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도덕경(1장~10장)

노자 도덕경 제1장

나무와 까치 2013. 3. 26. 09:58

 

 

 
[일러두기]
 
1. 底本: 『정통도장正統道藏』의 『왕필주도덕진경王弼注道德眞經』 및 『도덕진경주道德眞經注(하상공장구河上公章句)』
 
2. 의역으로 인한 원문의 본래의도가 훼손됨을 방지하고자 원문의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온전히 직역으로 해석하였다. 가능한 한 원문을 자의 그대로 직역하였는바 그 때문에 문장의 유려함이 어느 정도 제한됨도 감수하였다.
 
3. 생략된 글자나 말과 생각 그리고 전후 문맥상의 숨은 의미 등은 ( )안에 표시하고 그것으로 부족한 부분은 주석注釋으로 보충하였다.
 
4. 본서에서 별도로 언급하지 않은 부분은 원문의 자의를 글자그대로 해석하거나 기존의 통설通說을 따랐으며, 드물지만 원문의 자의가 사전이나 옥편, 기존의 주석 등 통설과 다르게 풀이된 것은 별도로 언급하여 표시하였다.
 
5. 『노자』의 양대 주석서인 『하상공주 노자』 및 『왕필주 노자』를 각각 해석하여 비교분석하였고, 그 중 『노자』의 원의原義와 서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별도로 각 장의 말미에 ‘章注’를 두어 설명하였다.
 

 

 

 

 

제1장. 명名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도는 도이되 (그것이 다) 늘 한결같은 도가 아닌 것은 이름은 이름이되 (그것이 다) 늘 한결같은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곧,) 이름이 없음이 천지의 시작이고, 이름이 있음은 만물의 어미인 것이다.

 

-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를 도라 하되 (그것이) 늘 한결같은 (참된) 도가 아닌 것은 이름을 이름이라 하되 (그것이) 늘 한결같은 (본래 그대로의)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의 여러 도를 도라고는 하나 그것이 늘 한결같은 참된 도가 아닌 것이, 그것은 ‘이름’이라는 상대적 관념으로 사물을 인식하고 분별하기 때문이다. 이 구절의 주어는 ‘道’이되 취지의 핵심은 ‘名’인 것이다.

즉, (예전부터) 지금껏 있어온 이념이나 법식 등 모든 지식과 제도(곧, 기존의 도)를 전해져오는 명분과 형식으로 답습하며 그 ‘이름’으로써 사물을 인식하고 분별한다는 것은 『노자』의 ‘道의 밝은 이치’를 통찰함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노자는 당시의 그러한 도에 대하여 여러 차례 언급을 하고 있는데, 제70장에서는 “나의 말은 매우 알기 쉽고 매우 행하기 쉬운데, 천하가 알지 못하고 행하지도 못한다. (내가 도의) 근본을 가지고 말하며 임금을 모시어 일을 받드는데, 천하의 누구도 (그 뜻을) 앎이 없다. 이는 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吾言甚易知 甚易行 天下莫能知 莫能行 言有宗 事有君 夫唯無知 是以不我知)”라고 하며 작금의 상황을 단편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제4장에서는 ‘象帝之先’이라 하여 (노자의 道는) 천제天帝가 있기 이전에 이미 있었던 것이라 하는데, 여기서 ‘천제’는 ‘천제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관’ 혹은 ‘천제의 道’를 의미하고 있다. 제60장에서는 ‘鬼’와 ‘신神(곧, 사람의 대표로서 성인)’은 모두 도와 덕의 운행이치를 따르는 천지자연의 한 현상일 뿐이라고 한다(夫兩不相傷 故德交歸焉).

제1장 및 제67장에서는 “(세상의 여러) 도를 도라고 하지만 (그것이) 늘 한결같은 (참된)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나의 도는 다른 자잘한 도와 다르다(似不肖 若肖久矣 其細也夫).”라고 말한다.

『노자』의 첫머리서부터 ‘道可道 非常道’라 하면서 ‘도’라는 말로써 ‘도’를 이야기하므로 흔히들 여기에 도의 심오한 뜻이 들어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 구절은 ‘道可道 非常道’와 ‘名可名 非常名’ 두 구절을 서로 대구對句시켜 뒤의 ‘名可名 非常名’이 앞의 ‘道可道 非常道’의 의미를 보완하는, 그저 평범한 문장이다.

“세상에서 도라 부른다고 그것이 다 도가 아닌 것인바 진정 도를 알고자 한다면 문리文理적 사변이나 형이상학적 추론 등 상대적 분별로 그 이치를 구할 것이 아니라 물아일체의 입장에서 도의 천연한 근본을 통찰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설명을 이어간다.

“(분별하여) 이름('이르다'의 명사형)이 없음이 천지의 시작이고 (분별하여) 이름이 있음은 만물의 어미가 된다. 늘 무엇을 탐구貪求하고자함이 없음으로써 그 오묘한 실질(묘)을 보고, 늘 그 무엇을 하고자함이 있으므로 사물의 외변(요)만을 관찰하게 된다.

