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혹존或存
도충이용지혹불영 연혜사만물지종
道沖而用之或不盈 淵兮似萬物之宗
도는 길어서 (세상에 늘) 작용하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가득차지 않은 것으로 의심한다. (도는 너무도) 깊어서 만물의 종조와 같다.
[注] 道沖而用之或不盈: 도는 세상에 깊숙이 존재하면서 끊임없이 작용하며 한없이 되돌리길 반복하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도가 가득차지 않은 것으로 의심한다. '沖'은 '(깊고 넓은 천지간의) 공활空豁함이며, 텅 빔 또는 깊음으로 새길 수 있다. 혹자는 이 '沖'을 '허虛(텅 빔)'로 풀이하는 경우가 있는데 도는 근본적으로 텅 빈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변이나 우주공간에 늘 가득하며 항상 우리와 함께하는 존재이다. 도의 '텅 빔'이란 도를 추구하는 수행자의 마음을 일컫는 말이다.(沖: 제4,42,45장)
‘用之’는 ‘(도가) 작용하다’이며(제6장 用之不勤, 제35장 用之不足旣, 제40장 弱者道之用, 제45장 其用不窮 참고), ‘盈’은 본래 사람이 다리를 꼬아 오므리고 욕조에 들어앉아있는 모양의 글자로서 ‘(욕조에) 물이 가득함’을 뜻한다.
우리의 모든 일상에는 누구나 의지하여 살아가는 해와 달의 운행부터 극히 미미한 자연현상까지 도의 작용이 아닌 것이 없다. 그처럼 도는 (누구에게 무엇을) 일부러 위함이 없으나 느긋하고 심오하게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는바 이 세상 어떤 일이든 (도가) 하지 않음이 없고 또 하지 못함이 없는 것이다.<제37장 ‘道常無爲而無不爲’ 참고><제45장 ‘大盈若沖 其用不窮(크게 가득 찬 도는 (너무도) 깊이 있는듯하나 그 작용은 (언제까지고) 다함이 없다.’ 참고>
사람들은 도와 함께, 또 그 속에서 너무나 가까이 생활하고 있으면서도 무언가 부족하여 가득차지 않은 것으로 (도를) 의심하는 것이다.
≪참고: 도의 작용은 심오하고 느긋하여 천하를 운용함에 있어서 바쁘지 않고 차근차근 순리에 따라 때가 되어야 이룬다(제41장 大器晩成). 도는 만사를 느긋하게 진행하여 길게 늘어진 듯하나 한 치도 어김없이 참되게 도모한다. 하늘의 그물은 넓고 성글지만 아무리 은밀한 일도 놓치지 않는다(제73장 繟然而善謀 天網恢恢 疎而不失).
도의 작용은 부지런하지 않으며, 도의 작용은 미약한 듯하다. 도는 담담하여 아무 맛이 없으며, 보아서 완전하게 볼 수 없고 충분히 들을 수도 가질 수도 없다. 도의 작용은 흡족하지도 않다. 도는 인간이 사사로이 도구나 기술처럼 명리를 위해 소유하거나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道는 무한한 섭리에 의하여 스스로 독립적으로 지극히 크고 심원하게 작용한다.(제6장 用之不勤, 제35장 道之出口 淡乎其無味 視之不足見 聽之不足聞 用之不足旣, 제40장 弱者道之用, 제25장 獨立不改 周行而不殆)≫
좌기예 해기분 화기광 동기진 침혜사혹존 오부지수지자 상제지선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湛兮似或存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
(이해와 탐욕의) 날카로움을 꺾으며 그 (다툼의) 분분함을 풀고서 그 (존엄한) 빛남을 (세상과 더불어) 조화하여 풍진을 함께하는데, (그 도는 참으로) 깊어서 (사람들은) 존재하는지 의심한다. 나는 (그것이) 어디서 비롯한 것인지는 모르나 상제上帝(가 있기)보다 먼저이다.
[注]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여기서 그 주체는 성인(곧 임금)이다. 성인은 도의 밝음을 그대로 좇아 이행함으로써 천지자연과 같은 천연함으로 백성과 더불어 그리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제15장 ‘混兮其若濁’ 및 제23장 참조)(제56장 ‘和其光 同其塵’ 참고)(同: 제1,4,23,56장)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 ‘不知誰之子’의 직역은 ‘누구의 아들인지 모른다.’이다. 전체로는 ‘어디서 나왔는지는 모르나 천제天帝(혹은 천신天神, 上帝)가 형상으로 있기보다 (도가) 먼저이다.’가 된다. 여기서 ‘象’은 ‘형상形象’ 혹은 ‘형상으로 드러나 있다’로 새길 수 있다(象: 제4,14,21,35,41장). ‘천제’는 우주만물을 다스리는 절대적인 존재이며, 천제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관에서의 道’를 의미한다(노자는 이와 같은 도를 일컬어 ‘자잘한 도’라고 하였다.).
