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도덕경(21장~30장)

노자 도덕경 제21장

나무와 까치 2013. 8. 12. 07:59

 

제21장. 도道와 덕德

 

 

 

 

공덕지용 유도시종 도지위물 유황유홀 홀혜황혜 기중유상 황혜홀혜 기중유

孔德之容 唯道是從 道之爲物 唯恍唯惚 惚兮恍兮 其中有象 恍兮惚兮 其中有

물 요혜명혜 기중유정 기정심진 기중유신

物 窈兮冥兮 其中有精 其精甚眞 其中有信

눈에 보이는 덕의 모습은 오직 道 그것을 (그대로) 좇는다. (덕이 도를 그대로 좇아 행하는 그것은) 도가 만물을 이루는 일로서 오직 경이롭고 오직 홀연하다. 홀황하여 그 중에 象(형상形象)이 있고, 황홀하여 그 중에 物(물질物質)이 있으며, 요명하여 (고요하고 어두운) 중에 精(생명)이 있다. 그 정은 매우 질진質眞하여 그 가운데 미더움이 있다.

 

- 孔德之容 唯道是從: (눈)구멍 속에 덕의 모습은 오직 도 그것을 그대로 따른다. 즉, 눈에 보이는 덕의 모습이란, 도가 행하는 일인 ‘만물을 이루는 일’을 그대로 좇아 행하는 것이다.(제41장 道隱無名 夫唯道 善貸且成 참고)

실제로 생명체가 형성되는 경이롭고 신비한 현상이 도의 운행을 그대로 좇아 작용하는 덕의 행위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이는 생명을 잉태시키는 천지자연의 물리적 작용이 바로 ‘덕의 여러 작용’ 중 하나라는 노자의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孔(구멍)’은 눈구멍 곧 눈동자(동공瞳孔)이며, ‘눈으로 본다.’는 의미이다. ‘孔德之容’은 ‘구멍 속의 덕’이며, 곧 ‘눈에 보이는 덕의 모습’을 일컫는다. ‘孔德之容’은 ‘눈에 보이지 않는 덕의 작용’이 아닌 육안으로 드러나 보이는 ‘덕의 작용하는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장자』 ‘인간세’편 제1-5절 ‘夫以陽爲充孔揚<(그의 성정은) 혈기로 가득하여 눈동자(동공)에 드러나다>’ 참고)

 

- 道之爲物: (덕이 좇아 행하는 그것은) 도가 만물을 이루는 일이다. 도를 그대로 좇는 덕이 도가 행하는 바를 따라 만물을 생성한다는 것인데, 결국 ‘만물을 이루는 그 일’을 덕이 도를 대신하여 이룸을 말한다.(제41장 道隱無名 夫唯道 善貸且成 참고)

≪참고: 보고 있으되 보지 못하고 듣고 있으되 듣지 못하며 쥐고 있으되 갖지 못하는 어떤 것이 한데 섞이어 하나로 있는데, 하늘과 땅이 있기 이전이다. 그것은 한없이 크고 광원하여 명암으로 구분되지도 않으며, 끝없이 연이어져 (상대적 개념으로는 그 실질을) 이를 수가 없다. 결국 물질이 없음(無)으로 다시 돌아간다.

이를 형상形狀이 없는 형상이고 물질이 없는 현상現象이라 하며, 있는 듯 없는 듯 홀연하고 경이롭다. 그 실질을 온전히 인식할 수는 없으나 실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체의 지각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바 ‘無(없음)’라고 한다(제14장). 여기서, ‘한데 섞이어 하나로 이루어진 그것’은 ‘無’이다. 그리고 이 ‘無’가 바로 ‘도기道紀(도의 근본바탕)’인 것이다.

‘無(도의 근본바탕)’에서 ‘有(天ㆍ地)’가 생겨나오고, 만물은 ‘有(天ㆍ地)’에서 생겨난다. ‘有(天ㆍ地)’에서 상象ㆍ물物ㆍ정精이 생겨나 그 셋은 만물을 구성하는 것이다. 여기서 ‘有’는 곧 天ㆍ地를 뜻하며, ‘천ㆍ지’는 도를 그대로 좇아 만물을 낳아 먹여 기르는 ‘德’을 의미한다.

도는 덕으로 하여금 만물을 이루게 하고, 덕은 도를 그대로 좇아 생명의 생성에 직접 관여한다. 도에서 비롯한 덕이 만물을 생기게 하며, 도를 그대로 따르는 덕만이 만물을 낳아 먹이고 기르고 오로지 도를 온전히 이행할 수 있다(上德). 만물이 나서 늙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모두 德의 운행에 의한다.