(사물의 오묘한 실질과 사물의 외변) 이 둘은 (본래) 같은 것에서 나왔는데, (나와서는) 달리 이름이 붙여진다. 같은 그것은 말하자면 가마득하다. 아득하고 가마득하여 온갖 오묘함의 문이다.”

 

- 道可道 非常道: (세상의 여러) 도를 도라고 하지만 (그것이) 늘 한결같은 (참된) 도가 아니다. 여기서 ‘常’은 ‘常自然’을 의미한다. 여기의 ‘常’은 제16장 및 제55장의 ‘知常曰明’의 ‘常’을 일컫는 것으로, ‘知常曰明(상을 아는 것을 밝음이라 한다)’의 ‘明’은 결국 ‘우주대자연의 섭리 같은, 상자연한 도의 밝음’을 일컫는 것이다(제16장 復命曰常 知常曰明 맟 제55장 知和曰常 知常曰明, 제25장 道法自然 참고).

노자는 이러한 도를 ‘天之道’ 또는 大道’라고 일컫는데, 이는 이미 세상에 만연한 소위 ‘자잘한 도’인 상제나 천제, 천신, 신선 등에 의한 도와 구분 짓는 의미이다.(大道: 제18,34,53장)(天之道: 제9,47,73,77,79,81장)

즉, 세상에서 일컫는 도가 여러 가지 있으되 지금 말하는 나의 도는 여느 자잘한 그런 도와는 다른 것이라 말한다. 노자는 우주대자연의 천연한 그대로를 사실적인 시각으로 관찰하고 기술하는 자연과학적 방식으로 도와 덕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의 빔을 지극하게 하고 성정을 고요히 함으로써 노자는 스스로 참된 본성을 닦아 사물의 근본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였고, 그 물아일체의 바탕에서 한 치도 어김이 없는 무한한 섭리로 도도히 운행하는 우주대자연의 어떤 유기적인 실체를 통찰하였던바, 이것이 곧 ‘도道(의 존재)’이다.

예로부터 학자들은 ‘道可道 非常道’라는 이 구절에 필요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며 ‘도는 한없이 크고 심원하며 볼 수도 들을 수도 잡을 수도 없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이므로 도를 말로 표현하면 이미 참된 도가 아니다. 도란 너무나 원대하고 오묘하여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로 해석해왔다. 거기에는 『장자』(‘제물론’편 제1-20절 ‘大道不稱)나 『하상공장구 노자』, 『왕필주 노자』 등의 영향이 컸다.

만약 이 부분을 ‘도를 말로 표현하면 이미 참된 도가 아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노자는 지금 스스로 그러한 도를 말하고 있으므로 이미 자가당착의 모순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참고: 주나라가 창업될 당시는 귀와 신(당시 귀신은 곧, 천제나 천신과 동의어)이 우주를 지배하는 세계였던바 천하를 지배하는 지도자는 그러한 신과 직접 교통하는 왕王이나 그 이하 제후들이었다. 이후 서주시대에서 동주시대로 변전되면서 하늘의 아들인 왕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지고, 신성한 권위가 무색해진 기존의 그 자리는 신선神仙이나 잡귀신 등이 대신하며 현실에서 실력을 발휘하게 된다.

노자가 활동하던 춘추시대 말기는 가히 말세라 할 정도로 천제(천신)와 천자를 중심으로 한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면서 바야흐로 혹세무민하는 제자 학파나 미신 등이 급속히 횡행하던 시기였다. 당시에도 이미 ‘도’라는 것이 성행하고 있었다.

다만 그 도라는 것은 여전히 그러한 귀신이나 천제, 천신, 신선 등이 주재하는 전통적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한 채 혼융되어 그 연장선상에 있거나 그로부터 파생한 것으로서 다분히 신비롭고 주관적인 모습의 소위 ‘신선도神仙道’였으며, ‘각자 저마다의 도’였던 것이다.≫

 

- 名可名 非常名: 이름은 이름이되 (그것이) 늘 한결같은 (본래의 실체로서) 이름이 아닌 것이다.

‘名’의 옥편 자의는 ‘이름ㆍ명분ㆍ이르다’ 등이며, ‘사물의 정상을 분별하여 이른다(名하다)’는 것을 뜻한다. 고대 문자인 금문金文에서 ‘名’은 아이가 태어나면 조상의 영靈에게 제사고기를 올려놓고 축문을 아뢰어 이름을 지어 붙이는 씨족의 가입의례를 뜻하는 문자이다.(『한자의 세계(시라카와 시즈카)』 참고)

사물은 말로 이름으로써 상대적으로 개념화되고 문자에 의하여 정형화된다. 천지만물은 본래 분별하여 이름(‘이르다’의 명사형)이 없는 ‘無’로 된 하나의 뒤섞인 덩어리였다. 그처럼 하나의 근본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어떤 실체를 (사람이) 상대적 관념으로 인식하고 분별함으로써 차이가 생기게 되고, 그에 따라 이름이 붙여짐으로써 만물의 구분이 생겨나는 것이다. 어떤 객체에 이름을 붙여 이른다는 것은 사물의 정상을 상대적 관점으로 인식하고 이를 개념화하여 규정하는 행위이다.