고대 상商나라(은殷나라의 본명)의 갑골문, 금문 등에서 ‘鬼’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뜻하는데, 이는 원래 상왕조의 선왕이나 왕조가 성립되기 전의 선대 조상을 의미하였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왕해王亥, 왕긍王亘, 상갑미上甲微 등을 ‘제帝’라 하였으며 특히 시조인 설契은 ‘상제上帝’라 하였다.
상이 멸망하고 주周왕조가 들어서면서 ‘上帝’는 ‘天帝’ 또는 ‘天神’의 개념으로 바뀐다. 당시의 ‘상제上帝나 천제天帝는 우주만물을 다스리는 절대적인 존재이며, 우주만물의 神 중에서도 최고신이다.
吾: ‘吾’는 옥편에 ‘나 오’, ‘그대 오’, ‘글 읽는 소리 오’ 등으로 나와 있고, 『설문해자』에 ‘吾’는 ‘口(구)’+‘五(오)’로 된 글자로서 ‘口’는 뜻을, ‘五’는 소리를 나타낸다고 하며 ‘我(나)를 스스로 칭함이다’라고 하였다.
한편, 갑골문ㆍ금문에서 ‘吾’는 ‘口(신에 대한 축고祝告의 용기)’ 위에 ‘五(하늘에서 내려오는 신의 기운 혹은 신의 모습)’를 올려놓은 모양이다. 이는 ‘신의 뜻을 맞아 받들고 있는 상황’으로서, 그로부터 ‘(상대방에 대하여) 삼가는 나’로 인신引伸 혹은 가차假借된 것이라 이해된다.(『한자의 세계(시라카와 시즈카)』 참고)
실제로 ‘吾’는 대외적으로 자신을 삼가면서 상대방을 존대하는 의미의 ‘나’로 쓰이고 있음을 현존하는 고전의 다양한 구절에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으며, 현재의 우리말에도 우리 집, 우리 아버지, 우리 선생님 등으로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자신을 삼가는 흔적이 남아있다.(『장자』 ‘인간세’ 편 제3-1절 ‘吾國ㆍ吾身’ 참고)
그처럼 ‘吾’는 자기를 낮추면서 상대방을 대접하여 ‘나’를 칭하는 것이 본래의 쓰임인데, 가족이나 특정 집단 등 몇 명의 무리를 대표하여 대외적으로 ‘나’를 칭할 때는 ‘우리’가 된다.
한편, 대화상대자를 우호적으로 대접하는 의미에서 ‘나’와 함께 ‘우리(吾)’라 칭하며 ‘나’라는 1인칭을 대신하거나, 혹은 그런 식으로 대화상대자를 예우하여 ‘그대(You)’의 2인칭을 대신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용례를 제49장 및 제74장에서 볼 수 있다.
『노자』에서 ‘나 여(余, 予)’ 혹은 ‘너 여(汝)’가 사용되지 않은 것은 ‘노자’의 대화상대가 ‘왕’이므로 노자 스스로 자신을 대단히 삼가고 절제하는 입장 때문이다.(吾: 제4,13,16,21,25,29,37,42,43,49,54,57,69,70,74장)
≪참고: ‘아我’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자신’의 정신적 내면을 구성하는 ‘자아自我의 정체’로서 ‘나’를 말한다<『설문해자』중 ‘我, 施身自謂也(‘我’는 시행하는 몸을 스스로 일컬음이다.)’ 및 갑골문ㆍ금문의 ‘我(‘我’는 제사에 희생으로 쓰이는 양을 손질하는 톱니모양의 절단도구의 형태이며, 지금의 ‘我’는 그로부터 가차假借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
이에 대해 ‘기己’는 외형적인 형태로 타인과 구별되는 ‘나’로서 ‘자기’ 혹은 ‘그’가 된다. 또 ‘자自’는 코로 숨을 쉬며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생활의 주체로서 ‘자신’이며 몸의 생리적 작용으로서 의미가 강하다. ‘신身’은 몸을 펴고 구부리며 물리적으로 작용하는 ‘자신’으로서 신체의 물리적인 기능과 관련이 있다.(『설문해자 주(단옥재)』 참고)
한편, ‘子’는 상商왕조의 무정武丁 때 아我ㆍ여余 등과 함께 왕자의 호칭으로 사용되었던 글자이다. 갑골문에서 ‘子’는 신을 대신하여 제사를 받는 사람(후대의 시동尸童)의 정면모습을 본뜬 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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