 않는다. 이를 일컬어 현덕(가마득하게 큰 덕)이라 한다.

 

- 生之畜之: (덕이 만물을) 낳아서 먹여 기른다. ‘德’은 도가 행하는 바를 그대로 좇아 만물을 생성하고 먹여 기른다. 만물을 낳아 먹여 기르는 천天과 지地를 ‘德’이라 일컫는 것은 바로 도를 그대로 좇아 행하는 덕의 속성을 말한다.(제21장 ‘孔德之容 唯道是從’ 참고)

 

- 生而不有: (덕은 만물이) 살아감에 있어서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노자』에서는 ‘不有’가 여러 곳에 나오는데, 이는 대체로 ‘(자신의) 존재를 내세우지 않는다.’ 혹은 ‘존재를 내세우며 (만물을) 주재하고자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새길 수 있다.(生而不有: 제2,10,51장)

 

- 爲而不恃: (사사로운 의도가 없이) 위하되 (대가를 기대하며 그에) 의지하지 않는다. 즉, 위해주고 은혜를 입히며 충성을 부추기지 않는다. (爲而不恃: 제2,10,51,77장)

 

- 長而不宰: (백성의 삶을) 이끌되 주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長’은 ‘(수장으로서) 이끌다’이다.

 

- 是爲玄德: ‘玄’의 자전적 의미는 ‘검다, 컴컴하다, 가마득하다’이다. 여기서는 ‘가마득하게 멀고 큼’으로 쓰였으며, ‘현덕’은 ‘가마득하게 큰 덕’ 혹은 ‘지극한 덕’으로 새길 수 있다.(玄: 제1,6,10,15,51,56,65장)(玄德: 제10,51, 65장)

 

 

[章注] 본장은 제9장의 ‘富貴而驕 自遺其咎 功遂身退 天之道’에 이어서 ‘임금이 스스로 부귀권세의 교만과 사치향락의 허물을 벗어나 도의 밝음을 활짝 열어 은미하게 이행할 수 있는가?’라고 한다.

임금은 세상 만물의 근본을 하나로 안아 그들이 삶의 터전을 떠나 유랑하지 않게 하겠는가? 임금이 스스로 그 기운을 영아처럼 부드럽게 하여 자기의 미망을 닦아 교만과 사치향락의 허물을 벗어나며, 백성을 아껴서 그 순박함을 유지하여 도의 밝음을 활짝 개방하되 그것을 흔적도 없이 은미하게 무위로 이행할 수 있는가? 그러한 것이 ‘현덕(가마득히 큰 덕)’이다.

 

원문 載營魄抱一 能無離乎에서 ‘하상공’은 營魄 魂魄也 人載魂魄之上得以生 當愛養之 喜怒亡魂 卒驚傷魄 魂在肝 魄在肺 美酒甘肴 傷人肝肺 故魂靜志道不亂 魄安得壽延年也 言人能抱一 使不離於身則長存 一者 道始所生 太和之精氣也 故曰一 一布名於天下 天得一以淸 地得一以寧 侯王得一以爲正平 入爲心 出爲行 布施爲德 總名爲一 一之爲言 志一而無二也<‘영백’은 ‘혼과 백’이다. 인간은 혼백위에 실려 살아가는 것이니 마땅히 이를 아끼고 길러야 한다. 기뻐하거나 화내면 혼이 없어지고 갑자기 놀라면 백이 상한다. 혼은 간에 있고 백은 폐에 있는데, 맛있는 술과 안주는 사람의 간과 폐를 상하게 한다. 고로 혼이 고요하면 도에 대한 뜻이 어지럽지 않고, 백이 안정되면 수명이 연장된다. 사람이 하나를 끌어안아 (맑은 정신이) 몸에서 떠나지 않게 할 수 있다면 오래 산다는 말이다. ‘하나(一)’는 도가 맨 처음 낳은 태화의 정기이다. 그러므로 하나라고 말한다. 하나는 세상에 이름을 편다.(각각 만물의 본성이 되어 만물로 태어난다.) 하늘은 하나를 얻음으로써 맑고, 땅은 하나를 얻음으로써 평안하며, 후왕은 하나를 얻음으로써 바르고 공평하게 된다. (이는) 안에서는 마음이 되고, 밖으로는 행동이 되며, 널리 베풀어 덕이 되는데, 전체를 이름 붙여 이르면 하나(一)가 된다. 하나라고 하는 말은 뜻이 한결같아서 둘로 갈라짐이 없다는 것이다.>라고 주석하여 선도적 관점을 보이고 있다. 여기서 ‘하상공’은 ‘一’을 ‘태화의 정기’라 하여 ‘인간의 근본’이라 하며, ‘맑은 정신’ 혹은 ‘본성’을 뜻하고 있다.