여러 사람에 의해 다양한 관점에서 인식되는 ‘이름’은 각자 주관적 관점에서 상대적으로 객체를 받아들임으로써 피아를 구분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이르는 ‘이름’으로써 규정된 대상은 그 사물의 한결같은 본래의 모습 그대로일 수가 없다. 결국, 영원히 변하지 않는 이름(名)은 무한히 크고 심원한 도의 근본바탕으로서 ‘無’ 뿐이다.(名: 제1,14,21,25,32,34,37,41,44,47장)

한편, 『노자』의 시작인 제1장에서 그 핵심어로 ‘名(이름)’을 거론한 뜻은, (예로부터) 지금껏 있어온 이념이나 의식, 법령 등을 전해져 내려오는 명분과 형식으로 답습하며 그 ‘이름’으로써 인식하고 분별한다는 것은 ‘大道’의 밝은 이치를 통찰함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제32장 始制有名 名亦旣有 夫亦將知止 참고)

이러한 이유로 ‘名可名 非常名’이라는 문구를 ‘道可道 非常道(도는 도이되 그것이 늘 한결같은 참된 도가 아니다. 즉, 세상의 여러 도를 도라고 하나 그것이 늘 한결같은 참된 도가 아닌 것이, 지금 말하는 나의 도는 여느 자잘한 그런 도와는 다른 것이다.)의 대구로서 잇고 있는 것이다.

여기의 제1장은 「도경」에서 서론 부분의 첫 장이고 제32장은 결론 부분의 첫 장이 되는데, 이처럼 노자가 서론의 첫 장과 결론의 첫 장에서 ‘이름(名)’을 동시에 거론한 뜻은 그만큼 그것이 도의 실질에 접근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 無名天地之始: (무엇을) 이름이 없음, 그것이 천지의 시작이다. 여기서 ‘名’은 이름, 즉 ‘이르다’의 명사형이며, ‘無’는 ‘없다’는 의미의 단순한 서술어이다. ‘無名’은 ‘아무것도 (분별하여) 이름이 없음’이다. 이는 곧 어떤 객체에 대하여 구분하고 분별하여 규정하는(名) 바가 없는 천연한 그대로의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의식 상태를 의미한다.(제37장 ‘無名之樸’ 참고)

‘天地之始’는 천지의 시작, 곧 이 세상의 시작이다. 태초에 하늘과 땅이 처음 시작할 그 때에는 만물의 정상을 구분하고 분별하여 규정함(名)이 없는 천연한 그대로의 세상이었다. 도는 하늘과 땅 그 이전의 존재로서, 하늘과 땅과 만물을 생성하여 그것을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섭리로 운영하는 어떤 존재이다.

 

- 有名萬物之母: (무엇을 규정하여) 이름이 있음은 만물의 어미이다. 여기서 ‘有名’은 ‘무엇을 분별하여 구분하고 규정하여 이르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분별하여 규정함이 없던 ‘無名天地之始’의 상태에서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시각으로 사물을 인식하고 규정하여 이름으로써 처음에는 하나의 덩어리였던 세상이 수많은 객체로 분별되어 나타나는 것을 ‘有名萬物之母’라고 하였다.(母: 제1,20,25,52,59장)

 

 

고상무욕이관기묘 상유욕이관기요 차양자동출이이명 동위지현 현지우현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此兩者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중묘지문

衆妙之門

그 때문에 늘 (무엇을 구)하고자함이 없음으로써 그 (근본의) 오묘함을 보고, 늘 (그 무엇을 구)하고자함이 있으므로 그 요(외변)를 보는 것이다. 이 둘은 같은 것이되 나와서 이름을 달리한다. 같은 그것(동, 근본바탕)은 말하자면 가마득하다. 컴컴하고 아득하여 온갖 오묘함(妙)의 문이다.

 

- 常無欲以觀其妙: 늘 (무엇을 탐구貪求)하고자함이 없음으로써 그 오묘한 것(妙)을 본다. 무엇에 집착하거나 (사사로운 욕심으로) 무엇을 하고자함이 없음으로써 (천연한 정신으로) 물아일체의 상태가 되어 오묘한 그 무엇(妙)을 보게 된다. 여기서 ‘妙’는 ‘경이롭고 오묘함’이며, 결국 만물이 함께 하나로 존재하는 근본바탕으로서 ‘無’를 의미한다.

 

- 常有欲以觀其徼: 늘 (그 무엇을 탐구貪求)하고자함이 있으므로 사물의 외변(요)을 관찰하게 된다. 여기서 ‘徼’는 사물의 근본실질이 아닌 그 외변이다. 사람이 끊임없이 무엇을 탐구하고 집착하게 되면 의식은 늘 외물에 가있게 되고, 그처럼 주관적 의지가 개입된 상대적 관점으로는 욕구에 따른 외변만을 관찰하여 인식할 뿐 만물의 근본바탕을 천연한 그대로 통찰할 수는 없다.