도에서 나와 ‘有(천지만물)’가 되면 이는 이미 도가 아니므로 도에서 나온 만물은 즉시 덕의 범주에 귀속된다. ‘도를 잃은 후에는 덕’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과정들을 말하는 것이다.

(제1장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제4장 象帝之先, 제10장 生之畜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제21장 孔德之容 唯道是從, 제38장 失道而後德, 제40장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제41장 道隱無名 夫唯道 善貸且成, 제42장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제51장 道生之 德畜之 物形之 勢成之ㆍ是謂玄德 참고)

ㆍ 함께 섞인 채 하나로 이루어진 어떤 것이 천지보다 먼저 있었는데, 고요하고 그윽하게 독립적으로 있으며 다시 고침이 없고, 두루 행하나 위태롭지 않으니 이는 천지의 어미이고 천하 만물초목이 존재하는 근본이 되는 ‘道’이다.(제25장 有物混成 先天地生 寂兮寥兮 獨立不改 周行而不殆 可以爲天下母)

도는 크고 광원하여 멀리 (운행하여) 가고 가면 되돌아오며 늘 한결같은 작용으로 스스로 그러하게 있는 ‘常自然한 존재’이다.(제25장 吾不知其名 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 大曰逝 逝曰遠 遠曰反 故道大.. 및 道法自然)

덕은 도를 좇아 행하므로 덕 역시 크게 움직인다.(제21장 孔德之容 唯道是從)

ㆍ 도는 (세상의) 깊숙이에 있으면서 (늘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으나 (사람들은 그것이) 가득차지 않은 것으로 의심한다(제4장 道沖而用之或不盈). 도의 작용은 미약한 듯하다.(제40장 弱者道之用) 도는 (분별하는) 이름이 없이 숨어 있다(제41장 道隱無名).

ㆍ 도는 만물이 태어난 속이며, 의지하여 돌아가는 근본이다(제62장 道者萬物之奧). 덕의 운행에 따르던 만물은 죽으면 다시 도로 돌아간다(제34장 萬物歸焉而不爲主, 제40장 反者道之動, 제50장 出生入死).≫

 

- 唯恍唯惚: 오직 경이롭고 오직 홀연하다. ‘惚恍’ 및 ‘恍惚’은 홀연하고 경이로움을 나타내는 감탄사이다.

 

- 惚兮恍兮 其中有象, 恍兮惚兮 其中有物, 窈兮冥兮 其中有精: 홀연하고 경이로운 그 중에 象(드러난 形象)이 있고, 경이롭고 홀연한 중에 物(물질, 실물)이 있으며, 고요하고 어두운 중에 精(정기, 생명)이 있다.

‘精’은 세포의 생명활동으로 일어나는 기운으로서 생명의 근원根源이며 생명 그 자체이다. ‘정’은 精氣와 精神의 본질로서 만물의 생명과 性質을 구성하는바, 『노자』에서 ‘정’은 정기이며, ‘생명’, ‘생명의 근원’ 및 ‘천연한 그대로의 정신’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其中有象’과 ‘其中有物’은 도를 그대로 좇아 행하는 덕에 의하여 생명이 생성되는 연속된 상황을 순서대로 기술한 것인데, 이와 유사한 내용이 ‘復歸於無物 是謂無狀之狀 無物之象’이라 하여 제14장에 나온다. 다만 여기의 ‘其中有象, 其中有物’과 그것의 차이점이라면 여기서는 도를 따르는 덕에 의해 새로이 생명이 생성되는 현상을 표현하고 있으며, 제14장에서는 기존의 생명이 道(無)로 되돌아가는 상황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여기의 ‘其中有’ㆍ‘其中有’과 제14장의 ‘復歸於無物 是謂無狀之狀 無’은 각각 도에서 생명이 태어남과 생명이 죽어서 도로 돌아감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 상황의 전개과정이 서로 반대이므로 ‘象ㆍ物’의 글자배열이 역순인 ‘物ㆍ象’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제14,40,42,50,62장 참고)(象: 제4,14,21,35,41장)

≪참고: 『노자』에 나오는 정精이나 기氣, 신神 등은 神이나 신선神仙, 귀신鬼神 따위의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한의학이나 한의학의 교과서라 하는 『동의보감(허준)』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정精이나 기氣, 신神, 정기精氣, 정신精神처럼 당시로서는 일상화된 용어인 것이다. 따라서 『노자』에 나오는 精, 氣, 神 등은 현대 한의학 용어로서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 其精甚眞 其中有信: 그 정은 (본질 그대로이므로) 매우 참되어 그 자체에 미더움이 있다. 천연한 그대로 진실한 精(곧 정신精神)이야 말로 진정한 만물의 근본으로서 믿음이 있는 것이다.

