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무위無爲
천하개지미지위미사악이 개지선지위선사불선이
天下皆知美之爲美斯惡已 皆知善之爲善斯不善已
천하가 다 아는 아름다움이 꾸며진 아름다움(가식)이라면 이미 나쁜 것이고, 천하가 다 아는 참됨이 꾸며진 참이라면 이는 이미 참됨이 아니다.
- 善: 고대 문자인 금문金文에서 ‘善’은 양을 제물로 하여 하늘에 맹세하며 참되게 고한다는 의미의 글자로서 ‘(하늘에) 참되게 아뢰다.’는 뜻을 가진다(『설문해자 주(단옥재)』 및 『한자의 세계(시라카와 시즈카)』 참고).
이후 ‘善’은 인품과 학식을 갖춘 착한 사람을 나타내는 말로 쓰이면서 ‘유능한, 능통한, ~잘’ 등의 의미로 변하게 되고, 최근에는 ‘어리석은 착함’의 이미지가 더해지면서 ‘무능한’ 뉘앙스를 띠기도 한다.
‘善’은 본래 자기 스스로에 대한 생각이나 행실, 성정性情 등을 (하늘에 맹세코) 꾸밈없는 그대로 드러내는 참됨이다. ‘眞’은 사물의 실질이나 대상이 되는 사물과 관련한 사람의 천연한 참됨이며, 지극한 것으로는 어린아이의 천진天眞함이 있다.(제21장 ‘其精甚眞’ 참고). ‘忠’은 (상대방에 대하여) 마음으로부터 정성을 다하는 참됨이다.
(善: 2,8,15,20,27,30,41,49,50,54,58,62,65,66,68,73,79,81장)(제20장 善ㆍ惡 및 제15장 善爲士, 제27장 善人ㆍ不善人, 제62장 善人ㆍ不善人ㆍ不善 참조)
- 爲美: ‘爲美’는 ‘각별히 위한 미’로서 곧 ‘일부러 꾸민 미’가 되는데, 이는 특정 목적을 가지고 본래의 실체를 가리기 위한 포장이므로 사악邪惡한 것이다. 즉, 화려한 장식이나 성대한 의식, 거창한 조형 등은 권위와 야망을 위해 본래의 실질보다 보기에 좋도록 꾸미는 ‘爲美’로서 천지자연의 천연한 질서에는 근본적으로 해롭다는 것이다.
백성의 일상생활에서의 멋이나 예술적 아름다움도 엄밀히 말하면 천연한 그대로의 상태를 인위적으로 변형하는 것이므로 ‘위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으나 여기서 말하는 ‘위미’는 왕의 권위와 욕망에 대한 허례와 사치를 뜻한다.
임금이 그러한 것을 지양함으로써 신하들이 검소하며 진솔하게 되고, 백성들은 소박하고 검소한 가운데 맛나게 먹고 멋스럽게 입으며 풍속을 즐기면서 천하가 다함께 더불어 자유롭고 즐겁게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爲善: ‘爲善’은 ‘일부러 꾸민 선’으로 자연그대로의 참됨이 아닌 ‘참되지 못함(不善)’이다. 이 또한 천하의 참된 질서에 지극히 해로운 것이다.]
고유무상생 난이상성 장단상교 고하상경 음성상화 전후상수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그렇게 (세상은) 있음과 없음이 서로 상생하고, 어려움과 쉬움이 서로 함께 이루며, (지혜의) 길고 짧음을 서로 비교하고, (지위의) 높고 낮음이 서로 (저울질하며) 기운다. (정책을 알리는) 음악소리와 (백성의) 목소리가 서로 화응하며, (임금과 백성 등) 앞과 뒤는 서로 (욕구를 좇으며) 따른다.
- 有無相生: (무엇을) 가짐과 가지지 않음이 서로 보완하여 살아간다. 즉, 세상물정은 암수의 생리작용이나 음양의 조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서로 보완관계로 상생한다.
- 難易相成: (세상은) 어렵고 쉬움이 서로 함께 이룬다. 세상일은 어려움이 지나면 편이함이 되고 편이함은 곧 곤란함이 되며, 또 내가 편하면 남이 어렵고 남이 편하면 내가 어렵게 되는 등 어려움과 쉬움이 맞물려 서로 함께 이루며 돌아가는 것이다.
- 長短相較: (학식과 지혜의) 길고 짧음을 서로 비교한다. 세상은 저마다 지혜를 드러내어 과시하고 그것을 서로견주며 다투어 살아간다.
- 高下相傾: (지위의) 높고 낮음이 서로 (저울질하며) 기운다. 황보밀皇甫謐(215년-282년)이 지은 『고사전高士傳』에는 이와 비슷한 의미로 ‘馳世之士咸以權勢相傾(이리저리 내달리며 유세하는 선비들은 모두 권세를 저울질하며 서로 기운다.)’이라는 구절이 있다.