 

- 無欲ㆍ有欲: ‘欲’은 자의가 ‘하고자할 욕’으로, 뭔가를 탐색하여 구하고자 하는 ‘욕구欲求’ 또는 ‘탐구貪求’이다. ‘欲(욕구)’과 ‘慾(욕심)’에 있어서 ‘欲’은 ‘慾’보다 막연한 본능에 가까운 의미이고, ‘慾’은 보다 구체적인 심리가 작용한다. 『노자』에서 ‘欲’은 대부분 ‘부귀공명富貴功名의 욕구’를 의미한다.(無欲: 제1,3,57장)(不欲: 제64장)

 

- 此兩者同出而異名: 이 둘은 (한 곳에서) 같이 나왔으되 달리 이름이 붙여진다. 즉, 이 둘은 같은 것으로부터 함께 나와 이름을 달리한다.

여기서 ‘兩者’는 ‘妙(오묘한 근본실질)’와 ‘徼(외변)’를 말하는데, 결국 그 둘은 같은 것에서 함께 나와 이름을 달리하는바 ‘같은 근본의 다른 사물’인 것이다.

결국, 妙ㆍ始ㆍ無欲은 사물의 근본을 뜻하고, 徼ㆍ母ㆍ有欲은 有로 드러난 말단을 의미한다. 한편, 왕필은 ‘兩者’를 ‘始’와 ‘母’로, 하상공은 ‘無欲’과 ‘有欲’으로 주석한다.

 

-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같음’은 말하자면 가마득하다. 컴컴하고 아득하여 수많은 오묘함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여기의 ‘같은 그것(同)’은 근본바탕으로서 ‘無’를 가리키는데, 제14장에서 ‘無’는 ‘道’의 근본바탕이다.

노자는 ‘도의 본질’로서 ‘無’에 대한 설명을 뒤의 제14장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우선 ‘同(같음)’이라 해두고 있는 것이다(제56장 ‘玄同’ 비교참조).

한편, 제27장의 ‘요묘要妙’는 여기 ‘衆妙’의 하나이다.(同: 제1,4,23,56장)(妙: 1,15,27장)(제14,16,21,25,37장 참조)

 

- 玄: ‘玄’의 자전적 의미는 ‘검다’, ‘컴컴하다’, ‘아득하다’ 등이다. 여기서 ‘玄’은 ‘(천지가 있기 전) 태고의 아득함’이며, ‘도의 심원하고 원대한 가마득함’이다. 일반적으로 다양한 색채의 사물도 아주 멀리에서 보면 어둡고 검게 보이는 것처럼 ‘현’은 아득하고 가마득한 정도를 나타내는 단순한 형용사이다.

『장자』 ‘천지’편 등에 아득한 태고를 뜻하는 ‘현고玄古’라는 용례가 보이며, 오늘날에도 손자의 손자로 먼 후손을 뜻하는 ‘현손玄孫’이란 말을 사용한다.(玄: 제1,6,10,15,51,56,65장)

 

- ‘者’는 옥편에 ‘어조사 자, 놈 자, 것 자, 이 자’ 등으로 나와 있는데, 『노자』에서는 주로 ‘~은(는)’, ‘~면’, ‘~것’ 등의 의미로 쓰인다.

‘者’는 본래 ‘가리어 숨기다’ 혹은 ‘덮다’라는 의미의 글자로서 사람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者’는 고대 금문金文에서 ‘왈曰(신에게 축원하는 말인 축고祝告의 문서를 넣어둔 용기)’ 위에 ‘(어떤 것을 가리어 숨기는) 무성한 수풀’의 모양을 더한 글자이다.

고대에는 이족의 신이나 악귀 등에 대하여 저주詛呪나 주술呪術을 행하는 일들이 상당히 보편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者’는 그렇게 주술을 행한 축문을 나무로 무성하게 울타리를 둘러 숨긴다는 의미의 글자이다. 그로부터 대상을 저주한 그 축고의 문서, 즉 ‘가리어 숨겨둔 어떤 것’을 의미하게 되었던바 그것이 ‘者’의 본래 의미이다.(『한자의 세계(시라카와 시즈카)』 참고)

저주나 주술의 대상은 이족(적)의 장수나 우두머리가 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사람을 지칭하는 의미로도 쓰이게 되나, 그런 경우 ‘사악한 적’ 또는 ‘이족 포로’, ‘노예’ 정도의 뜻이 된다. 그 옛날에 ‘민民(백성)’은 정벌하여 복속시킨 ‘이족의 사람’을 의미했다. 처음에 ‘민’은 종속관계의 하등신분이었다가 사회의 규모가 커지고 씨족의 질서가 대중화되면서 점차 평민화한 것이다.