 

 

자고급금 기명불거 이열중보 오하이지중보지상재 이차

自古及今 其名不去 以閱衆甫 吾何以知衆甫之狀哉 以此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만물에 붙여진 처음의) 이름이 없어지지 않으므로 (세상은) 그 이름으로 중보(뭇사람)를 알아본다. 나는 어떻게 중보의 실상을 아는가? 이로써(精으로써) 안다.

 

- 自古及今 其名不去 以閱衆甫: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만물에 붙여진 처음의) 이름이 없어지지 않으므로 (세상은) 그 이름으로 뭇사람(중보)을 알아본다. ‘古’는 천하가 시작한 그 옛날이며, ‘其名’은 ‘有’가 도에서 생성되어 나온 그 옛날에 처음 붙여진 만물의 이름’이다.(제32장 始制有名 名亦旣有 참고)

천하가 시작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세상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입장에서 사물을 규정하는) ‘이름’으로써 만물을 인식한다.(名: 제1,14,21,25,32,34, 37,41,44,47장)

이 구절은 예로부터 난해한 부분으로 알려져 왔으나 문구를 자연스러운 그대로 읽어보면 그리 어려운 내용이 아니다. 그러한 것이 주해자의 의도나 특정한 방향성으로 인해 오히려 난해하게 되어버렸다. ‘하상공’은 여기서 ‘名’을 ‘道의 이름’으로 풀이하며, 왕필은 ‘名’을 ‘無의 이름’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것은 각각 선도의 입장과 현학의 입장이 반영된 해석이다.

 

- 吾何以知衆甫之狀哉 以此: 나는 어떻게 만물의 실상實狀(정상情狀)을 아는가? 이로써(以此) 안다. 여기서 ‘以此’는 ‘精’을 가리킨다. ‘정’은 덕이 생성한 생명의 근본으로서 ‘정기精氣’이며, ‘천연한 생명력’이고, 이는 곧 ‘정신精神’의 본질이다. ‘衆甫’의 ‘甫’는 일반의 ‘사내’ 혹은 ‘사람’이며, ‘衆甫’는 ‘뭇사람’으로 새길 수 있다.

결국, 만물의 실상을 안다는 것은 그 이름으로서가 아니라, 생명의 근본 실질(곧 천연한 그대로의 정신)을 직시함으로써 ‘늘 한결같은 본래의 참모습’을 알아볼 수가 있다는 것이다.(제1장 ‘常無欲而觀其妙’ 참조)

 

- 吾: 여기서 ‘吾’는 제20장의 ‘我’와 비록 같은 ‘나’를 지칭하고 있으나 그 용도는 각각 다르다. 여기의 ‘吾’는 대외적으로 자신을 삼가 칭하면서 대화상대방인 왕을 대접하는 어투의 ‘나’이며, ‘아’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자아自我의 정체’로서 ‘나’이다.(吾: 제4,13,16,21,25,29,37,42,43,49, 54,57,69,70,74장)(我: 제17,20,42,53,57,67,70장)

 

 

[章注] 제21장은 (제14장 및 16장에서 밝힌) ‘상자연한 우주대자연의 섭리로서 道’를 그대로 좇아 참되게 행하는 ‘천지자연의 섭리로서 德’을 설명한다. 즉, ‘덕(천ㆍ지)’이 ‘(우주대자연으로서) 도’를 그대로 좇아 만물의 생명을 이루는 실상實狀을 자연의 물리적 현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제22장-제25장은 ‘우주대자연의 섭리로서 도’가 사람(왕)으로 이어지는 이치(곧 上德)에 대한 설명이다.

[제21장, 덕은 도가 행하는 바를 그대로 좇아 행한다.]

눈에 보이는, 덕의 운행모습은 오직 도 그것이 행하는 바를 그대로 좇는다. (즉, 덕이 도를 그대로 좇아 행하는 그것은) 도가 만물을 이루는 일로서 오직 경이롭고 오직 홀연하다. 홀황하여 그 중에 상象(형상形象)이 있고, 황홀하여 그 중에 물物(물질物質)이 있으며, 고요하고 어두운 중에 정精(생명)이 있다. 그 정은 매우 질진質眞하여 그 가운데 미더움이 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세상은 처음에 붙여진 그 ‘이름’으로 중보(뭇사람)를 인식한다. 나는 어떻게 중보의 실상實狀을 아는가? 바로 정精(천연한 그대로의 정신) 이것으로 안다.