한편, 왕필은 위의 원문에 대하여 ‘一 人之眞也<하나는 사람의 바탕이 참됨이다.>’라고 주석하고, 제42장에서는 ‘萬物萬形 其歸一也 何由致一 由於無也 由無乃一 一可謂無<만물의 만 가지 형태는 모두 하나로 돌아간다. 무엇으로 말미암아 하나에 이르는가? 무로 말미암는다. 무로 말미암아 곧 하나이니 하나는 무라고 할 수 있다.>’라고 주석하여 ‘一’은 ‘만물의 근본바탕, 참된 본성’을 의미하고 있다.

원문 滌除玄覽 能無疵乎에서 ‘하상공’은 ‘當洗其心使潔淸也 心居玄冥之處 覽知萬事 故謂之玄覽<마땅히 마음을 씻어 청결하게 한다. 마음이 하늘의 아득한 곳에 머무르면 세상만사를 두루 꿰뚫어 알게 된다. 그러므로 현람(하늘의 도계에서 현묘하게 봄)이라 한다.>’고 주석한다.

또, 왕필도 이 부분을 ‘玄 物之極也 言能滌除邪飾 至於極覽 能不以物介其明疵其神乎 則終與玄同也<‘현’은 만물의 지극함(근본)이다. 삿된 꾸밈을 씻어내고 지극함(즉, 근본)을 봄에 이를 수 있으면 그로써 외물이 밝음에 끼어들어 정신을 병들게 할 수 없으며, 마침내 현묘한 같음(지극한 근본바탕)과 함께 할 수 있다는 말이다.>‘라고 주석한다.

이 부분에서 왕필 및 ‘하상공’은 각각 玄學의 논리나 仙道의 입장으로 해석하고 있으면서도 ‘어둡게 봄(미망)을 닦아내어 능히 마음의 병이 없도록 하는가?’라는 노자의 원의와 달리하고 있는 형태 또한 매우 흡사하다.

원문 天門開闔에서 ‘하상공’은 ‘天門 北極紫微宮 開闔 終始兩際也 治身之天門謂鼻孔 開謂喘息也 闔謂呼吸也<천문은 북극성 인근의 자미궁을 말한다. 개합은 끝과 시작 양쪽의 만남을 말한다. 몸을 다스림에 있어서 천문은 콧구멍을 가리킨다. 연다는 것은 천식을, 닫음은 호흡을 말한다.>’라고 주석하는데, 이는 선도수련의 호흡법에 관한 이야기이다.

원문 能無雌乎는 「하상공장구」에 能爲雌乎로 되어 있고, ‘治身當如雌牝 安靜柔弱 治國應變而不唱也<몸을 다스림에는 마땅히 암컷처럼 안정되고 유약하게 한다. 나라를 다스림에는 변화에 대응할 뿐 나서지 않는다.>’라고 주석한다.

원문 能無爲乎는 「하상공장구」에는 순서를 달리하여 愛民治國의 바로 뒤에 나오는데, ‘治身者呼吸精氣 無令耳聞 治國者佈施惠德 無令下知也<몸을 다스림에는 정기를 호흡하여 (숨소리가) 들림이 없이 하고,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는 은혜와 덕을 베풀어 아랫사람들이 앎이 없게 한다.>’라고 주석하여 선도의 관점으로 풀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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