『노자』에서 ‘者’가 사람을 가리키는 용례는 어떤 형태로든지 제74장 이외에는 없으며, 제74장에서도 비록 사람에 대한 지칭으로 쓰이긴 하였으나 이를 비인격적인 상황으로 비유하여 표현하고 있다.

(者: 제1,3,7,15,22,23,24,27,29,30,31,33,61,68,70,74장)(제27,33장 人ㆍ者 및 제68장 士ㆍ者는 한 문장에서 같이 사용됨)(제1,61,73장 兩者 및 제60장 兩 참조)

 

 

[章注] 제1장에서 노자는 참된 도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상대적 관점에서 사물을 인식하고 이를 개념화한 ‘이름(名)’에 의한 분별에서 벗어나 물아일체의 입장에서 우주대자연의 천연한 그대로를 통찰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일이라고 말한다.]

 

하상공장구 노자」 및 「왕필주 노자」 비교(제1장)

1. 『하상공장구河上公章句 노자』(영송본影宋本)

第一章 體道(도의 체득, 즉 도를 체득하는 요체)

 

道可道 (세상의 경영술과 정사의 가르침에 대한) 도를 도라고 하나

謂經術政教之道也

(道라는 것은) 세상의 경영술과 정사의 가르침에 대한 도를 일컫는다.

 

非常道 (그것은) 늘 그렇게 길이 존재하는 도가 아니다.

非自然長生之道也 常道當以無為養神 無事安民 含光藏暉 滅跡匿端 不可稱道

(비상도非常道란) 스스로 그러하게 길이 살아 존재하는 도가 아니다. 늘 한결같은 (참된) 도는 마땅히 (드러남이 없이) 무위로 신(정신, 오신五神)을 기르며, 일을 벌임이 없이 백성을 평안하게 하고, 빛을 머금고 광채를 속에 간직하며, 자취를 없애고 (흔적도 없이) 조짐을 숨기는바 도라고 칭할 수가 없다.

[注] 自然長生之道: 스스로 그러하게 길이 살아 존재하는 도이다. 이는 장생불멸의 도를 말한다. 이러한 도의 본체는 ‘원신元神’이 되며, 이는 ‘養神’과 함께 仙道의 개념이다.]

 

名可名 (부귀존영으로 드높은) 이름을 이름이라 하나

謂富貴尊榮高世之名也

(이름이라는 것은) 부귀존영으로 세상에 드높은 이름을 일컫는다.

 

非常名 (그것은) 늘 그렇게 존재하는 이름이 아니다.

非自然常在之名也 常名如嬰兒之未言 雞子之未分 明珠在蚌中 美玉處石間 內雖昭昭 外如愚頑

(非常名은) 늘 스스로 그러하게 존재하는 이름이 아니다. 늘 한결같은 이름은, 아직 말을 못하는 영아 같고, 아직 깨이지 않은 계란 같으며, 조개 속의 밝은 진주나 돌 속에 박힌 아름다운 옥이 안은 비록 밝게 빛나나 겉은 우둔하고 완고한 것 같음을 (소중히) 아끼는 것이다.

 

無名天地之始 이르는 이름이 없어서 천지의 시작이며,

無名謂道 道無形 故不可名也 始者道本也 吐氣布化 出於虛無 爲天地本始者也

‘이름이 없음’은 ‘도’를 일컫는다. 도는 형체가 없으므로 (이름을) 이르는 것이 불가하다. ‘시작’이란 도의 근본을 말한다. (도가) 기운을 토하고 변화를 펼쳐서 (원기는) 허무에서 나와 천지의 근본으로서 시작하는 것이다.

[注] 始者道本也: ‘시작’이란 도의 근본이다. 여기서 ‘道本’은 도의 본체이며, 도 그 자체를 말한다.

吐氣布化: (도의 본체가) 기운을 토하고 변화를 펼치다. 여기서 ‘기氣’는 도가 맨 처음 낳은 ‘태화太和의 정기精氣’이며, 곧 ‘원기元氣’를 말한다. ‘기운을 토하고 변화를 펼친다.’는 이러한 표현방식은 선도적 개념이다.

出於虛無 爲天地本始者也: ‘(원기가) 허무에서 나와 천지의 근본으로서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서 ‘허무虛無(텅 비어 아무것도 없음)’는 『노자』에서의 ‘無(도의 근본)’의 개념을 대체하고 있다. 『노자』 원문은 ‘虛’와 ‘無’의 개념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有名萬物之母 이르는 이름이 있어서 만물의 어미이다.

有名謂天地 天地有形位 陰陽有柔剛 是其有名也 萬物母者 天地含氣生萬物 長大成熟 如母之養子

‘유명’은 ‘천지’를 일컫는다. 천지는 형체와 방위가 있고, 음양은 유연함과 강직함이 있는바 이는 거기에 이름이 있다는 것이다. 만물의 어미라는 것은 천지가 기운을 머금어 만물을 생성하고 크게 길러 성숙케 함이 어미가 자식을 양육하는 것과 같음이다.