- 音聲相和: 음악소리와 목소리가 서로 화응한다. 과거 주나라에서 나라의 중요정책을 시행함에 종루의 크고 작은 종을 공개적으로 연주하여 정책을 알리면, 백성들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따랐음을 말한다.
음音ㆍ성聲, 『설문해자』에서 ‘音’은 팔음(金ㆍ石ㆍ絲ㆍ竹ㆍ匏ㆍ革ㆍ土ㆍ木)을 말하고 ‘聲’은 오성(궁ㆍ상ㆍ각ㆍ치ㆍ우)이라 하는데, 갑골문ㆍ금문 등에서 ‘音’은 축고祝告에 대한 신의 응답(계시)을 의미하는 글자로서 자연에서 나는 만물 각자의 고유한 소리를 말한다. 그러다가 나중에 ‘聲’에 일정한 가락을 더하여 그것을 ‘音’이라 하였다.
‘聲’은 본래 타악기를 치는 소리를 의미하는 글자로서 악기나 짐승ㆍ사람 등에 의해 발생하는 물리적 모든 소리를 뜻하는데, 대개는 사람이 내는 소리를 말한다.
언言ㆍ어語, 『설문해자』에는 “직언直言을 ‘言’이라 하고, 논란論難을 ‘語’라 한다.”라고 하였다. 갑골문ㆍ금문에서 ‘言’은 하늘(천제天帝)에 축고祝告하여 서약함으로써 자기의 진실을 밝힌다는 의미의 글자이고, ‘語’는 상대방에게 논설로써 자기의 참뜻을 밝힌다는 의미이다.(『설문해자』 및 『한자의 세계(시라카와 시즈카)』 참고)
실제 용례에서 ‘言’은 ‘(자기의 의중意中을 참되게) 말하다.’ 정도의 어감으로 쓰이고, ‘語’는 ‘(상대에게 자기의 의견을 논리적으로) 말하다,’는 의미로서 ‘이야기하다’ 또는 ‘말씀’으로 새길 수 있다.
- 前後相隨: 앞과 뒤는 서로 (욕구를 좇으며) 따른다. 즉, 앞에서 이끄는 지도자와 그 뒤를 따르는 백성(신하)들은 부귀공명의 욕구를 위해 서로 부추기고 또 따른다.
이상에서는 꾸며진 美와 꾸며진 善으로 된 여러 상대적 요소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세상물정의 다양한 실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시이성인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만물작언이불사 생이불유 위이불시 공
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
성이불거 부유불거 시이불거
成而弗居 夫唯弗居 是以不去
이러한바 성인은 무위로 대처하여 일을 보고, 말없이 행동으로 가르치며, 만물이 (다양하게) 일어나도 (그것을 자기의 공으로) 치사致辭하지 않는다. (만물이) 살아감에 (스스로)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위하여 (그에) 의지하지 않으며, 공을 이루어도 (거기에) 있지 않는다. 오직 (그 공에) 머물지 않으므로 이로써 (공이) 떠나지 않는다.
- 爲ㆍ無爲: ‘爲’의 사전적 의미는 할 위, 위할 위, 지을 위, 될 위, 써 이, 어조사 위 등으로 나온다. 여기서 ‘爲’는 ‘爲美’, ‘爲善’에서 보듯이 기본적으로 ‘의도적 꾸밈’이 전제된다. 즉, 자기의 행위를 아름답게 포장하거나 짐짓 참되게 취하는 ‘人爲’를 의미하며, ‘일부러 각별히 위함’을 의미한다.
무릇 남을 위한다는 것은 결국 그것이 재물이나 명예, 충성심 등으로 나에게 되돌아올 것을 기대하는 심리가 그 바탕에 깔려있는바 결국 ‘위해주어 부추기고자 함’이다. 그러나 성인은 천지자연을 본받아서 불인不仁하므로 사람을 위하되 無爲로 위한다.(제81장 참고)
‘無爲’는 한마디로 ‘천연한 그대로의 자연스러움’을 뜻한다. (왕이) 스스로 자신을 철저히 경계함으로써 天然한 본성으로 만물을 긍정하고 용납하되, (백성에게는) 말없이 모범이 되면서 일부러 위함이 없음을 말한다. 또, 스스로 공명과 재물을 쌓아두지 않음으로써 이미 백성에게 그것을 나누어주는 것이 되고, 신하들은 그것을 본받음으로써 결국 백성을 위하는 것인바 그것이 곧 無爲로 위하는 것이 된다.(제3장 爲無爲 참고)
성인은 부추김이 없이 은미하게 무위로 위하므로 세상은 서로가 사사로이 名利를 다투지 않는다.(無爲: 제2,3,43,57,63장)
≪참고: 『장자』에서는 ‘爲’를 ‘仁義를 행함’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노자』에서는 그러한 표현을 삼가는 것이, 비록 ‘爲’가 그러한 의미라 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사상이나 정책상의 견해를 논하는 일이 아닌 타인(특히 유가)에 대한 폄훼의 의도라면 굳이 거론하지 않는 것이 타인에 대한 배려와 ‘不爭之德’에 걸맞은 행동이기 때문이다.≫
-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무위로 처신하여 일을 보고 말없는 행동으로 가르침이 된다. 여기서 ‘無爲’는 인위적으로 위함이 없음이다. 즉, 나랏일에 사사로움이 없이 천연한 마음으로 처신하되 백성에게는 다만 그렇게 모범이 될 뿐 아무런 말이나 간섭이 없다.(제43장 ‘不言之敎 無爲之益’ 및 제58장 ‘光而不燿’ 참고)
- 萬物作焉而不辭: (도를 그대로 좇는 성인의 덕은) 만물이 (다양하게) 일어나도 (그것을 자기의 공으로) 치사致辭하지 않는다. ‘辭’는 본래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호소하는 축문으로서의 말이다.