 

원문 孔德之容 唯道是從을 왕필은 ‘孔 空也 惟以空爲德 然後乃能動作從道<‘공’은 ‘빔’이다. 오직 공(빔)으로 덕을 이룬 후에야 행동을 갖추어 도를 따를 수 있다.>‘라고 주석하여 ‘孔’을 ‘空’으로 풀이한다.

한편, ‘하상공’은 이 부분을 ‘孔 大也 有大德之人 無所不容 能受垢濁 處謙冲<‘공’은 ‘크다’이다. 큰 덕을 지닌 사람은 용납하지 않음이 없어 더럽고 탁함도 받아들여 겸허하고 깊이 있게 처신할 수 있다.>‘이라 주석한다.

원문 惚兮恍兮 其中有象은 「하상공장구」에는 다음 구절 恍兮惚兮 其中有物과 순서가 바뀌어 있으며, ‘道唯窈冥無形 其中獨有萬物法象<도는 오직 고요하고 어두우며 형체가 없고, 그 가운데 홀로 만물의 법상(본 형상, 즉 元神)이 있다.>’이라 하여 선도의 입장으로 풀이한다.

‘하상공’은 원문 恍兮惚兮 其中有物에서 ‘道唯恍忽 其中有一 經營生化 因氣立質<도는 오직 경이롭고 홀연한 가운데 하나가 있어 (모든) 생성변화를 경영하니 (만물은) 원기로 인하여 본바탕이 세워진다.>’이라 주석하는데, 여기의 하나(一)는 선도의 개념인 원기를 말한다.

또, 원문 窈兮冥兮 其中有精은 ‘道唯窈冥 其中有精實 神明相薄 陰陽交會之<도는 고요하고 어두운 가운데 정기의 실질이 있어 신명이 서로 감싸고 음양이 어울려 만난다.>’라고 선도의 관점으로 주석하고,

원문 其精甚眞에서 ‘言道精氣神妙甚眞 非有飾也<도의 정기는 신묘하고 심히 참되어 꾸밈이 없다.>’라고 주석하는데, ‘신묘’는 선도의 개념이다.

또, 원문 自古及今 其名不去에서 ‘하상공’은 ‘自 從也 從古至今 道常在不去<‘자’는 ‘따르다’이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도는 늘 존재하여 떠나지 않는다.>‘라고 하여 원문의 ‘名’을 ‘도의 이름’으로 풀이한다.

한편, 왕필은 이 부분을 ‘至眞之極 不可得名 無名 則是其名也 自古及今 無不由此以成 故曰自古及今 其名不去也<참모습이 극에 이르면 (그것을) 분별하여 이를 수 없으니 무명이 곧 그 이름이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지극히 참된 무명)로 말미암아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으므로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이 떠나지 않는다”고 한다.>’라고 하며 ‘名’을 ‘無의 이름’으로 풀이한다.

여기에서 ‘하상공’ 주석과 왕필의 주석은 모두 『노자』의 원의와 뜻을 달리하는데, 그 달리하는 모습이 서로 함께 상당히 닮아 있다.

원문 以閱衆甫에서 ‘하상공’은 ‘閱 稟也 甫 始也 言道稟萬物始生 從道受氣<‘열’은 ‘부여하다’이다. ‘보’는 ‘시작’이다. 도가 처음 만물의 태어남을 부여하여 (만물은) 도를 좇아 정기를 받는다는 말이다.>‘라고 주석한다. 만물이 정기를 받는다는 것은 도로부터 원기를 받아 태어난다는 의미이며, 이는 선도의 개념이다.

한편, 왕필은 이 부분을 ‘衆甫 物之始也 以無名閱萬物始也<중보는 만물의 시작이다. 무명(이름 없음)으로 만물의 시작을 식별한다.>’라고 주석한다.

원문 吾何以知衆甫之狀哉에서 ‘하상공’은 ‘吾何以知萬物從道受氣<내가 어찌 만물이 도를 좇아 정기를 받는지 아는가?>’라고 주석하며,

원문 以此에서는 ‘此 今也 以今萬物皆得道之精氣而生 動作起居 非道不然<‘차’는 ‘지금’이다. 지금의 만물이 모두 도의 정기를 얻어 생성됨으로써 움직여 일어나 기거한다. (이는) 도가 아니면 그러하지 못한다.>‘이라고 주석한다.

본장 전체를 ‘하상공’은 선도의 입장에서 해석하며, 왕필은 전체를 현학의 논리로 풀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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