 

故常無欲以觀其妙 그러므로 늘 (사사로운) 욕구가 없음으로써 그 오묘한 본체를 보며,

妙 要也 人常能無欲 則可以觀道之要 要謂一也 一出布名道 讚敍明是非也

‘묘’는 ‘요(본체)’이다. 사람이 늘 (사사로운) 욕구가 없을 수 있으면 곧 ‘도의 요(본체)’를 보게 된다. ‘요’는 ‘일一’을 일컫는다. ‘一’이 (도에서) 나와 ‘명도(이르는 도, 곧 유有)’를 펼쳐서 질서를 기리고 시비를 밝힌다.

[注] 妙要也: ‘要’는 ‘요腰’의 본 글자로서 허리 또는 몸체를 뜻하며, 여기서는 ‘본체’로 새긴다.

一出布名道: 여기서 ‘一’은 하나 곧 ‘元氣’를 말하며, 도가 맨 처음 생성하는 ‘태화의 정기’를 뜻한다. 또 ‘名道’는 ‘이르는 도’로서, 도를 이른다는 것은 도에서 비롯하는 ‘有’를 의미하고, ‘有’는 곧 ‘天地’를 뜻한다. 道는 본래 ‘이르는 바가 없음(無名)’인 것이다. 여기의 ‘一’은 천지만물의 근본으로서, 『노자』 원문에서의 ‘無(도의 근본)’와 거의 같은 개념이다.

이 구절에서 말하는 ‘一’은 선도의 개념으로 도의 본체를 의미한다. ‘一’, 즉 원기가 (도에서) 나와 ‘명도(有)’, 즉 ‘천지’를 펼쳐서 천지만물을 경영한다는 내용이며, 이는 「하상공장구」 방식의 ‘천지창조론’이다.

 

常有欲以觀其徼 늘 (사사로운) 욕구가 있음으로써 (세속의 통념에 따른) 외변을 본다.

徼 歸也 常有欲之人 可以觀世俗之所歸趣也

‘요’는 ‘귀착’이다. 늘 (사사로운) 욕구가 있는 사람은 세속의 귀취(취지에 귀착하는 바)를 관찰하게 된다.

 

此兩者同出而異名 이 양자(유욕ㆍ무욕)는 사람의 마음에서 같이 나온 것이되 그 이르는 바가 다르다.

兩者 謂有欲無欲也 同出者 同出人心也 而異名者 所名各異也 名無欲者長存 名有欲者亡身也

‘양자’는 (사사로운) 욕구가 ‘있음’과 ‘없음’이다. ‘(함께) 같이 나온다.’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서 (함께) 같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름이 다르다는 것은 이르는 바가 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사사로운) 욕구가 없이 (만물의 근본을) 일러 말한다면 (치세가) 길게 존속하고, (사사로운) 욕구를 가지고 (만물의 근본을) 일러 말한다면 몸이 망가져 죽는다.

[注] 兩者: 여기에서 ‘양자’는 ‘유욕ㆍ무욕’이라 주석하는 한편, 왕필은 양자를 ‘시始와 모母’라고 주석한다. 이는 ‘양자’‘妙(오묘한 실질)’와 ‘徼(외변)’를 뜻하는 『노자』 원문과는 차이를 보이는데, 그러면서도 『노자』 원문과 달리하는 하상공장구와 왕필주석의 두 모습은 서로가 많이 닮아 있다.

同出者 同出人心也: 여기서 ‘同出’은 사람의 마음에서 (함께) 같이 나온다고 주석하며, 또한 왕필은 ‘玄’에서 (함께) 같이 나온다고 주석한다. 이 또한 ‘하나의 근본바탕(無)에서 (함께) 같이 나왔다는 『노자』 원문과는 다르면서 달리하는 하상공장구와 왕필주석의 두 모습은 서로 유사한 부분이 많다.]

 

同謂之玄 ‘같음’은 ‘하늘’을 일컫는다.

玄 天也 言有欲之人與無欲之人 同受氣於天

‘현’은 ‘하늘’이다. (사사로운) 욕구가 있는 사람과 욕구가 없는 사람이 함께 하늘에서 기운을 받음을 말한다.

 

玄之又玄 하늘 중에 또다시 (더 높은) 하늘이 있어

天中復有天也 稟氣有厚薄 得中和滋液則生聖賢 得錯亂污辱則生貪淫也

하늘 그 중에 또다시 하늘이 있다. (그러므로) 부여 받은 기운에는 두터움과 얇음이 있다. 중화자액(하늘 한 가운데의 조화로운 자양액)을 얻으면 성현이 태어나고, 착란오욕(착란과 오욕)의 기운을 받으면 음탐함이 태어난다.

[注] 天中復有天也: 하늘 그 중에 또다시 하늘이 있다. 여기서 하늘 중의 하늘은 결국 여러 단계의 하늘을 말한다. 천계天界에는 여러 단계의 하늘이 있어 그 중 가장 높은 곳의 하늘이 ‘道界’이며, 이는 곧 ‘원신元神’ 혹은 ‘신선神仙의 세계’이다.