이 부분은 제34장의 ‘萬物恃之而生而不辭’와 의미가 유사한데, 다만 여기서는 그 주체가 ‘(道를 그대로 따르는) 성인’이나 제34장에서는 ‘道’를 그대로 좇아 따르는 덕이 주체라는 차이가 있다.(萬物: 제1,2,4,5,8,16,32,34,37, 39,40,42,51,62,64,76장)(作: 제2,16,37,55,63장)
- 生而不有: (만물이) 살아감에 있어서 (성인은 스스로)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노자』에서는 ‘不有’가 여러 번 나오는데, 이는 대체로 ‘(자신의) 존재를 내세우지 않는다.’ 혹은 ‘존재를 내세워 (만물을) 지배코자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쓰인다.(生而不有: 제2,10,51장)
- 爲而不恃: 위하되 그에 의지하여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즉, 사사로움이 없이 천연한 그대로 위하므로 그 대가를 부추김이 없다.(爲而不恃: 제2,10, 51,77장)
- 功成而弗居 夫唯弗居 是以不去: ‘去’의 자의는 ‘갈 거, 떨어질 거, 버릴 거, 쫓을 거’이며, 여기서는 ‘(공이) 없어지다’가 된다. ‘功’은 천하를 자연의 섭리처럼 평화롭게 안정시킨 치세의 업적이다. 공을 이루어도 그 공에 연연하지 않으므로 정연整然한 덕의 치세가 길게 이어지는 것이다.(제33장 ‘死而不亡者壽’ 참고)
‘弗’과 ‘不’은 의미가 비슷해 보이나 실제로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弗’에는 의지나 노력이 작용하는 한편, ‘不’은 의지 혹은 노력과 관계없이 어떤 느낌이나 일의 상태를 나타낸다.
『설문해자 주(단옥재)』에서 “‘弗’은 발음에 있어서 어기語氣가 무겁고, ‘不’은 가볍다.”라고 설명하며, 『예기禮記』 ‘학기學記’편에서는 ‘雖有嘉肴弗食不知其旨也 雖有至道弗學不知其善也(비록 좋은 안주가 있더라도 먹어보기 않으면 그 맛을 알지 못하고, 비록 지극한 도가 있다 해도 그것을 배우지 않으면 그 참됨을 알지 못한다.)’라는 예를 들어 설명한다.]
[章注] 덕은 (만물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며, 세상을 평화로운 질서로 다스려도 다만 그저 천연한 그대로 있을 뿐이다.
원문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는 「하상공장구」에 有無相生 難易之相成 長短之相形 高下之相傾 音聲之相和 前後相隨로 되어있고, ‘見有而爲無也 見難而爲易也 見短而爲長也 見高而爲下也 上唱下必和也 上行下必隨也<(남에게 욕심이) 있음을 보고 (스스로) 없도록 행한다. 어려움을 보고 쉬움을 행한다. (지혜의) 짧음을 보고 긺을 행한다. 높음을 보고 (기꺼이) 낮음이 된다. 위에서 노래하면 아래에서 반드시 화응한다. 위에서 행하면 아래에서 반드시 따른다.>’로 주석한다. 여기서 ‘군주의 다스림에 백성이 기꺼이 호응한다.’는 식의 표현은 중앙집권적 통치명분과 관련한 의도로 보인다.
한편, 「하상공장구(이하부터 ‘하상공’)」는 원문 生而不有에 대하여 ‘元氣生萬物而不有<원기는 만물을 생성하지만 스스로 드러나지 않는다.>’라고 주석한다. 이때의 ‘元氣’는 仙道의 개념으로서 元神으로부터 나오는 ‘太和의 精氣’를 말하는데, ‘元神’은 선도에서 ‘도의 본체’, 즉 ‘도, 그 자체의 존재’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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