하늘에는 여러 단계의 하늘이 있어서 그로부터 부여받는 ‘氣(정기)’는 근본적으로 차등이 있는바, 좋은 기운을 타고나면 성현이 되고 나쁜 기운을 받고 태어나면 음탐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氣’는 하늘 중에서 가장 높은 하늘인 ‘도계’에 있는 ‘도의 본체(곧 원신元神)가 부여하는 ‘원기(곧 태화의 정기)’를 말한다. 원신으로부터 정기를 부여받는다는 것은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남을 의미한다.

동한 말에 이르러 황로학은 신선도에 가까운 도가의 일파로 변모하는데, 현전하는 「하상공장구」에는 이러한 색채가 매우 짙다. 그런 한편, 당시의 「하상공장구」는 이미 기존의 『노자』 주석서로서 그 무렵 일어나기 시작하는 현학의 논리전개에 기본 틀로서 참고가 되는 등 많은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玄’은 어둡고 묵묵하여 아무것도 없음이다. 말로 할 수 없는 ‘同(같음)’을 이름하여 ‘玄’이라 한다. 이렇게 『노자』에서는 문자로는 道라 하고, 일컬어서는 玄이라 하나 이름을 붙일 수 없다고 말한다(제25장의 원문 ‘强爲之名曰大’에 대한 설명).”라고 하는 왕필의 주석은 「하상공장구」에서의 이 구절 ‘玄(天中復有天也, 하늘 중에 또다시 하늘이 있다)’을 기초로 사유한 흔적으로 보인다.(「하상공장구」나 ‘왕필주석’에서의 ‘玄’은 『노자』 원문에서의 ‘無’와 같은 개념이다.)]

 

衆妙之門 (이는) 온갖 오묘함의 문이다.

能知天中復有天 稟氣有厚薄 除情去欲守中和 是謂知道要之門戶也

하늘 가운데 다시 하늘이 있음을 알고, 부여받는 기운의 두텁고 얇음을 알며, (사사로운) 정과 욕구를 제거하여 하늘 중의 하늘(도계의 하늘)의 조화를 지킬 수 있는 것, 이를 일러 도의 본체에 대한 문호를 안다고 일컫는다.

 

 

2. 「왕필王弼 주注 노자」(도장본道藏)

第一章 名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도를 도라고 할 수 있으나 (말로 일컬어지는) 도는 늘 스스로 그러하게 한결같은 도가 아니다. (통념에 의한) 이름을 이름이라 할 수 있으나 (그것은) 늘 스스로 그러하게 한결같은 이름이 아닌 것이다.

可道之道 可名之名 指事造形 非其常也 故不可道 不可名也

도라고 할 수 있는 도와 이를 수 있는 이름은 사물을 가리키고 형체를 짓는 것으로서 늘 한결같지 않다. 그러므로 (늘 한결같은 참된 도는) 도라고 말할 수 없고, (한결같은 근본은 이름을) 이를 수가 없는 것이다.

[注] 원문 ‘名可名 非常名’에서 세 번째의 ‘名(이름)’은 왕필의 주석에서는 ‘無의 이름’을 뜻한다.]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이름(이르다)이 없음이 천지의 시작이며, 그 이름이 있음으로서 만물의 어미가 된다.

凡有皆始於無 故未形無名之時 則爲萬物之始 及其有形有名之時 則長之育之亭之毒之 爲其母也 言道以無形無名始成萬物 以始以成而不知其所以 玄之又玄也

무릇 유는 모두 무에서 시작한다. 그러므로 아직 형체가 이루어지지 않고 이름이 없는 때가 곧 만물의 시작이다. 형체가 드러나고 이름이 있는 때에 이르러서는 (유형유명이, 즉 천지가) 만물을 기르고 육성하여 형체를 짓고 체질體質을 이루니 (천지는) 그 어미가 된다.

도가 무형無形ㆍ무명無名으로 시작하여 만물을 이루는바 그렇게 (천지가) 시작하고 (만물이) 이루어지나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은, 어둡고 컴컴함을 말하는 것이다.

[注] 亭之毒之: ‘亭之毒之’는 『노자』제 51장 원문의 구절인데, 이에 대하여 왕필은 ‘謂成其質(그 바탕을 이룸을 말한다.)’이라 주석한다.

玄: 여기서 ‘玄’은 ‘어둡고 컴컴함’, 곧 ‘無’를 의미하고 있다.]

 

故常無欲以觀其妙 그러므로 늘 사사로운 욕구가 없음으로써 (천지 만물이 시작되는) 그 현묘함을 보며,

妙者 微之極也 萬物始於微而後成 始於無而後生 故常無欲空虛 可以觀其始物之妙

‘묘’는 미세함이 지극한 것이다. 만물은 미세함에서 시작하여 이루어지며, (천지가) 무에서 시작한 이후에 생겨나므로 항상 마음을 무욕공허하게 텅 비워서 만물이 시작되는 현묘함을 보게 된다.

 

常有欲以觀其徼 늘 사사로운 욕구가 있음으로써 (상대적 관념으로 인하여) 그 외변을 보게 된다.

徼 歸終也 凡有之爲利 必以無爲用 欲之所本 適道而後濟 故常有欲 可以觀其終物之徼也

‘요’는 ‘종말에 귀착함’이다. 무릇 有(천지만물)가 이롭게 되는 것은 반드시 無(무형ㆍ무명)로써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이는) 근본적인 것을 추구하여 도를 만난 이후에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늘 (사사로운) 욕구를 가지면 종물의 외변을 바라보게 된다.

[注] 여기서 왕필은 ‘以無爲用’이라 하여 無(아무것도 없음)로써 (도가) 用(작용)한다고 풀이한다. 왕필의 주석은 대체로 ‘無’가 세상의 물정에 직접 작용한다(用)는 뜻으로 풀이하는데, 그처럼 『노자』에서의 ‘無’와 개념을 달리하는 형태나 방식이 「하상공장구」와 많이 닮아있다. (제11장에 대한 「하상공장구」 참조)

한편, 『노자』에서 ‘無’는 ‘有와 無’에서처럼 어떤 실질의 존재 여부를 뜻하는 글자이며, 제14장에서 ‘無’는 ‘道紀(도의 근본바탕)’를 의미한다. 그러한 ‘無’는 ‘有’가 ‘현상’으로 드러나기 이전 상태의 물리적 실존체로서 부귀권세나 명예 등의 목적을 위해 기술이나 도구처럼 임의로 사용하거나 사사로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이는 세상의 물정에 직접 작용하거나(用) 현실적 이해에 직접 쓰임이 되는 그런 개념도 아니다.

終物之徼: 여기서 ‘종물’은 근본에서 비롯되어 有로 드러난 ‘만물’을 뜻하며, ‘요’는 사물의 외변 또는 피상적 관념을 말한다.]

 

此兩者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이 양자(천지의 시작과 만물의 어미)는 ‘현(玄)’에서 같이 나온 것이나 그 이름이 다르다. ‘같음(同)’은 ‘현’을 일컫는데, 어둡고 아득하여 아무것도 없어 온갖 오묘함의 문이다.

兩者 始與母也 同出者 同出於玄也 異名 所施不可同也 在首則謂之始 在終則謂之母 玄者 冥也 默然無有也 始 母之所出也 不可得而名 故不可言同名曰玄 而言謂之玄者 取於不可得而謂之然也 謂之然 則不可以定乎一玄而已 則是名則失之遠矣 故曰玄之又玄也 衆妙皆從同而出 故曰衆妙之門也

양자란 (천지의) 시작과 (만물의) 어미이다. 같이 나왔다는 것은 ‘玄’에서 함께 나왔다는 것이다. 이름이 다르다는 것은 시행하는 바가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첫머리에 있어서는 ‘시’라 하고, 종말에 있어서는 ‘모’라고 한다. ‘현’은 어두움이다. 묵묵하여 아무것도 없음이다.

‘시작’은 (만물의) 어미가 나오는 곳인데, (상대적 개념인 통념으로는 분별하여) 이를 수 없다. 그러므로 말로 할 수 없는 ‘同(같음)’을 이름하여 ‘玄’이라 하는데, (동을) 일컬어 현이라 하는 것은 그러함을 일컬을 수 없음에서 취하였다는 말이다. 그러함을 일컫는다면 (‘현’이란 도저히 어떠한 상태를 일컬을 수 없는 것이므로) 하나의 현으로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이다. (만약 하나의 현을 규정한다면) 그 이름은 곧 광원함을 잃는다. 그래서 어둡고 묵묵하다고 한다. 뭇 오묘함이 모두 ‘같음(同)’을 좇아서 나오므로 ‘뭇 오묘함의 문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注] 兩者 始與母也: ‘양자’란 (천지의) 시작과 (만물의) 어미이다. 여기서 왕필은 ‘兩者’를 ‘始’와 ‘母’라고 주석하는데, 『노자』 원문에서는 ‘兩者’‘妙(오묘한 근본실질)’와 ‘徼(외변)’를 뜻하고 있는 것과 차이를 보인다.

同出者 同出於玄也: 같이 나왔다는 것은 ‘玄’에서 함께 나왔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玄’을 『노자』에서의 ‘無’와 같은 개념으로 풀이하고 있다.

또한, 왕필은 「노자지략」에서 제25장의 원문 ‘强爲之名曰大’에 대한 설명으로 ‘是以篇云 字之曰道 謂之曰玄 而不名也(이렇게 『노자』에서는 문자로는 道라 하고, 일컬어서는 玄이라 하나 이름을 붙일 수 없다고 말한다.)라고 하면서 ‘大’를 ‘玄’으로 대체하였고, ‘玄’을 ‘無’의 개념으로 풀이하고 있다.

則不可以定乎一玄而已: 하나의 현으로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이다. 여기서 ‘一玄’은 ‘하나의 개념으로서 규정한 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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